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63화 (63/140)

〈 63화 〉 63.

* * *

한편 그동안 나는,

세피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수 앞에 위치한 영원의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에서.

여기서 퇴근시간 후에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근데 세피아가 안 온다.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계속 안 온다.

오늘 보람찬 날이 될 것 같아­

꽃단장을 다 하고 왔는데­

세피아가 오지를 않아­

이거 퇴짜 맞은 거.. 일리는 없고.

아마도, 일이 어마무시하게 바쁜가 보다.

자고로 마력이 많은 귀족엘프들은,

사회에서 맡은 역할도 그만큼 컷다.

소피엘 같은 경우는 며칠에 한 번씩 제련로에 어마어마한 동력을 공급해야 했고,

세피아는 듣기로는 마력망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고 했다.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금속공학과 전기통신 정도..

많이 바쁜가 보다.

그런 거겠지..?

나 설마 퇴짜 맞은 건 아니겠지..?

어차피 갈 데도 없어서, 느긋하게 기다린다.

저녁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다.

원래대로 라면 만나서 데이트하고 저녁을 먹고.. 그 다음은, 흠흠..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뭐.

별 일이야 있겠어.

나는 느긋하게 빵을 사서, 근처의 정령새에게 나눠 주었다.

나도 배가 고프니 좀 떼어 먹고.

"일로와! 구구구! 일로!"

비둘기 부르듯 정령새를 불러 본다.

정령새는 뭔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빵조각을 뜯어 주니, 꿀떡 잘도 먹는다.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슨 일이 있나..? 슬슬 들어갈까..?"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다.

아마 안 올 모양이다.

어쩌면 내적 갈등 같은 것이 극심해서 안 오기로 했을지도.

절대 내가 싫어서는 아닐 거다.

그런 투로 말하기는 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아마도..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은 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나­

슬슬 일어나 볼까­

하는데, 공원 입구로 마차 한 대가 번개처럼 달려온다.

거칠게 드리프트를 하며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나온다.

공무원 정복 차림의 세피아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일하다가 끝나고 바로 온 것 같다.

나를 발견하곤,

헉헉거리며 뛰어온다.

큰 젖이 출렁출렁.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눈이 자꾸 거기로 간다.

내 앞에서 얼굴이 빨갛게 되서 숨을 몰아쉬는 세피아.

"아..아..아..아직 이..이..있었네.."

마침 갈려고 했었는데,

타이밍 한번 끝내준다.

"조금 늦었네요?"

절대 '조금' 은 아니다.

좀 비꼬는 듯한 말투에, 세피아는 엄청 미안해했다.

"이..이..이..일이 조..좀 많았어.."

말만 들으면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일이 많았구나.'

"미..미..미..미안해.."

바들바들 떨며 사과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감히 '남성의 신' 의 사도를 오래 기다리게 하긴 했지만,

엄청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사그라든다.

"괜찮아요. 그러면, 음. 늦었지만 일단 저녁부터 먹으러 갈까요?"

"으..응..!"

내가 간 곳은.. 고깃집이었다.

전에 셀렌디네와 갔던 그 와일드한 고깃집.

아마 귀한 몸인 세피아는 이런 비슷한 곳에도 와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욕을 먹을 지도 모르지만.. 뭐 괜찮을 것 같다.

"여..여..여기야?"

세피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가게가 좀 많이 허름해서가 아니었을까.

"왜요, 고기 싫어해요?"

"시..싫어하진 아..않아..!"

"그러면 남자가 이런 데 오는 게 이상해서 그래요?"

"야.. 약간은.."

"난 이런 곳이 좋더라구요."

나는 피식 웃으며 세피아를 안으로 이끌었다.

"내가 또 고기를 좀 잘 굽거든요. 한 번 먹어봐요."

자리에 앉히고, 고기를 썰어온다.

두툼한 안창살을 자글거리는 숯불 위에 올린다.

지방이 치익 타오르며 고소한 육향이 퍼져나간다.

세피아는 어떤가 보니, 뭔가뭔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긴 남자가 이런 가게에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들어와서도 뭐 할 줄 몰라서 가만히 있으려니 좀 불편할 것이다.

