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61화 (61/140)

〈 61화 〉 61

* * *

한편 도망치듯 저택으로 돌아온 세피아.

그녀는 그날 밤 흥분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자를 샀어..'

남자를 샀다.

임신하게 해 준다고 해서 샀다.

그것도 60만골드나 주고.

사기가 아닐까­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진 그렇게 의심했다.

돈은 준비했지만, 설마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여러 여성엘프들이 나와 그럴듯한 소리를 하는 것도,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로 올라온 남자를 본 순간.

세피아는 전율했다.

이거다.

이 분이다.

이 분이 아니면, 안 된다.

뭔가 말로는 할 수 없지만,

직감적으로 이거라고 확신했다.

말을 더듬는 탓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 극도로 꺼려하는 그녀였지만,

나서서,

입찰을 했다.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이 아찔했다.

마치 환상처럼,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성분.

'안녕하세요.'

한 마디 말이었지만, 너무나 친절했다.

차마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너무 긴장한 것도 있지만,

떠올리는 게 괴롭기도 했다.

말을 막 더듬으면서­

뭔가 싫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싫지 않았다.

좋은데.

자신을 싫어하는게 두려웠다.

그래서 미리 엄포를 놓았다.

싫다고.

사실은 세피아 자신이,

자신이 자기 스스로가 싫었다.

볼품없이 툭 튀어나온 가슴.

나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똑바른 자세에 탄탄한 육체를 가진 남자에 비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죽고 싶다.'

돈으로 남자와의 하룻밤을 샀다.

그것도 60만 골드를 주고.

호구다.

징그럽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은 걸까.

저러지 않으면 남자를 못 안는 것이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다른 엘프들이 중얼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앵앵거렸다.

'이제.. 어쩌지..?'

사 놓긴 했는데.

앞일이 걱정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지만,

웃는 얼굴에 대고 싫다고 하고 돌아왔다.

'진짜 싫어하면 어쩌지?'

참으로 복잡한 마음­

싫다고 했지만 진짜 싫어하는 건 싫었다.

알아서 잘 헤아려 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을 리도 없다.

밤은 깊어가고, 고민은 복잡해진다.

남자.

세피아는 남자가 무서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페아 공작가의 방계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마력이 많았던 세피아는,

어렸을 때에는 공작가 본가에 양자로 들어가 가주가 될 법한 재목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래서였을까.

세피아의 어머니는 세피아를 혹독하게 교육했다.

'생각을 좀 하고 말을 하렴!'

'항상 그 상황에 적절하게 행동해야지!'

'그때 그 상황에서 그러면 안 되는거 모르겠니?'

진짜 가주 후계자보다 더한,

스파르타식 교육.

자고로 엘프들의 교육방식은 천천히, 느긋하게, 몸에 베일 정도까지,

그야말로 머리로 배워서, 몸에 익히는 방식이 보통이었다.

세피아가 받은 교육은 그 반대,

무조건 우겨넣고,

외우고,

따르고,

암기하는,

그러면서도 뭔가 하나가 틀리면 사정 없이 혼이 나는­

그러한 가차 없는 주입식 교육이었다.

그런 교육을 받으며, 세피아는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번 맞선만 잘 보면, 후계자 자리는 거의 확정이니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

상대는 본가의 남자아이.

팔촌쯤 되는 친척으로,

결혼한다면 본가의 데릴며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남자아이의 얼굴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얼굴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엄청나게 긴장했던 것은 기억난다.

'안녕하세요.'

방긋 웃던 남자아이에게,

뭔가 말을­

말을 해야 하는데­

적절한 말­

책 잡히지 않는 말­

상황에 적합하고 상대에 걸맞은 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식은땀만 뚝뚝 흐를 뿐.

말을­

말­

"아..아..아..안..녀..녕..하.. 세..요..!"

하면서도 아니다 싶었다.

더듬더듬.

너무나 꼴사납다.

스스로가­

싫었­

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토했다고 들었다.

쓰러졌었나?

