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59.
* * *
그렇게 작별을 하고, 정든 저택을 나왔다.
아직 파티는 계속 할 테지만,
분위기는 좀 식었을 것이다.
뭐..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
그렇게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는데..
"저희는 그럼 여기까지.."
"아, 네 수고하셨어요."
저택 밖으로 나오자, 수행하던 신관들이 겉에 걸친 신관복을 주섬주섬 벗더니, 그대로 내팽게치고 가 버렸다.
"..저 엘프들 신관 아니었어..?"
세레니아에게 그렇게 물으니,
세레니아는 바닥에 떨어진 신관복을 개키며 참으로 공손하게 대답을 해 준다.
"신관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아르바이트생..?"
뭐지.
뭔가 느낌이 쎄하다.
"교단에서 아무도 안 오려고 해서.. 저 혼자 모시러 오면 아무래도 위엄이 안 설 것 같아서 고용했습니다."
"..어? 교단에서 아무도 안 오려고 해..?"
"교단에서는 사도님을 모시는 걸 다들 반대했습니다."
"..?"
"하아.. 신께서 길을 알려주셨는데 어째서 따라가질 못하는 걸까요? 답답합니다."
"나는..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따라가질 못하겠는데."
"제가 사도님을 모시겠다니까 난리가 났었습니다."
"..왜?"
"잘 모르겠습니다. 100만 골드는 드리고 모셔와야 된다고 해서일까요? 십년만에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런 헛소리냐고 막 난리를 치더라고요."
"어째 난 알 것 같은데.."
"제가 십년동안 놀기만 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놀기만 한 거 아니었어?"
"신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돈은 그러면? 교단에서 준 게 아니면, 100만 골드는 어디서 난 거야?"
"교단 본산 신전 건물과 부지를 담보로 빌렸습니다."
"뭐?"
"신전 땅문서를 훔쳐서 돈을 빌렸어요."
"..너 대체 왜 그런 짓을..?"
"사도님을 모시러 가는데 그 정도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신관들은 알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알겠죠? 쪽지를 써 두고 왔거든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폐급도 이정도면 신급이다.
"너.. 어쩌려고 그래?"
"제일 중요한 건, 사도님을 모시는 겁니다."
"아니.. 소피엘이 돈을 안받아서 망정이지, 받았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뭐, 교회가 넘어가는 거죠. 새로 복합쇼핑센터를 짓는다고 했었나 뭐, 교회라는 껍질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 속에 깃들 성령이 진짜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자칫하면 자지교 개척교회 사이비 목사가 되는 거 아닌가?
작은 예배당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믿습니까? 믿습니다! 하는..
나는 그런 거 말고,
커다란 신전에서,
굽신굽신하는 엘프눈나들을 골라 따먹는..
사이비 교주 하렘 라이프를 상상했던 것인데
이건 잘못하면 '충격! 여신도 추행! 비인가 교단의 자칭 사도' 뭐 이런 게
"이..일단 돈부터 갚자."
"아 네."
"그리고.. 음.. 지금 교단으로 돌아가는 건 안 좋을 것 같아."
"역시 별로 안 좋아하겠죠?"
"안 좋아하는 정도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가장 절망했을 때 찾아가자."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일단 최악의 상황만 벗어나게 해 주면, 재앙을 불러 온 원흉이라도 좀 곱게 보이는 법이다.
내 생각은 이랬다.
아침에 쪽지를 발견하고 절망한 남성교단의 신관들,
이제 교회가 다 넘어가겠다고 생각하는 그들 앞에, 내가 뙇 나타난다.
나는 신관들 편을 들며, 세레니아가 너무 무리해서 일을 추진했다고 꾸짖는다.
충격받은 신관들은, 내 편을 들며 세레니아를 비난한다.
그때 내가 다시 나서서, 다행스럽게도 돈은 내가 잘한 덕에 그대로 있으니, 빨리 갚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피엔딩.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교단의 사도로 받아들여지는 거다.
세레니아는.. 뭐 미운털이 좀 박히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고.
보면 평소에도 별로 이쁨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 * *
다음날 아침
영원의 도시 외곽에 있는 남성교단의 본산은, 예상대로 초라했다.
뭔가
안 팔리는 사이비 교회 같은
건물은 크긴 큰데, 자세히 보면 허름하다.
잘 안 보이는 곳은 칠도 벗겨지고..
사실 보이는 곳도 상당히 벗겨져 있다.
그나마 정면은 칠한다고 칠해놓긴 했는데,
비슷하지만 은근히 다른 색으로 조잡하게 칠해 더 없어 보인다.