나는 찬찬히 고기를 구우며, 세피아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말을 걸려고 해도, 뭔가 걸 만한 주제가..

잘못 건드리면 지뢰 밟을 것 같고..

어디 무난한 주제가 뭐 없을까.

가문? 가문부터 해 보자.

"페아 가문은 공작가라고 들었는데요?"

"으..응.."

"대단하네요. 공작이라니."

"보..보..본가가 대..대단한거지.. 나..난.. 그냥 방계라.. 별 거 없어.."

"그래도 60만 골드나 내셨잖아요?"

"..그..그건.. 유산을 물려받아서.."

"유산이요..?"

"최..최근에.. 그..그럴 일이.. 있었어.."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크.. 이건 지뢰다.

나는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아.. 뭐 그 이야기는 됐고.. 아, 저 어때요?"

"어..어..어떠냐니?"

"세피아가 보기에 나 어떠냐구요. 오늘 신경 좀 썼는데."

사실이었다.

오늘 나는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소피엘과 아르피엘이 코디해준 귀족남성풍 정장을 입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이런 곳에 오기는 좀 그런 차림새긴 하다.

세피아는 우물쭈물하며 칭찬을 한다.

"괘..괘..괜찮은 것 같아.."

괜찮은 것 같다. 라니.

참으로 미적지근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셀렌디네를 비롯해 아르피엘, 소피엘이 얼마나 사교성이 높았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아르피엘은 '오빠 최고!' '오빠가 제일 멋져요! 쪽쪽♡'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문제는 자다 깨서 팬티만 한 장 걸치고 있어도 멋지다고 난리여서,

진정성이 별로 안 느껴진다는 것이었지만..

아무튼 본인 눈에는 멋있어 보인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피엘은 말로 칭찬을 하지는 않지만,

같이 있으면 느껴진다.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날 얼마나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르피엘이 없으면, 가슴을 밀어붙이며 슬며시 팔짱을 끼는 게 정말로 귀여웠다.

그리고 귀에 속삭인다. 오늘 너무 멋있다고.

역시 자다 깨서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어도 하는 짓이긴 했지만..

셀렌디네는 둘처럼 우아한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천박하고 허세 넘치는 타입.

'이게 내 남자야!' 하며, 내가 옆에 있으면 기세등등해지는 편이었다.

부럽지? 부럽잖아!

이렇게 대놓고 뻐기는 걸 보고 있자면,

민망하기는 한데,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셀렌디네의 행동은,

내가 대단한 남자라는 것에 털끝만큼도 의심이 없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뭐­

거기에 비해 세피아는..

만난지 한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한 마디 한 거라곤,

괜찮은 것 같아.

그것도 엎드려 절 받기로­

게다가 주변을 보며 쭈뼛쭈뼛­

익숙하지 않은 가게라고는 해도, 너무 심하다.

'좀 피곤한 타입이긴 하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남자가 익숙하지 않아서 일거라고 이해해 본다.

원래 이런 애들이 또 남자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정신없어지는 법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장난을 쳐 보았다.

발을 슬쩍 밀어 넣어, 세피아의 종아리에 살짝 댄다.

마음 같아선 더 야한 짓을 하고 싶지만,

세피아 수준에서는 자극이 너무 셀 것 같다.

세피아는 뭐 걸리는 게 의자 다리인가? 하다가,

내 다리인 것을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

세피아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야릇하게 빙긋 웃어 주었다.

세피아는 얼굴을 확 돌리며 눈을 피한다.

그러나 다리를 떼지는 않는다.

'아이고. 이 눈나야..'

고작 종아리 좀 스친 정도로.

저런 표정이라니.

이거 너무 귀엽잖아.

깊숙히 내린 앞머리로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공격을 계속한다.

나는 잘 익은 안창살을 한 점 집어들고,

세피아의 귓가에 속삭인다.

"다 구웠어요. 먹어봐요."

달콤한 속삭임에 세피아의 얼굴이 헤으응 녹아내린다.

고작 종아리가 닿아 있을 뿐인데, 그렇게 좋을 걸까?

"빨리.. 아. 해봐요."

내가 재촉하자 아기새처럼 입을 벌린다.

