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4.
* * *
그날 밤, 나는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소피엘은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도로롱거리며 내 곁에서 깊게 잠든 소피엘.
풍만한 가슴이 묵직하니 팔을 누른다.
나는 나를 끌어안은 소피엘의 팔을 살짝 제치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침실 밖으로 나온다.
상체는 다 드러낸 채, 바지만 걸친 상태다.
주방으로 나오니, 아르피엘이 눈을 반짝이고 있다.
"어땠어요..?"
나는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성공했어."
"우와♡ 오빠는 최고야..♡"
아르피엘이 잠옷 차림으로 폴짝 뛰어 안겨 온다.
내 목을 붙잡고, 키스를 퍼붓는다.
"오빠 진짜 최고♡ 쪽쪽쪽♡"
나는 살짝 민망했다.
"그, 그렇게 좋아?"
"그럼요! 엄마하고 같이 태교도 할 수 있고, 또 아기가 태어나면 평생 의지할 수 있는 형제자매가 생기는 셈이잖아요?"
'정확히는 나이 차 안나는 동갑이모지만..'
솟구치는 개족보의 느낌에 격하게 몸서리치며, 나는 아르피엘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 봐야지?"
"네. 오빠가 맞다면 확실하겠지만, 그래도 축복도 받아야 하니, 오늘 한번 어머니랑 같이 세계수에 가 볼게요."
"음.."
이제 엄마와 딸을 전부 임신(더해서 비서까지)시켜버렸으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아르피엘과 소피엘이 나간다고 하면..
"그러면 난 오늘 일정이 없는 건가?"
"네. 일단은요. 아, 내일은 저하고 같이 학교에 가셔야 해요."
"학교? 왜?"
"임신한 걸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알리고, 표창장도 받거든요."
"표.. 창장..?"
뭔가 상상하기 두렵다.
"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빠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요♡"
"음.. 좋기는 한데, 내가 가도 될까? 자세라던지 그런 예법, 아직 다 못 배웠는데."
"그런 건 조금 모자라더라도 괜찮을 거에요. 굳이 트집을 잡으려면 잡겠지만, 임신을 시켰는데 누가 그러겠어요? 거기다가 며칠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만 잠깐 방문하는 거니까요."
"알겠어. 그러면.. 옷 같은 걸 준비해야 하나?"
"이미 미리 주문을 해 놓았으니 걱정 마세요."
아르피엘, 참으로 준비성이 좋은 여자다.
"어머니이! 얼른 씻으시고 세계수 가요!"
동네방네 다 들으라는 듯 소리치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아르피엘.
흠칫 놀라 깨어난 소피엘이 허둥지둥 옷가지를 챙겨 입을 것이 뻔히 보였다.
그러면.. 오늘은 뭘 할까?
* * *
딱히 할 게 없어서, 받은 돈을 좀 들고 시내로 나왔다.
쇼핑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뭐 사고 싶은 것도 없고..
'그러고 보니 셀렌디네 자취방이 이 근처였었지.'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고 자취방으로 가 보았다.
다행히 셀렌디네는 어디 안 가고 집 안에 있었다.
자취방의 문을 두들겨 보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누구세요?"
"나야."
후다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린다.
방금 일어났는지, 그야말로 원초적인 모습이다.
회색 돌핀팬츠에 하얀 브라탑을 입은, 편안한 집안 전용 차림새.
브라탑에 담긴 가슴이 묵직하게 흔들린다.
안에는 속옷을 따로 안 입었는지,
하얀 브라탑 위로 선명하니 유두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뭔가 저 차림, 저기에 후드집업 하나 더 걸치고 담배 사러 나가면,
딱 대학 근처 원룸촌에 흔히 보이는 자취녀처럼 보일 것 같다.
셀렌디네는 이를 닦으려다 나왔는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이게 정말로 진짜냐는 듯이 날 바라본다.
"에..?"
"놀러 왔어."
"오늘은 일하는 날 아니에요?"
"오프야. 바쁜데 온 거야?"
"아뇨아뇨. 어제 노가다 뛰고 지쳐서 푹 잠들었다가 방금 일어났어요. 들어오세요."
셀렌디네는 엄청 좋아하면서 안으로 안내했다.
그나저나 뭔가 여자 혼자 사는 것 치고는 되게 깔끔한 느낌이 드는 방이다.
지저분한 게 여기저기 널려있을 줄 알았는데, 뭐 별 거 없었다.
"좀 정리를 해야 할 텐데.."
이것저것 주섬주섬 정리하는 셀렌디네.
"이나 먼저 닦고 와."
"네..!"
셀렌디네가 욕실에 간 사이,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어디 야한 책이라도 숨겨둔 거 없으려나?
그러나 침대 밑에 아령과 캐틀벨이 몇 개 있는 것 빼고는 특이한 건 없었다.
운동을 좋아하나 보다.
