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50.
* * *
"너 돈 준다고 했어?"
레이나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네. 무슨 문제라도?"
로리엘은 기가 막혀했다.
"아니 그러니까 남자들이 질색을 하지."
"제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것 뿐인데요."
"세상에 그렇게 무드가 없으니까 맨날 차이지. 세상에 어떤 남자가 그런 걸 좋아한다고?"
어째 이야기가 묘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뭘 좋아하는지 알았다면 그걸로 했겠죠. 모르니까 가장 무난한 돈으로 준 겁니다."
레이나는 한 마디도 안 진다.
잘못한 거 하나 없다는 태도다.
"아기를 가지게 해 준 기쁨을 잔여수명과 일평균기쁨으로 환산해서 숫자로 정확히 계산한 후, 그에 맞는 적절한 금액을 준비했을 뿐이에요."
"아이고, 진짜. 무슨 계약서 써?"
"사실 저는 그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상적인 남녀관계라면, 서로의 한 달 예상 생활비는 얼마인지, 한 달에 성교는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성교 한 번당 얼마나 쾌락을 주는지, 이런 걸 분명히 석명해서 서로가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전부 인지한 상태에서 생활하는"
듣고 있는 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레이나 멀쩡한 줄 알았는데..
완전 폐급이었다.
일은 잘 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결혼 못하는 타입이다 저거.
"저기 그러면 남자들이 안 도망가?"
"이상하게 다시 연락을 안 하긴 하던데"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던 로리엘은, 나 대신 시원하게 한 마디 했다.
"바보야?"
"..바보라니요. 저는 이성적인"
"이성 좋아하네. 섹스할때도 이성적으로 했어?"
그 한 마디에 레이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X새키야' 하며 덮치던 것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그건.."
"아니지?"
"그 땐.. 어쩔 수.."
"여자와 남자 사이는 머리로 계산하면서 하는 게 아냐."
"으읏.."
"그치이..♡"
그러면서 나한테 몸을 비비적거리는 로리엘.
귀엽다.
나도 모르게 로리엘의 머리에 손이 간다.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레이나는 좀 부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로리엘은 고양이처럼 내 팔에 얼굴을 묻더니,
자신감있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다른 걸 준비했어."
"준비? 뭘?"
"이거 봐줘."
로리엘이 꺼낸 것은 농담 좀 보태 주먹만한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이건 또 뭔.."
"4캐럿 다이아가 박힌, 백금 임신 감사 링이야. 남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뿌듯해하며 반지를 내미는 로리엘.
레이나는 그걸 보고 뭔가 깨달은 것 같다.
"아, 저런 식으로.."
아냐. 이상한 거 깨닫지 마.
나 이런 거 안 좋아해.
근데 로리엘이 워낙 뿌듯해하는 표정이라 무턱대고 거절하기도 뭐하다.
"저기 로리엘.."
"고맙지? 응? 잘했지? 하지만 괜찮아, 임신시켜준 것에 비하면야"
"아니 나 이런 건 좀."
"에..?"
로리엘의 얼굴이 급속히 무너진다.
"너, 너무 싼 거라 그래?"
잘은 모르지만 저거 절대 싼 거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이때다 하고 레이나가 나선다.
"역시 돈이"
"돈도 아니야."
"그러면 뭘 원하는 거야?"
"아무 것도."
"에..?"
"아무 것도 안 원해. 다 내가 좋아서 한 거고, 내가 좋아서 임신시킨 거니까. 자꾸 뭐 주려고 하지 마."
단호하게 말해도 레이나와 로리엘은 듣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엄청 뭘 해주고 싶어 하는 둘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듯 하다.
"그러면.. 하아. 좀 생각을 해 볼게. 일단 이런 비싼 것들은 받을 수 없어."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그냥 안 넘어갈게, 나중에 무지무지 엄청난 부탁을 할 테니까. 일단 오늘은 안 받는 걸로."
"으음.."
내가 완고하게 거절하자, 둘은 곤란해했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것인가.
"정말 원하는 거 없어?"
"아무리 작은 거라도 좋으니까요."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뭐라도 던져 보았다.
"정 뭐하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오늘 데이트나 한 번 해줘."
