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2.
* * *
나도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나보다 더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는 엘프가 있었으니,
누구겠는가.
바로 세피아다.
남자가 떠난 직후, 방으로 돌아와 크게 숨을 고른다.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겠지..?'
충분히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전날 밤에 비해서는 잘 대한 것 같다.
'..데이트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진다.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
거울을 보니, 왠 이상한 여자가 소름끼치게 싱글벙글하고 있다.
'아, 나구나.'
체신머리없게 웃으면 안 돼
품위를 지켜야
그러고 보니 아무리 그래도 데이트는 여성이 리드해야 하지 않나
만약 누가 알았다면 한심해 할 생각이었다.
세피아 주제에 리드는 무슨 리드?
하지만 몬스타 처녀답게, 뭐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만은 단단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리드를 해야 할 텐데.. 우습게 보면 어쩌지..?'
이미 우습게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 세피아.
침대에 걸터 앉아,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에 있던 일을 되새겨 본다.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나갔더니,
남성분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계셨다.
밤에는 얼핏 봐서 잘 몰랐는데,
아침에 밝은 곳에서 보니 더 잘생긴 것 같다.
훤칠한 키에 탄탄한 몸.
확실히 자신처럼 가슴만 큰, 나이 많은 여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뻗댈 수 있는 점은 60만 골드를 냈다는 것 뿐.
그게 유일한 내세울 점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혹시 그 돈 받고도 못하겠다고 하려는 건 아닐까?
상대는 일반적인 창남이 아니다.
듣기로는, 그는 교단의 사도였다.
남성의 신을 모시며,
극한의 쾌락과 동시에 임신의 은총을 내리는 분이시라고
그런 분이 자신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죽어도 저런 여자와는 못 하겠어
그렇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자신은 여성으로서는 정말 폐급이었으니까.
"아침부터 어쩐 일로 오셨나요..?"
뭐 그런 말을 했다.
커다란 가슴이 흉할 것 같아, 최대한 팔로 가려 본다.
물론 가녀린 팔로 가려질 만한 사이즈는 아니었다.
그런 칠칠치 못한 모습에도,
남성분께서는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낙찰 받으셨잖아요?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지도 이야기를 하려고요.'
앞으로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역시 못하겠다고 하려는 걸까.
뭐라고 마음에 안 들면 안 하셔도 이해는 한다고 대답은 했는데,
하필 쓸데없는 소리를 한 마디 덧붙이고 만다.
'..별로 마음에 안 드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하다.
이게 뭔가
꼬마 소녀도 아니고,
나이도 나이대로 먹을 숙녀가 한 말이라니
그러나 남성분은, 오히려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셨다.
'아니에요. 사실 저는 꽤 마음에 드는데요? 은근히 제 타입이시라.'
타입
내 타입
마음에 들
칙칙폭폭 기차가 머릿속에서 달려나간다.
뿌웅뿌웅뿌뿌! 슉슈슉! 슉슉! 뿌웅뿌웅뿌!
그리고 탱 하고 탈선을 해서, 저 어두운 다리 밑으로 추락한다.
'아.. 상대는 프로지.. 이런 말에 들뜨면 안 돼.'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
저 말은, 못하지는 않겠다는 뜻일 뿐이다.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면 실망하고,
실망하면 가슴이 아프다.
더 이상 가슴 아픈 일은 싫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듣기 좋으라고 하신 말씀인 거 알아요.'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심장이 쿵떡쿵떡쿵떡쿵떡,
마도전차 엔진처럼 펌프질을 해 댄다.
심장아 제발 가라앉아라
내가 흥분한 걸 들키지 않도록 해줘.
'거짓말 아닌데요? 진짜 귀여우신데.'
엑!
방긋 웃으면서 한마디 더.
아, 저건 거짓말이다
거짓말
거짓잇히히히히힛
거짓말이면 어떠냐.
처음으로 남자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엄청 어렸을 때에 언젠가 들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크고 나서는 처음 듣는 소리다.
'그렇게 말하셔도 소용없어요. 안 믿어요..♡"
큰일이다.
대답에 교태(..?)가 섞이기 시작한다.
쉬운 여자로 알면 어떻게 하지?
그런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자니
심장이 칩떡칩떡칩떡칩떡
쫀득하게 뛰기 시작한다.
대동맥을 타고 설탕물이 흐르는 것 같다.
달아 너무 달아
큰일이다.
벌써 반해버린 것 같다.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운명이라고나 할까
그래 그것은 운명
..은 무슨, 정신 차리자.
자신은 아무리 잘 봐줘야 노처녀 빅가슴.
시집도 못 가 돈 주고 임신하려는 퇴물이다.
'기대하지말자기대하지말자기대하지말자'
마음속으로 침착해지는 주문을 외니,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 같다.
속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믿지 말자.
날 괜찮게 보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다
'뭐.. 그런 건 천천히 믿게 해 드리면 될 테고, 어쨌든 서로에게 좀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데요.'
다다다다다왔다앗!
서로에게 익숙!
뭐지.
뭘까.
뭐 어디까지?
진정했던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뛴다.
쿵떠덕쿵덕.
'익숙해지다니요?'
설마
되물어 본다.
기대하면 안 된다.
아닐 거야.
아니
'네. 임신을 하려면, 서로간의 신뢰와 친근감이 중요하거든요. 신뢰감과 친근감이 높아질수록, 임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답니다.'
신뢰!
친근감!
남자와!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억지로 관계만 빨리 가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신뢰
친근감
남자에겐 꿈도 꿔보지 못한 관계였다.
경멸,
멸시,
무시,
냉담,
이런 게 아니라.
친밀!
친근감!
친구도 좋아욧!