잠시 후, 양치질을 마친 셀렌디네가 돌아왔다.
"..이렇게 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냥 심심해서."
"요새 잘 지내셨나요? 임신시종 일은 좀 어때요?"
"다 임신시켰어."
"그쵸, 쉽지 않..에?"
"영애와 백작 둘 다 임신시켰어."
"진짜에요?"
"응."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너 취업 부탁하려고 광산에 갔었는데, 이상한 힘을 얻었어."
"이상한 힘이요?"
"응. 확정임신시킬 수 있는 건데, 대략 이런 거야."
나는 집중해서 자지를 만들었다.
공중에 뿅 나타난 자지에, 셀렌디네는 경악했다.
"엑? 이건.."
살짝 손을 대 보는 셀렌디네.
"아직 따듯해.."
"헤응.. 너무 만지진 마. 감각이 공유되거든."
"아, 네. 그런데 원래 거는 그대로 있는 거죠?"
"응. 그대로 있어."
"그럼 두 개가 된 건가요."
"두 개 아니야."
나는 정신을 더 집중해 자지를 뿅뿅 만들어냈다.
"에엑?"
공중에 뜬 네 개의 자지는 내 손짓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자취방 천장을 맴도는 네 개의 자지.
셀렌디네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간다.
"우와.. 이게 대체 다 뭐에요? 마법인가요?"
"마법이 아니라 신의 힘이라는데."
"신의 힘이요?"
"남성의 신이 남긴 힘이라던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그런 교단이 있다고 얼핏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은.."
"나도 사실 잘 몰라. 대신관이라는 여자를 보긴 했는데."
"대신관이요? 엄청 높은 엘프 아닌가요?"
엄청 높은 엘프라는 말에, 떡진머리에 거지꼴을 한 세레니아가 떠올랐다.
"음..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이 힘으로 임신을 좀 수월하게 시킬 수 있게 됐어."
"아.. 그러면 그걸 한꺼번에 넣는 건가요? 아플 것 같은데."
난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응?"
"에?"
"뭘 한꺼번에 넣어?"
"그.. 다섯 개를.."
"무슨 소리야. 그게 가능해?"
"..아니.."
갑자기 얼굴이 새빨게지는 셀렌디네.
나는 슬쩍 놀려 본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본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 하고 싶어?"
"아니 그래서가 아니라 임신이 잘 된다고 해서.."
어찌어찌 변명을 해 보지만,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음습한 욕망의 편린이 엿보였다.
"그런 게 아니라, 신성한 힘이 임신을 도와주는 그런 거야."
"아.."
셀렌디네는 얼굴을 푹 숙이더니,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 아! 저기 그, 제 취업은 혹시 어떻게 됐나요?"
"면접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해두었으니 아마 될 거야."
"아. 감사합니다."
"뭘, 나 때문에 짤린 면도 있으니 책임을 져야지. 근데.."
"네..?"
"근데 셀렌디네는 임신하고 싶지 않아?"
임신이라는 말에, 셀렌디네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제가요?"
"응. 왜, 싫어?"
"아뇨아뇨아뇨, 싫은 건 아닌데, 제가 정말 괜찮나요?"
"왜 뭐가 이상해?"
"음, 그런 게 아니라.. 뭐랄까, 설명을 잘 못 하겠어요."
"천천히 이야기 해봐. 오늘 시간도 많은데, 느긋하게 들어줄게."
셀렌디네는 한숨을 푸욱 쉬더니,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셀렌디네는 원래 시골 출신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고,엄청 사이가 좋았다는 모양이다.
시골에서는 정말 희귀하게도, 연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만들었는데, 그게 셀렌디네였다.
셀렌디네는 동네 애들 중에서는 마력이 제일 많아, 어릴 적엔 인기도 많았다고 했다.
"동네에 제 또래 남자애가 딱 셋 있었는데, 셋 다 저한테 사귀자고 했었어요."
"여자애는 몇 명이나 있었는데?"
"글쎄요? 한 스무 명쯤? 여자애들은 친한 애들 말고는 잘 기억 안나요."
아무튼 촌동네에서 한끝 날리던 셀렌디네는, 시골을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년이 되자, 붙잡는 남자애를 뿌리치고 영원의 도시로 향한 셀렌디네.
그러나, 대도시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그래도 마력이 좀 된다고 자부했는데, 도시로 나오니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이런저런 일을 하며 직장을 전전하다 마침내 정착한 게 노예 업계, 지닌 마력에 비해 체력과 근력이 좋은 편이었기에, 계약직으로 일하다 노망친 노예를 몇 번 잡는 성과를 올리면서 빠르게 현장관리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가 한계였다.
현장관리자 윗자리는 사무관리자였는데,
농촌 출신의 셀렌디네로서는 벅찬 일들이 많았다.