게다가 벽 곳곳에는 금이 가 있다.
마지막으로, 뒤뜰은 관리가 안 되어 잡초가 무성하다.
'아, 씁.. 이거 느낌이 영 아닌데.'
세레니아는 감히 내 앞에 걸을 수 없다며,
세 걸음 떨어져 오종종 따라오고 있다.
내가 문 앞에 서자, 세레니아가 나서서,
겁나게 큰 교회 문을, 똑똑 두드려 본다.
"기쁜 소식입니다! 사도께서"
세레니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엄청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귀엽게 생긴 금발의 여성 엘프가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온다.
"큭엑!"
밀친 문에 마빡을 얻어맞고 주저않는 세레니아.
신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레니아의 어깨를 붙잡는다.
"대신관니임!!!! 이게 무슨? 대체 왜? 신전 부지를 팔았다뇨? 그나마 교단에 남은 거라곤 이 교회 땅 뿐인데 사도라니 대체 무슨 아니 그보다 아직 팔지 않으셨 파셨나요? 아니죠 아니라고 해 주세욧!"
흔드는 통에 전동안마기처럼 고개가 덜덜덜 떨리는 세레니아는, 황망한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팔았습니다."
"으아악!"
절규하는 신관.
금발에 눈이 크고 참으로 순박하게 생긴 것이,
참으로 착하고 귀여운 아이 같다.
"32대 교단에 드는 남성교단이 이렇게 사라지다니 안돼!"
32대 교단..
보통 위에서 32번째 종교라고 하면, '사이비' 라고 지칭하기 아주 좋은 말이 있다.
"혹시 32대 교단 중 32위는 아니지?"
내가 혹시나 하고 묻자, 신관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용케 대답을 해 준다.
"32교단 중 32위 맞아요, 가끔 순위에 밀려 빠질 때도 있긴 하지만 그런데 누구신지.."
"아. 내가 사도야."
"에?"
신관의 얼굴이 기묘해진다.
대신관이 인정한 교단의 사도.
물론 받들어 모셔야 하는데
대신관이 저모냥 저꼬라지라 믿을 수가
게다가 사도 본인이 왔다는 것은..
그 대가를 이미 지불했다는 뜻이었다.
"안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아악! 대신관님! 대체! 교회를 팔아버리시면! 이제 우리 어디에서 자요.. 흑흑.."
화내다 절규하다 울어버리는 신관.
보아하니 그동안 쌓인 설움이 상당했던 듯 하다.
나는 흐느끼는 신관을 붙잡고 진정시켰다.
"자. 일단 진정하고.. 울음 뚜욱!"
"흑흑.. 뚝!"
"너무 걱정 마. 아직 돈은 그대로 있으니까."
"..에?"
"돈은 그대로 있으니까, 가서 갚으면 된다고."
"에엣..! 저, 정말인가욧!"
순식간에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하는 신관.
내가 계획했던 일이긴 한데,
눈앞에서 저렇게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니 좀 미안하다.
"아무래도 세레니아가 무리하는 것 같아서, 내가 적당히 수습했어."
사실 별로 한 건 없지만, 어쨌든 말을 그렇게 한다.
뭐 내가 잘해서 돈 안 받은 건 맞잖아?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신관의 시선이
순식간에 존경과 경애로 차오른다.
"가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들으셨죠! 사도님께서도 무리라고 하시잖아욧! 교회를 팔아버리면 진짜 어떻게 해요오.. 그나저나 정말 감사합니다. 사도님. 정말 감사드려요."
이 정도로 계획대로 흘러가니 좀 불쌍할 지경이었다.
나를 향해서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세레니아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신관.
그러나 세레니아는,
잘못 한 거 하나 없다는 듯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다.
오히려 별 것도 아닌 걸로 귀찮게 군다는 듯,
귀를 후비적거리다가 손가락을 후 분다.
내가 어이가 없어 쳐다보니,
세레니아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도님 앞에서 체신머리없게.."
"..교회 판 건 안 미안해?"
"그게 왜 미안한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음.. 뭐 그래.. 알겠어.."
나를 구세주처럼 바라보는 신관이, 많이 불쌍해졌다.
"빨리.. 빨리 가요..! 혹시 이자라도 붙으면.. 100만 골드라니..!"
"아, 응. 가자. 근데 너 이름이 뭐니?"
"아. 저는 남성교단의 수석신관인 카렌이에요."
"그래, 너가 참 고생이 많을 것 같다."
