〈 80화 〉 80.
* * *
한참 분주하게 찬장을 뒤져 내 몫의 식기를 차린 후,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따끈따끈한 빵과 수프였다.
자리에 앉아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귀족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소박한 성찬이다.
먼저 거뭇한 빵을 뜯어 한입 맛을 본다.
갓 구운 빵의 겉 크러스트가 빠삭하게 부서지며,
촉촉한 속살이 후끈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맛있어..!'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평소 먹던 흰 빵과는 달리, 야성적인 고소함이 곁들어진 빵에서는,
농촌의 생명력이 넘쳐나는 것만 같았다.
고소한 빵을, 수프에 찍어 먹어본다.
진한 크림과 치즈의 맛이, 고소한 빵에 농밀하게 녹아든다.
"어머님, 요리솜씨가 대단하시네요."
"아니에요, 별 것 아닌데.."
어머니는 부끄러워하셨지만, 올리비아는 엄마가 칭찬을 받은 게 기쁜 것 같았다.
"엄마 빵 굽는 솜씨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이에요."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비법이 뭔가요?"
"우리 농장에서 직접 기른 밀을 거칠게 갈고, 거기에 보리가루를 살짝 섞어 반죽한다고 하셨어요."
"아하, 그래서 이 깊은 고소한 맛이.."
"얘도 참, 신관님께 이런 거친 빵을 자랑하면 어떻게 하니.. 새하얀 빵이나 더 좋은 음식을 얼마나 많이 드셔 보셨을 터인데,"
"아 그런가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진짜 맛있습니다. 아주 고소해요.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빵은 동네가 아니라 영원의 도시 전체에서 가장 잘 구우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맛있는 빵은 처음 먹어 봐요."
약간 아부성 발언을 섞었는데, 의외로 잘 먹히는지 어머님의 볼이 발그레 물든다.
"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남성분 입맛에는 좀 거칠 텐데.."
"그쵸? 우리 엄마 솜씨가 최고라니까요."
"얘도 참."
"진짜 맛있어요 어머님. 이렇게 솜씨 좋은 부인을 두었던 남편분은 행복하셨겠네요."
"아.."
살짝 표정이 굳는다.
나는 모르는 척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이가 떠난 지는 오래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집에 남자가 온 건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 다음 요리는, 아, 어쩜 좋아.."
"왜 그러시나요?
"그, 메인 요리로 치즈 그라탕을 하는데, 저나 딸은 농장일을 하는 터라 고기를 많이 넣어 먹거든요..
"아.."
엄청 부끄러워하는 어머니와 올리비아.
이 세계에서는 젊은 남자는 고기 별로 안 좋아한다는 인식이 있다.
고기 자체를 좀 야만적인 음식으로 보기도 하고.
"그, 조금만 기다리시면 고기를 좀 빼서 드릴게요.."
치즈와 야채와 고기가 뒤섞여 있을 그라탕에서 고기만 일일이 빼려면 손이 엄청 갈 텐데 그걸 하시겠다고 하는 어머님.
'아 왜 저렇게 사랑스럽지.'
손님에게 정성을 다한다.
내가 고기를 좋아하는 걸 모르셔서겠지만,
진짜 정성을 다해 대접하려는 게 느껴져서 감동적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 고기 아주 좋아합니다."
"에? 고기를요?"
"네. 고기 잘 먹어요. 매일 먹고요. 없어서 못 먹습니다."
어머님은 망설였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진짜에요. 제 몸을 보세요. 고기를 안 먹으면 이런 몸이 될 수가 없어요."
증명이라도 하듯, 살짝 옷을 걷어 단단한 팔을 보여준다.
어머님의 시선이 은근히 농밀해지는것이 느껴진다.
그렇다.
아직 한창일 나이.
성욕이 없을 리가 없다.
"아. 읏. 네. 아, 알겠어요."
남자인데 예상 외로 단단한 몸에 당황했는지 어머님은 고개를 돌린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거 킹능성 있는데?'