입 안에 고기를 넣어주자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는다.

"어때요, 맛있죠..?"

맛 따윈 느낄 상황이 아닌 걸 알지만,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세피아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끄덕거린다.

"자, 아. 한 점 더 먹어요. 아앙."

꿀이 떨어지는 분위기를 만들며,

다시 포크로 고기를 찍어 먹여준다.

고깃집 로맨스가 낭랑하다.

"아.."

주위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한다.

세피아는 허둥지둥 고기를 받아먹는다.

"뜨겁지 않아요? 급하게 먹네.."

"괘..괘..괜찮아.."

"맛있죠?"

"마..마..마싯써.."

막노동자들이 오는 고깃집에,

귀족 남녀가 들어와 우쭈쭈쭈 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상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주변의 엘프눈나들은 대체 이것들은 뭔가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셀렌디네라면 그 시선에 우쭐했을 텐데,

세피아는 그저 불편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너..너..너도.. 머..머..먹어.."

세피아는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했는지,

고기를 한 조각 집어 내게 먹여준다.

방금 내가 해준 걸 그대로 따라하는게 빤히 보인다.

'귀엽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앙­ 고기를 씹어 먹었다.

'아, 진짜 맛있네.'

"세피아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내가 오물오물 씹어먹으며 그렇게 공격하자,

세피아는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한편 주변에서 지랄을 한다는 시선이 쏟아진다.

그야 그럴만도 한 게..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이건,

마장동 포장마차에서 고된 노동을 끝내고 한잔할 시간에,

왠 양복입은 아저씨가 세련되고 육덕진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눈꼴시게 꽁냥꽁냥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강남에 파인 다이닝에 갈 법한 차림새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먹어봐용♡' 하고 있는걸 보면,

아마 소주가 엄청 땅기지 않을까.

아닌게 아니라 주변 테이블에서 술을 더 주문하는 것 같다.

뭐 어쨌든, 우리는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무사히 식사를 마쳤다.

그렇게, 일단 식사는 무사히 다 하고,

세피아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 그림 좋은데?"

쌍팔연도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로 시비를 거는 것은,

여기저기 몸에 그림을 그린, 좀 쎄 보이는 엘프눈나들이었다.

딱 봐도, 평범한 엘프들은 아니다.

세피아는 흘낏 나를 보더니,

꿀꺽 침을 삼키고 앞으로 나섰다.

"너..너..너넨.. 뭐..뭐야?"

어, 뭐야. 세피아.. 꼴에 나를 지켜주려는 건가.

와. 쫌 감동 받았다.

"뭐긴 뭐야. 불우한 이웃들이지."

"딱 봐도 없어 보이지 않아? 우리?"

키득거리며 그렇게 말하는 문신엘프눈나들.

세피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쎄게 말했다.

"귀..귀..귀찮게 하지 말고.. 꺼..꺼..꺼져..!"

세피아 이 눈나. 남자 앞에서는 벌벌 떨더니 여자 앞에서는 짤 없다.

그러나 문신엘프눈나들은 기죽지 않았다.

"돈도 많은 게, 왜 이딴 데까지 와서 남자를 옆에 끼고 고기를 처먹고 난리야?"

"그러게. 어디 없어서 죽어가는 우리 같은 년들 서러우라고 말이야. 너무한 거 아냐?"

"정말이지 눈꼴셔서 봐 줄 수가 없었다니까."

".."

세피아는 더 이상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아마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것 같았다.

문신엘프눈나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품 속에서 칼을 꺼내 들더니 우리를 둘러쌌다.

칼날을 타고, 파르스름한 마력이 감돌기 시작한다.

마력은, 매우 선명하고 날이 서 있었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남자 놔두고 꺼져."

"별로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냐. 그 남자를 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거든. 뭐 그 분을 뵙기 전에 우리가 맛을 좀 볼지도 모르지만.. 큭큭."

아. 전형적인 삼류 악당의 대사다.

근데 어째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이건 동네 양아치 급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프로페셔널이었다.

세피아도 귀족으로서 호신술은 배웠겠지만,

책상물림인 만큼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 뭐야.

이거 나 당하는 거 아냐?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