너무 좋아욧!
..그런데 임신하기 위해서라니,
그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친하면 친할수록 임신이 잘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저..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뭐라도 망칠까 봐, 조심스럽게 대답을 한다.
남성분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르셨나요? 뭐, 이제 아셨으면 됬죠. 그러면 일단..'
일단?
뭘까.
섹스.
그 이상?
설마 그 이상을 서비스해 주는 건가?
'일단.. 뭔가요?'
'데이트부터 해 보죠.'
데!
이!
트!
데이트!
다시 머릿속에서 기차가 달려나간다.
뎃 데뎃 뎃 데이트! 슉 슈슉 슈슉 슉!
이번엔 탈선하지 않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속도제한도 없이 달려나간다.
기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면 어떤가,
데이트만 하면 그만이지.
근데 문득 걱정이 된다.
데이트라는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런 건 여자가 보통 리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차마 한 번도 못 해서 자신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쿨하게.
성숙한 여성답게.
어떻게든 대답을
'저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잘 할 수 있을지..'
'별로 관심 없어도 되요. 그냥 저한테 맡기면 되니까.'
맡긴
남자에게 맡긴
부끄럽지만 쬬아♡
쬬아쬬아쬬아
나도 해 본다.
드디어 해 본다.
데이트!
데데뎃데뎃데이트!
신난 걸 최대한 감추며(*감추지 못함) 쿨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핑크빛 구름에 몽실몽실 빠져있는 듯한 기분.
남성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콤하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순간 몸이 싹 식는다.
오늘은
오늘은 마력망 안전점검이 있는 날.
도저히 연가를 낼 법한 날이 아니었다.
일.
일하기 시러!
데이트하고 시퍼!
평소에는 그래도 자신에게 내세울 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직업이었다.
수도의 마력망을 관리하는
성실하게,
책임감있게..
그렇다.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일을 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죠..?'
가슴을 콩닥콩닥 졸이며 물어본다.
제발
제에발
제에에발!
남성분은, 방긋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그러면 퇴근하고 볼까요?'
퇴근후데이트으!!
미루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오늘
퇴근 후
데이트가
있어!
'좋으실 대로 해 주세요..♡'
큰일이다.
싸게 보이면 안 되는데.
멋있는 여자로 보이고 싶은데.
넘 좋은걸 어떻햏♡
남성분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쿨하게 약속을 잡고 떠났다.
'그러면 오늘 저녁에 봐요!'
그리고 지금.
믿겨지지 않는다.
데이트.
교배봉사에 데이트가 포함이 되는 건가?
따로 돈을 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임신하려면 친해지는 게 좋다고만 했다.
그러면 이건 순수한 데이트다.
옷
옷을
옷을 뭘 입어야 할까.
첫 데이트니만큼,
정장을
아니 너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적당히 화사한
화사한 옷 따위가 있을리가 없다.
뭘 입어야 하나?
드레스룸을 마저 살펴본다.
검정 검정 검정 회색 검정 갈색 검정.
전멸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화사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어울릴 리가 없다.
그래.
진정하자.
연한 갈색의 갈끔한 드레스를 입는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거울을 보니, 왠 추녀가 커다란 가슴을 흔들고 있다.
괜찮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지..'
사실 뭘 입어도 만족스럽진 않..
잠깐, 지금 몇 시지?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훅 지나가 있었다.
* * *
허겁지겁 출근한 세피아를 반겨준 것은,
공작위에 있는 감독관이었다.
평소같으면 내부 체크로 끝나는 안전점검을,
오늘은 특별히 공작급 감독관이 와서 감찰까지 한다는 모양,
꿀릴 것은 없었다.
준비태세라면 언제나 만전,
비상사태의 비상사태까지도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준비가 된 건 된 것이고,
준비가 됐다는 걸 증명하는 건 다른 일.
감찰 덕분에 업무는 끝도 없이 늘어졌다.
점심도 못 먹고 어느덧 저녁.
이미 퇴근할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퇴근을 하려면 감독관부터 보내야 했다.
'빨리.. 빨리 끝나야 하는데.'
약속장소에서 데이트를 기다리고 있을 남성분.
부하직원에게 맡긴 브리핑은,
떠듬떠듬한 프레젠테이션에 더해,
계속 자료를 요청하는 감독관 덕분에 끊임없이 늘어졌다.
마력망.
안개로부터 공화국을 지켜주는 보루이자,
고귀한 피를 가진 자들의 희생으로 지어진 요새.
단 한 방울의 마력이라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세피아는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으로 성실하게 직무에 임했다.
다 좋은데..
오늘만큼은..
오늘만큼은 봐 줄 수 없는 걸까.
데이트를 하러 가야 하는데,
퇴근을 시켜줘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퇴근할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자기가 나서서 곧바로 브리핑을 하고 싶지만,
말을 더듬는 자신이 나서봤자 시간이 더 걸릴 게 뻔하다.
'제발..'
감독관은 두꺼운 서류더미를 넘기며,
혹시라도 미비한 점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핀다.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 같네요."
마침내 울리는 희망의 종소리,
감독관은 서류더미를 덮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부서장이 브리핑을 하지 않아서 조금 걱정했는데, 상태는 완벽한 것 같네요."
세피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면, 평정우수성과급을 지급해도 좋을 수준이에요."
성과급도 좋지만, 제발 지금은..
하지만 이런 말을 듣고도 조용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가..가..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그러면 이만."
드디어..
드디어 갔다.
감독관이 가고,
부하직원들도 퇴근한다.
세피아는 서둘러 코트를 집어들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약속시간이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제발..!'
솔직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세피아는 포기할 수 없었다.
간다.
약속장소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