어차피 정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멍하니 시간을 때우느니 뭐라도 하는 게 나았다.
"데이트..?"
"에, 겨우 그런.."
너무 별 거 아니라 당황하는 둘이었다.
"아, 근데 전 이제 근무하러 가봐야 하는데.."
레이나가 들어간다는 말에 로리엘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응? 진짜? 빨리 가 봐. 일하는 데 늦으면 안 되지. 오늘은 나하고만 데이트 하고, 레이나하고는 다음에 하면 되겠네."
"..으음.."
레이나는 둘만 남겨놓는 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좀 걱정이 되는데.."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걱정 마. 그보다 빨리 들어가 보라니까?"
"으.."
찌푸린 표정으로 레이나는 미적미적 일어섰다. 출근하다 나온 길이라 시간이 없었긴 했나 보다. 레이나가 떠나자, 로리엘은 내 옆에 더 착 붙었다.
"난 오늘 오프거든.. 뭐 하고싶은 거 없어? 가고싶은 곳은? 먹고싶은 건 뭐 없어? 뭐든지 해 줄게."
진짜 해달라고 하면 다 해줄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반지부터 환불하러 가자."
* * *
환불하고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반지는 그냥 순순히 환불을 해 줬지만,
로리엘이 나오는 길에 자꾸 뭘 해주려고 해서 목걸이? 반지? 귀걸이? 아니면 배꼽에 하는 피어싱은 어때? 겨우 떼어 놓고 나왔다.
"혹시 가고 싶은 곳 없어?"
"글쎄? 육아용품점이라던지..?"
"에, 벌써? 아직 멀었는걸."
"그러면.. 잘 모르겠네."
"그러면 우리 세계수에 가 볼래?"
"세계수?"
"가까이서 본 적 없지? 가자."
세계수면 뭔지는 잘 몰라도 엘프들에게 엄청 중요한 것 아닌가?
아무나 가까이 가서 볼 수 있는 건가? 했는데 과연 아무나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임신한 여성 엘프와 그 동반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
입구에서 검사를 통과한 로리엘은, 내 손을 붙잡고 안쪽으로 향했다.
등불을 든 여신관이, 우리의 앞길을 안내했다.
"와아.."
넓게 뻗은 거대한 뿌리 틈새로, 청정한 마력수가 군데군데 고여 있었다.
하얀 꽃으로 장식한 대리석 기둥 위에는, 주홍빛 마력등이 반짝였다.
눈물나게 아름다운 광경이다.
"굉장하지?"
"응."
"사실 나도 오늘 보는 게 두 번째야. 여긴 임신해야지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렇겠네."
"임신한 엘프들은 여기에서 처음에는 축복을, 나중에는 영혼을 받아."
"축복과 영혼?"
"응. 일단 임신이 되더라도,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잖아? 그러기 전에 임신 초기에 여기에 와서, 임신을 확인하고 여신님께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원드리는 거야."
"그러면 효과가 있어?"
"물론 있지 각종 질병에 면역이 되고,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지켜주거든, 다만 물리적인 충격이나 독극물에는 어쩔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하지만.."
"아, 그래서 임신 후에 관계를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그렇구나."
로리엘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왜, 혹시 또 하고싶어?"
"..조금.."
로리엘은 개구지게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꼬집는다.
"..안 돼, 참아♡"
"흐음."
"나도 아쉽지만.. 아기를 위험하게 할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아, 영혼을 받는다는 건 뭐야?"
"음. 임신 9년차에 태아가 클 준비가 되면, 이곳에 와서 엘프의 순수한 영혼을 태아의 신체에 깃들게 하는 거야."
"영혼.."
"응. 엘프는 세계수에서 영혼을 받아. 그 때 성별도 정할 수 있고.. 혹시 남자애가 좋아 여자애가 좋아?"
조금 부담스러운 질문이었다.
"글쎄, 둘 다 좋긴 한데, 어떤 애를 키우고 싶어?"
로리엘은 꼼지락거리더니 발그레해졌다.
"나도 둘 다 좋은데.. 기왕이면 남자애였으면 좋겠어. 아들 있으면 골치 아프다고는 하지만, 남자애들을 보면 너무 예쁘더라고."
"그.. 그렇구나.."