뒤섞인 기억은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남자의 경멸하는 시선은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 이후였을 것이다.

말을 더듬게 된 것이.

아울러 남자공포증까지­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어느덧 나이는 나이대로 먹었다.

세피아는 타고난 마력만큼은 많았던 덕분에,

수도의 마력망을 관리하는 고위 관리가 되었다.

사람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는 것도 좋았다.

그저 그 뿐.

가문

재산

신분

외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무섭다.

남자가 무섭다.

말을 더듬는 것을 비웃을까 무섭다.

커다란 가슴이 티나는 것이 무섭다.

차라리 이 쯤 되면,

오히려 재산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남자를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세피아는 그런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쓸데없이 착한 덕분에,

남자에게 말을 걸면 싫어하겠지­ 하는 자의식만 강해졌을 뿐이다.

그러다 들은 소문­

확정적으로 임신을 시켜준다더라­

세피아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남자와 뭐 어쩔 것 없이,

쿨하게 임신만 한다.

자식을 가지고 싶었다.

자식이 태어난다면,

자식이 있다면 삶이 좀 바뀔 것 같았다.

자식은 나처럼은 되지 않게­

세피아는 처녀였다.

성에 관해서도, 생물학적인 것을 빼면 거의 무지했다.

임신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돈을 많이 준비했다.

그리고 낙찰 받았다.

침대에 털썩 누운다.

침대에 누워 보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생각만 많다.

'아.. 그러고보니.. 나 뭐 주소같은 것도 안 남기지 않았나?'

문득 드는 생각.

느낌이 쎄하다.

'..수표만 집어던지고 그냥 온 것 같은데..'

순간 스스로가 엄청난 바보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짐작이­

짐작이 아니다. 맞다.

바보짓이다.

60만 골드를 집어던지고 도망쳐버렸다.

'아..'

이걸­

엘룬드 백작이었던가.

돈을 먹고 모른 척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후회가 밀려온다.

혹시 환불해달라고는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낙찰을 받아놓고서­

환불하고 싶기는 한가?

진짜로 임신이 된다면­

생각이 다시 복잡해지고,

밤은 더더욱 깊어간다.

다음날 아침,

늦은 시각 겨우 잠이 들었던 세피아는,

시종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똑똑똑.'

화끈한 눈을 비비며, 겨우 대답하는 세피아.

"무..무..무..무슨 일이야..?"

"손님이 오셨습니다."

화들짝 일어난다.

이 저택에, 손님이 올 일은 손에 꼽을 정도.

설마?

아니겠지?

"누..누..누구셔?"

"어떤 남성분이신데, 말하면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맞다.

맞았다.

대체 집 주소는 어떻게 안 걸까?

뭐 어떻게든 알려고 하면 알았겠지.

그보다 얼굴­

거울을 보니­

도저히­

다크써클에­

퉁퉁한 뺨­

발갛게 부은 눈­

평소에도 남 보기 부끄러운데,

지금 이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자..자..자..잠깐만.. 기..기다리시라고..해..!"

* * *

나는 응접실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다행히 소피엘이 아는 귀족 중에 세피아의 주소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쉽게 찾아올 수 있었다.

저택은 주인의 성향을 닮았는지 검소하고 깔끔했다.

엘룬드 백작가의 저택도 검소한 편이었지만,

꼼꼼하게 장식이 되어 우아하다고는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곳은 장식이나 이런 것도 거의 없어,

정말 금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나저나, 꽤 오래 기다렸는데­

'뭐.. 보나마나 어젯밤 잠도 못 자고 있었겠지..'

늦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어제 경매는, 세피아로서는 정말 큰 맘 먹고 벌인 일이었을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셔본다.

'이상하게 내가 끓이면 이 맛이 안 난단 말이야..'

업소에서 일할 때도 차 끓이는 것만은 자신이 없었다.

대체 비법이 뭘까.

아무튼 한참 지나서, 세피아가 나타났다.

나름 단정한 차림새였지만.