하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올리비아는 순수하게 근육에 감탄했다.
"아.. 남자인데도 몸이 엄청 단단하시네요."
"그쵸? 한 번 만져 볼래요?"
팔을 내밀자, 올리비아는 당황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저, 정말 만져도 되나요?"
나는 빙긋 웃으며, 올리비아를 살짝 놀린다.
"너무 야하게만 만지지 않으면 괜찮아요."
"아.. 네! 안 야하게 만질께요."
올리비아는 놀리는 줄도 모르고 약속한다.
그렇게 대답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미 글렀다.
안 야하게 안야하게 계속 신경쓰면 더욱 야해지는 법.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며 만지려고 하니 오히려 두 배 세 배 의식하게 되어 버린다.
"어, 엄청 단단해요."
순진한 처녀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자극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오늘 밤 또 들을 기회가 있겠지만 말이다.
"남자가 이런 건 처음 봐요."
"그래요?"
"네, 엄청 울퉁불퉁해요."
"혹시 징그럽거나 싫진 않은가요?"
"싫지는 않아요."
뺨을 붉히면서 그렇게 대답하는 올리비아.
싫기는 무슨, 좋지. 엄청.
얼굴 보면 다 안다.
아무튼 다음 메뉴는 비프 그라탕.
야채와 토마토 소스에 굵직하게 잘라넣은 소고기를 얹고 치즈와 빵가루로 마무리했다.
노릇노릇한 치즈 위에 파슬리 같은 말린 엘프 향초를 솔솔 뿌려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한 숟가락 뜨자, 치즈가 쭈욱 늘어난다.
돌돌 말아 입에 넣어 보니, 용암처럼 뜨겁다.
"허브브.."
입안에 흘러넘치는 농축된 치즈의 풍미.
진한 버터향과 함께, 야채와 고기가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천천히 드세요."
작은 접시에 그라탕을 떠서 덜어주는 올리비아의 어머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진짜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별 거 아닌 소박한 음식이라 민망한데.."
"아니에요 정성이 가득 들어간게 느껴지는데요."
올리비아의 어머님은 젊은 남자가 칭찬해주시니 많이 좋으신지,
오또케오또케하며 볼을 붉히셨다.
"그래도 영.. 아, 올리비아, 작년에 담근 체리주 혹시 아직 남아 있니?"
"응. 엄마. 한 병인가 두 병인가 남아 있어."
"나도 참, 반주도 없이.. 식사에 반주가 빠지면 안 되죠.. 잠시만요."
뭘 자꾸 내놓으려고 하시는 어머님.
내가 마다하는데도 굳이 일어나 술을 들고 오셨다.
작년에 담근 건데 아주 맛이 일품이라고,
술병에 담긴 붉은 빛 체리주를,
내와 올리비아의 나무 컵에 따른다.
"어머님도 한 잔 하시죠."
"아.. 네."
살짝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하고 한 모금 마셔보니,
진짜 맛있었다.
새콤달콤하니 시원한 맛에 톡 쏘는 약간의 탄산,
그리고 달콤하게 올라오는 끝 맛.
"일품이네요."
"네, 다들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술이 들어가며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하는게 느껴졌다.
체리주는 의외로 도수가 꽤 되는지,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올리비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 말렴.. 오늘밤은 중요한 일이 있잖니.."
"응. 엄마."
나는 술이 쎈 편이었는데,
올리비아 대신 어머님이 반주를 맞춰주시다 보니,
어머님도 금방 얼굴이 붉어지셨다.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니세요?"
"아.. 그만 마셔야겠네요. 잠깐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머님,
살짝 비틀거리는 것을, 내가 재빨리 부축해 드린다.
"아.."
팔과 팔이 닿는 순간, 찌릿한 느낌이 흐른다.
눈을 피하시는 어머님.
"저.. 디저트를.. 과일을 가져올게요."
나는 순순히 올리비아의 어머님은 놓아드렸다.
식사는 거의 마쳤고, 곧이어 과일이 나왔다.