"아, 다 온 것 같아."
세계수의 기둥 안에는 '엘프의 여신' 의 사원이 있었다.
신관이 설명하기로는, 임신한 여성엘프들은 여기에서 여신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로리엘은 기다렸다가 성소로 나아가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렸다.
"이런 축복을 주셔서.. 아름다운 생명을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의 일원으로 기르겠습니다.."
한참 중얼거리며 기도를 드린 로리엘은, 마지막으로 제단에 하얀 꽃을 한 송이 바치고 물러났다.
"이제 좀 걸을까?"
세계수는 그 자체로 엄청나게 거대한 신전이었다.
우리가 가볼 수 있는 곳은 외곽의 일부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너무 넓어서 다 볼 수가 없었다.
"진짜 아름답네.."
어디를 봐도 정갈하고 우아했다.
엘프 특유의 침착한 분위기가 맴도는 세계수는,
뭔가 좀 뭔가했다.
"이런데서 이상한 짓 해보고 싶네.."
로리엘은 푸흡 웃으며 나를 뗏찌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그런 생각 안 들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변태야..♡"
느긋하게 걸으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점심이 되었다.
세계수에서 나와 뭘 좀 먹으려 가려는데, 어째 느낌이 쎄했다.
"로리엘, 혹시 어디 갈 꺼야?"
"고급 채식 코스요리 먹으러 갈까 했는데..?"
앗. 풀떼기는 싫다.
"고깃집 가자. 고깃집."
"에.."
내가 바득바득 우기며 고기집으로 가자고 하니, 로리엘도 당황해했다.
"고깃집이 정말 좋아?"
"엉."
"그, 그러면 가자.."
그렇게 우리는 고깃집으로 갔다.
손님은 대부분 중년 여성엘프들 뿐.
가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스테이크 세트를 시킨다.
역시 남자는 단백질, 고기다.
작은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스테이크를 보니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엘프식 소스를 끼얹은 등심 스테이크.
꿀맛이다.
"엄청 잘 먹네.."
로리엘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왜 보고만 있어? 먹어. 맛있어."
내가 권하자 로리엘도 고기를 잘라서 입에 오물거린다.
쪼꼬만 몸에 걸맞지 않게 능숙한 솜씨라 너무 귀여워 보였다.
"음.. 왜?"
내가 계속 쳐다보자 로리엘이 시선을 눈치채고 물어본다.
"아니 너무 귀여워서."
로리엘은 피식 웃더니 조용히 부드러운 부위를 잘라 내 접시 위에 옮겨 주었다.
하여간 하는 짓도 얼마나 예쁜지.
"잘 먹을게."
* * *
식사를 다 하고 간 곳은 '영원의 도시' 의 강변이었다.
세계수를 둘러싼 호수는 도시 외곽으로 흘러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을 따라 펼쳐진 푸른 잔디밭.
그 위에 자리를 깔고, 로리엘의 무릎을 배고 한가롭게 햇볕을 쬔다.
세상 평온하고 느긋한 시간이었다.
"배부르니 졸리네."
"나도.. 하음..♡"
귀엽게 하품을 하는 로리엘.
로리엘의 품에 안겨 향기를 맡아 본다.
햇볕 냄새와 꼬순내가 섞여 정말 향기가 좋다.
마치 갓 말린 빨래 같은 포근한 향.
"잠깐 잘까?"
"응..♡"
로리엘은 꼬무락거리며 내 팔을 벤다.
보드라운 볼살이 팔에 닿는게 기분좋다.
나는 로리엘을 인형처럼 껴안고, 살짝 잠이 들었다.
햇살이 우리를 따스하게 비춘다.
* * *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해가 어느새 뉘엿했다.
"진짜 잘 쉬었네.."
품 속의 로리엘은 내 가슴팍을 꾹 잡고,
아직도 도로롱도로롱 잠들어 있었다.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휴우. 이 정도면 됬겠지..?"
상태창을 확인해 본다.
정력 Lv.2 : 294/294
은총 Lv.4 : 6505/8000
정력은 드디어 만땅으로 차 있었다.
'드디어..'
평온한 낮이 가고, 격정의 밤이 다가온다.
이제 휴식의 때는 끝났다.
전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