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18화 (18/140)

〈 18화 〉 18.

* * *

그러나 내 결심과는 다르게, 클라리스는 단호했다.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요."

"괜찮은데.."

"내 말 듣도록 해요. 앞으로도 몸값을 다 갚을 때까지 건강하게 일해줘야 하니까."

"정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삼대 오백을 치는 내가 엘프들과 떽뜨떽뜨하는게 뭐가 무리겠냐마는 나는 일단 물러났다. 야외섹스를 하느라 옷이 땀에 젖기도 했고, 씻고도 싶었으니까. 내일은 내일 벗겨먹을 눈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일찍 쉰다고 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이만 씻고 자야겠네.'

* * *

2층의 휴계실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푹 꿀잠을 자고 일어나는데, 아침부터 뭔가 바깥이 시끄러웠다.

'누가 싸우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나와 보니, 가게 카운터에서 꼬맹이 하나가 클라리스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착오가 있었다고! 그 남자는 원래 내 꺼라고!"

어른한테 저렇게 대들다니 참으로 되바라진 꼬맹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보니 나보고 찌끄리라고 했던, 이레네의 동생인 아이린인가 하는 그 괘씸한 꼬맹이였다.

"클라리스, 무슨 일 있나요?"

내가 클라리스에게 말을 걸자 아이린은 득달같이 내게 달려왔다.

"앗! 너 이 녀석! 잘 만났다. 대체 왜 날 속인 거야?"

"뭐가요?"

"잘못해서 너 대신 레오라는 애를 사버렸잖아!"

나는 짐작가는 바가 많이 있었지만 천역덕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모르긴 뭘 몰라! 그 녀석 한번 찍싸면 끝인 순 비실이더만! 언니가 말했던 정력왕은 너 맞잖아!"

찍사라니, 어떻게 우리 귀여운 레오에게 저런 말을! 이라고 하기에는 그 녀석 영 여리여리 비실비실한 것이 틀림없이 찍사처럼 보이긴 했다. 아이린은 나 말고 클라리스에게도 쏘아붙였다.

"이 녀석 당장 내게 팔아! 산 값의 두 배를 주겠어. 애초에 원래 내가 사려고 했던 거야."

이 건방진 꼬맹이는 돈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클라리스, 팔지 말아요. 뭐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나?"

클라리스는 느긋하니 왕찌찌 아래에 팔짱을 끼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예의 의사에 반해서 매매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네요. 그리고 당신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하는 짓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요."

아이린은 흥, 하고 콧김을 뿜더니 클라리스를 째려보며 소리쳤다.

"나 몰라? 그러면 '엘리시움' 이라는 이름은 들어 봤겠지? 내가 거기 사장이야!"

"아.. 엘리시움이라면.."

"이딴 하꼬업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영원의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핫플레이스라고."

진짜 대단한 곳은 맞는지 클라리스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대단한 분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노예의 의사에 반해서 팔 수는 없습니다."

"이 녀석 얼마에 샀어? 4배를 주지."

잠깐이지만 클라리스의 눈이 흔들리는것 같았다. 어, 이거 안 되는데?

"1만 5천 골드에 샀긴 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됩니.."

"그러면 8만 골드 내겠어."

"..안 된다고 하기에는 괜찮은 금액이네요."

"클라리스?"

"미안해요. 리우 군. 어딜 가든 행복하길 바랄게요."

"자, 잠깐만요! 난 싫다고!"

"저도 싫지만 8만 골드면 어쩔 수 없어요. 미안해요."

이럴 수가. 믿었던 클라리스였는데. 라기에는 돈이 저 정도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아이린은 내 옆에 찰싹 붙어 상완근(알통부위)를 탐난다는 듯 쪼물딱거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흐흐흣. 넌 이제 내 꺼야. 얌전히 구는 게 좋을껄."

이년이 진짜 참교육을 당하고 싶나. 쪼물딱거리는 손놀림이 끈적한 것이 이레네 못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하나 싶어 잠깐 멍때리고 있자니, 클라리스가 끼어들었다.

"아직은 아니지요. 8만 골드를 내셔야죠."

아이린은 갑자기 기가 팍 죽었다.

"아. 그렇지.."

"그러면.."

"저기 근데.."

"네. 듣고 있습니다."

"내가 어제 좀 돈을 많이 써서 말이지."

"네에."

"그 콩나물같은 녀석을 쓸데없이 비싸게 사는 바람에.."

"그래서 돈이 없으신 건가요?"

"없는 건 아니고, 조금 있으면 생길 테니.. 먼저 좀 안 될까?"

"현금이 없으면 노예도 없습니다."

"나중에 꼭 줄게."

"나중에 팔죠 그럼."

"이게 진짜. 나 누군지 알아?"

"엘리시움의 점주님이시라면서요? 설마 그런 분이 노예 한 명 살 돈이 없다면 부끄러운 일이겠죠?"

"너.. 이..!"

"아닌가요?"