눈이 발갛게 부은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앞머리를 최대한 내려 가렸다.

"아..아..아침부터.. 무..무슨..볼일이야.."

시선을 회피하며 그렇게 말하는 세피아.

커다란 가슴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다.

팔로 가슴을 꾹 누르며 그렇게 말한다.

그 모습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낙찰 받으셨잖아요?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 지도 이야기를 하려고요."

"나..나..낙찰은.. 바..받았지만.. 너..너..너무..힘들면.. 그..그만둬..! 나..나..나도.. 너..너.. 별로.. 마..마음에.. 안.. 안..드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지만,

나름 머리를 굴려 해석해 본다.

내가 이런 여자라, 정 안될 것 같으면,

안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너 별로 맘에 안 드니까'

이건 자존심때문에 한 마디 쓸데없는 걸 붙인 거고.

너무 뻔해.

아.

근데, 이거.

큰일이다.

너무 놀려 먹고 싶어.

나는 방긋 웃으며, 슬쩍 장난을 쳤다.

"아니에요. 사실 저는 세피아가 꽤 마음에 드는데요? 은근히 제 타입이라."

세피아는 내 말을 듣고,

움찔, 하며 딱딱하게 굳었다.

동공이 무지하게 흔들린다.

"거..거..거짓말..하지..마.. 쓰..쓰..쓸데없이.. 아..아부해봐야.. 소..소용없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는데­

말을 그렇게 해봤자­

가슴에 손을 모으고 두근두근.

이거 반응이 너무 소녀소녀해­

큰일이다.

이 눈나, 본격적으로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거짓말 아닌데요? 진짜 귀여우신데."

귀엽다는 말에, 다시 움찔하는 세피아.

"그..그렇게.. 마..마.. 말해봐야.. 소..소용없다고. 아..아..안.. 믿으니까.."

아.

귀엽.

넘 귀엽.

그리고 말과는 반대로 소용 많이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뭐.. 그런 건 천천히 믿게 해 드리면 될 테고, 어쨌든 서로에게 좀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데요."

"이..이..이..익숙해져?"

"네. 임신을 하려면, 서로간의 신뢰와 친근감이 중요하거든요. 신뢰감과 친근감이 높아질수록, 임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답니다."

"그..그..그런 소리는, 처..처음 듣는데..?"

그야 처음 듣겠지.

방금 내가 지어낸 말이니까.

근데 이 순도 200% 처녀인 눈나가 그걸 간파할 리는 없다.

"모르셨나요? 뭐, 이제 아셨으면 됬죠. 그러면 일단.."

나는 은근히 뜸을 들였다.

세피아는 꿀꺽 침을 삼키더니 되물었다.

"이..이..일단..?"

"데이트부터 해 보죠."

"나..난.. 과..관심 없는데.."

그런 얼굴로 관심 없다고 해 봤자..

나는 그냥 밀고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별로 관심 없어도 되요. 그냥 저한테 맡기면 되니까."

"그..그러면.. 어..어쩔 수 없지.."

못 이기는 척 수락하는 세피아.

숨기려 하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인다.

아.

이 눈나.

너무 귀여워.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이..일하러 가..가야 해.."

"그러면 퇴근하고 볼까요?"

"너..너 조..좋을 대로.. 하.. 하면.. 되잖아.."

하는 말은 건방진데,

내용은 전부 OK다.

큰일이다.

너무 기대가 된다.

이 슴가 어마어마하게 큰 눈나에게 개목줄을 채우고

알몸으로 기어와서 내 발을 맛있게 쪽쪽 핥으라고 명령하고 싶다.

크읏­ 참아! 내 안의 뒤틀린 성욕.

지금은 천천히 가야 할 때다.

세피아는 아마 처음 느끼는 자극에 정신 없을 것이다.

조금씩, 천천히 나의 색으로 물들여 가면 되는 것.

"그러면 오늘 저녁에 봐요!"

그렇게 약속을 잡고,

나는 저택을 떠났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가 될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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