어머님은 과일쟁반을 놓고, 올리비아에게 소근소근 귓속말을 하시더니,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어디 가시는 거야?"
"준비할 게 있으시데요."
잠시 올리비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과일을 먹고 있자니, 어머님이 다시 돌아오셨다.
"다 드셨으면, 이쪽으로 와 주세요."
"아, 예."
뭔가 하고 따라가는데, 주방의 뒷문으로 나가더니 헛간으로 향하는 어머님.
나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 없이 따라갔다.
헛간까지 절반쯤 갔을까,
어머님이 뒤돌아보시더니 말을 걸었다.
"저기.. 올리비아는 너무 순진한 면이 있어서.."
"아 네."
"그, 정말 죄송한 이야기인데, 신관님께서 좀 잘 이끌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대충 어머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눈치챘다.
"아, 사정은 다 압니다. 걱정 마세요."
"네..? 어떻게."
"아직 자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걸요."
"그..그런 이야기까지 했었나요?"
"네. 걱정 마세요. 저는.. 아주 '능숙' 하거든요.."
가까이서 그렇게 속삭이자, 어머님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모녀가 한세트로 진짜 순진하네.'
아무튼 헛간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목욕통에 꽃잎이 둥둥 띄워져 있었다.
아까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게, 이걸 준비하시기 위해서였나 보다.
"여기서 목욕을 다 하시면, 올리비아의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 예."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옷을 벗고, 뜨끈한 물에 꽃잎이 둥둥 띄워진 욕조에 들어간다.
미끈한 물이 기분이 참 좋았다.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 보니,
마른 수건과 새 옷이 욕조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갈아입으라는 건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한 일이었기에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목욕을 다 하고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밤공기가 기분좋았다.
"아.. 다 하셨나 보네요."
"네."
"이쪽으로.."
올리비아의 방에 도착하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준비를 하고 올려 보낼게요."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 어머님은 떠났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근두근 기다린다.
살짝 이불자락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니, 연한 오렌지향이 난다.
올리비아의 향기다.
방 안은 그 사이 정리를 해 두었는지 별 것 없었다.
특별한 것이라면 일기 같은 책이 한 권 있다는 것 정도?
살펴볼까 하다가, 매너가 아닌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는데, 아래층에서 작게 말소리가 들린다.
"정말 괜찮겠니? 나는 걱정이 되서.."
"걱정 마. 엄마."
"화장도 할 줄 모르는 네가 하룻밤이라니.."
"그건 그렇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임신을 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사실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 분께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두렵구나.."
"괜찮아. 그냥 하룻밤 보내는 건데 뭐."
"하아.. 아무튼.. 잘 하렴."
"응. 엄마."
'어머님 걱정이 참 많으시네..'
나는 속으로 웃었다.
하긴 자위도 모르는 처녀가 첫날밤을 보낸다면 어떨지 걱정이 안 되면 이상한 일이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문 앞에서, 올리비아는 숨을 한 번 크게 쉬더니,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화관을 쓴 올리비아.
그야말로 농촌의 신부 같은 모습이다.
안 꾸민 듯 애틋하게 꾸민 모습이 가슴을 울린다.
"들어와요."
본인 방인에 남의 방처럼 주춤주춤 들어오는 올리비아.
살며시 걸어오더니, 내 옆에 앉는다.
"저.. 준비 다 됐어요."
준비? 무슨 준비일까?
"이제.. 우리 손 잡고 자죠..!"
"손 잡고 자요?"
"네.. 알몸으로 손 잡고 자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 주실 거라고 들었어요."
음.
큰일이다.
어머니, 걱정이 많으시더니, 그냥 전부 제게 떠넘기셨군요.
설명할 것이 아주 많을 것 같다.
그러면 이걸..
"흠.."
"..왜 그러세요?"
설명을 하려면 복잡할 것 같으니, 그냥 실전으로 보여주자.
"아니에요. 그러면 일단 옷을 벗을까요?"
"아..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