사무관리자가 됬다가 현장관리자로 보직변경되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서류업무에 실수가 잦았던 탓에 사실상 강등이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한편 그러는 와중, 대학을 졸업하고 신입으로 들어온, 셀렌디네보다 훨씬 어린 사무관리자 동기들은 줄줄히 승진을 했다.
셀렌디네는 허탈했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이 자리까지 왔는데,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자기보다 먼저 승진한다.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노예나 잡으러 다녀야 하나?
그런 허탈함을 더욱 가중시킨 건,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 고향에 돌아왔을 때였다.
소꿉친구 남자애가, 아빠가 되어 친구와 오순도순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없이 밝은 그 모습에, 셀렌디네는 기가 푹 죽었다.
애가 둘인데, 열심히 셋째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애 적은 시골에서 애 많이 낳았다고 나라에서 표창도 받았다던가.
아이 두 명 분의 육아지원금은, 셀렌디네의 월급보다 훨씬 많았다.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흐음.."
다시 직장에 복귀한 날 저녁, 셀렌디네는 술을 많이 마셨다.
'열심히 일해봤자 뭐해, 승진도 안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골에서 남자애 붙잡아 결혼이나 할 것을..'
그 날 따라 유난히 속이 상했다.
유난히 임신이 하고 싶었다.
이미 셀렌디네 본인 삶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자식이라도 낳아 대신 대학을 보내고 싶었다.
그날 밤,
임신만 하면, 삶이 달라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에서, 관리중이던 남자 노예에게 손을 대고야 말았다.
상품에 손을 대는 건 길드에서 엄금하는 일이다.
결과는 하급 현장직인 추노수색대 대장으로 강등.
'혼돈의 안개' 속을 뒤져 노예를 붙잡는, 그야말로 말단 중 말단이었다.
그 처지까지 몰리니, 셀렌디네는 그냥 다 놓고 거의 포기를 해 버렸다.
부하들이 몰래 비웃는 것도, 그러려니 할 다름이었다.
부하들이라곤 똑같이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아이들 뿐.
어차피 나이 들면, 셀렌디네와 똑같은 절망감을 맛볼 것이었다.
그 중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 몇몇은 사무관리직을 너머 승진할 테지만,
그래봐야 대졸에는 비비지도 못할 것이다.
잠자코 듣던 나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랬구나.. 그런데, 혼돈의 안개라는 게 뭐야?"
"말 그대로 혼돈의 안개인데요. 마력망이 닿지 않는 장소면 밤에 짙게 껴요."
"그게 끼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안개에 닿으면, 마력을 빼앗기기 시작하고, 마력이 다 떨어지면, 시간이 정지된 채로 그대로 안개에 삼켜져요."
"삼켜져?"
"네. 그대로 안개 속으로 사라져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요. 예측이 불가능하니까. 나중에 전혀 뜬금없는 다른 안개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영영 사라지기도 해요."
"으와. 그건 좀 무서운데."
"그렇죠. 그러니 안개 속을 탐험할 때는 마력등과 탐침반이 필수에요."
"그 속을 탐험을 해? 왜?"
"안개에 삼켜진 것들이 나오거든요. 대부분은 예전에 안개에 삼켜진 엘프나 인간, 드워프들도 가끔 있고.. 가축들도 있고 몬스터들도 있어요. 몬스터들은 굳은 상태 그대로 두지만, 지성이 있는 생물이라면 붙잡아 마력을 주입해 부활시킨 후 노예로 삼죠."
"그래도 되는 거야?"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어요. 안개 속에서 붙잡은 사람들은 보통 기억이 혼탁하거나 아무것도 기억 못 할 때가 많거든요."
문득 처음 붙잡혔을 때, 안개가 데려온 어쩌구 했던 것이 어설프게 떠올랐다.
"아, 그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던 건가."
"네.."
"원래 이 세계는 이랬어?"
"아뇨, 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원래 세계는 좀 달랐다고 해요. 안개 같은 건 없었고, 너른 대지에 다른 여러 종족들도 많이 살고 있었다고."
"그게 평범하지."
"그러나 어느 날부터 '혼돈의 안개' 가 나타나고, 그대로 세계를 뒤덮었다고 해요. 엘프 공화국만 빼고요. 엘프 공화국은 세계수의 거대한 마력과 그 마력을 퍼트리는 마력망이 안개를 밀어냈거든요."
"그러면 이 세계에 나라는 엘프 공화국만 있는 거야?"
"네. 안개 속에 아마 인간들의 나라나 드워프들의 나라도 있기는 할 테지만.."
"그렇구나. 마력망이 연결되지 않은 곳은 혼돈의 안개에 삼켜져버린 거구나.."
"그렇죠."
"그러면.. 안개에서 구한 인간이나 드워프는 어떻게 해?"
"여자는 마력을 확인해보고 적당한 곳으로 보내지만, 남자면 보통.. 아시죠?"
"아.. 알겠어. 아무튼 이제 안개 이야기는 이쯤 하고, 그래서 임신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