"아.. 알아주시는 건가요..!"
울먹이며 안길 듯 쳐다보는 카렌.
아..
이거 너무 쉬워서 불쌍해
* * *
카렌과 함께 세레니아가 돈을 빌린 곳을 찾아갔는데,
무려 1금융권 은행이었다.
대체 세레니아의 정신머리로 1금융권에서 돈을 어떻게 빌린 걸까.
그래도 사채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돈 갚고 담보를 되찾고 싶은데요."
"네. 이쪽 상담실로 오세요."
안내받은 대로 상담실로 들어가 보니,
뭔가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참으로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 눈나가 앉아 있었다.
엘프 눈나는 지점장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신관님! 금방 다시 오셨네요? 돈을 갚으신다고요?"
세레니아는 마뜩찮다는 듯 대답했다.
"네, 뭐.."
"그러면 계약서에 적힌 대로면.. 위약금이 30만 골드네요."
"에..?"
"신전이 있는 땅을 꼭 매수하시겠다는 분이 계셔서.. 저희도 돈을 빌려드릴 때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요.. 혹시 나중에 취소하신다고 하시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요."
"아,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긴 하네요."
태연하게 그렇게 대답하는 세레니아
카렌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거짓말.. 삼십만.. 골드.."
나는 잠깐 끼어들었다.
"잠깐 계약서를 봐도 될까요?"
"아, 네. 얼마든지."
읽어 보니,
그 말대로였다.
그야말로 교본으로 만든 듯 한 불공정 계약서
하지만 슬프게도 매 페이지마다 세레니아의 싸인이 되어 있다.
"이거 다 니 싸인 맞아?"
"네. 사도님."
"계약서는 읽고 싸인한거야?"
"왜 읽어야 하나요?"
"..아니 그러면 안 읽어?"
"신께서 하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신께서 싸인하라고 하시든?"
은근히 비꼬는 어투에도,
세레니아는 경건하게 대답했다.
"신께서는 뭔 짓을 해서라도 사도님을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야이.."
순간 욕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그래도 대신관인데..
남들 보는 데서 쪽을 줄 수는 없지.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지면.. 으득..
뇌에 신경세포 대신 우동사리가 들었나, 대체.
대체 뭘 믿고..
"그래서.. 계약을 해제하시려면, 월말까지 30만 골드를 추가로 내셔야 하는데요.."
나는 다시 한 번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다.
차라리 사채를 쓰던지
하루 이자가 30%가 말이 되냐!
뭐, 그래도 정확히 하자면 이자가 있는 건 아니다.
땅을 담보로 100만골드를 빌려 주고, 그 계약을 해지하려면 위약금으로 30만 골드를 지급한다는 것일 뿐.
"기다리세요. 돈을 마련해 올 테니까."
나는 방긋 웃어준 후,
아무 생각이 없는 대신관과 아무 생각을 못하는 수석신관을 양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30만 골드라니.. 800골드만 있어도 신전 벽을 새로 칠할 수 있는데"
카렌은 단위가 다른 금액이 왔다갔다 하는 것에 정신이 나간 것 같고,
"..?"
세레니아는 자기가 뭔 잘못을 한지도 모르는 듯 눈알을 디룩디룩 굴리고 있었다.
나는 세레니아의 마빡에 꿀밤을 먹였다.
한대 때려주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어.
"야."
"아얏.. 네?"
"너 대체 무슨 생각이냐?"
"저는 신과 사도님을 믿을 뿐입니다."
맑고 순수한, 마치 백치 같은 눈빛.
진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나를 믿는다는 게 전해졌다.
아아. 무식한 게 신념이 있으면 무섭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화를 내려다가 포기해버렸다.
"그래.. 이것도 어쩌면 신의 뜻일지도 몰라.."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수석신관 카렌이 울먹거렸다.
"그럼.. 우리 교회는.. 이제 끝인가요?"
"아냐. 교회 계속 할 거야."
"뒷골목에 있는, 비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30년된 상가건물의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해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거죠?"
"아냐. 원래 교단 건물에서, 그대로 있을 거야.."
"어..어떻게요?"
"30만 골드 모으면 되지. 그까짓 거."
내 말에 카렌이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30만 골드를 어떻게 모아요.. 으앙.."
"야. 울지마. 뚝!"
"뚜욱..!"
"그까짓 돈, 내가 몸 좀 팔면(?) 금방 모을 수 있어!"
울먹이는 미니 카렌입니다.
4장 작가님(instagram:@km4jng)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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