"..기다려. 내가 어떡하든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돈을 마련해 다시 오겠어."

아이린은 날 돌아보더니 팩하고 쏘아붙였다.

"영원의 도시에서 손꼽히는 업소인 엘리시움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 남들은 일하고 싶어서 난리인데 너까짓 게 뭐라고 튕겨?"

나는 말하는 꼬라지를 보고 궁디팡팡을 해주고 싶은 욕구가 들끓어 올랐지만 겨우 참았다. 아이린은 제 할말만 다 하고는 휙 돌아가버렸다. 클라리스는 여전히 느긋했다.

"아침부터 참 정신없네요."

"클라리스, 왜 날 팔았어요?"

"안 팔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하.."

"그리고 리우 군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제 이야기해줬던 시세 있죠? '엘리시움' 같은 고급 업소는 거기에 몇 배가 더 뛴답니다."

"돈보다도 말이죠.. 하아.. 저는 가슴도 없는 건방진 꼬맹이들은 상대하기 싫어요."

"아, 리우 군은 성숙한 취향이었죠. 음, 그 만약에, 혹시라도 리 군이 팔리기 전에 몸값을 가지고 오면, 팔리는 대신 자유가 될 수 있어요."

"8만 골드를 어디서 구해옵니까."

"8만 골드가 아니라 1만 5천 골드에요. 내가 리우 군을 산 금액."

"음? 그 가격에 풀어준다고요? 그러면 클라리스가 너무 손해 아닌가요?"

"뭐, 많이 손해기는 한데.. 나도 지금은 말 못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요. 리우 군은 아무래도 오래 알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냥 기회를 한 번 줘 보는 거에요."

클라리스는 그냥 하꼬 업소의 점주가 아니었나? 8만 골드보다 더 대단한 사정이란게 대체 뭘까.

"이런저런 사정이라니 뭐죠?"

클라리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에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1만 5천골드를 가지고 오면 풀어주겠다는 거에요."

"별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한번 알아는 보죠."

그렇게 말을 하고 대기실로 올라와 한참 생각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막막했다. 내가 여기 와서 안다고 할 만한 엘프라곤 어제 왔던 손님 네 명 뿐인데, 그 네 명중에 당장 1만 5천 골드를 빌려줄만한 엘프가 있을까? 그마저도 오늘 해 지기 전에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빌리는 것 말고 정정당당하게(?) 돈을 번다고 하면, 질싸 한 발에 50골드니까.. 10번이면 500골드, 100번이면 5000골드, 그러면 최소 300번은 해야 하는구나. 이거 한 달 정도 시간이 있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자고로 사회에선 신용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하다못해 내가 클라리스의 업소에서 일을 좀 오래 했다면, 손님들에게 '질내사정 10회권' 이라던지 하는 식으로 미래에 해줄 걸 미리 팔아먹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당장은 그런 것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애초에 지금은 업소 안에서 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아닌가.

'그러면 천상 빌리는 것밖에 답이 없는데.'

아무리 절륜하고 엘프를 뿅가게 할 자신이 있다고 해도, 양심이 있지 만난 지 하루만에 그 돈을 빌려달라는 건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그냥 아이린을 참교육시켜 버릴까?'

하지만 남자를 우습게 보는 그 꼬라지를 보면 참교육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아이린과는 그다지 엮이고 싶지도 않고.

"흐음.."

내가 고민하고 있는데, 클라리스가 날 불렀다.

"리우 군. 지명손님이 있어요."

"음? 누구지? 내려갈게요."

상담실로 내려가 보니, 거기에는 셀렌디네가 있었다.

"오. 왔냐."

"아, 네."

셀렌디네는 안 어울리게 엉거주춤했다. 아무래도 내가 반말 쓰는 것이 어색한가 보다. 빵디 맞을 때는 앵앵거려도 끝나고 나면 뭔가 어색한 법. 며칠 만에 주도권이 역전되었으니 아직 익숙하지 않을 만도 했다. 나는 소파를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 앉아. 잘 잤냐?"

셀렌디네는 주춤거리며 옆에 앉았다.

"네에. 저 말하셨던 거 있잖아요.."

"아. 그 노예문양 지워준다는 거?"

"네에."

"구해왔냐?"

"네. 구해왔어요!"

"잘했어."

나는 셀렌디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이거에요."

셀렌디네는 품에서 반짝이는 구슬을 꺼냈다. 딱 보니, 예전에 먹었던 통역구슬과 비슷하게 생겼다.

"이거 먹으면 되는 거야?"

"네.."

"그럼 먹어볼까."

"아, 그런데 그게, 저 잠시."

"왜?"

"그걸 먹으면, 노예문양이 사라졌다고 시스템에 경보가 가게 되거든요."

"어..?"

"그래서.. 먹고 바로 도망치셔야 해요. 잡으러 올 테니까요."

나는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가게 안에서 싸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구슬을 먹으려다 말고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게 예쁘긴 했다.

"뭐야. 그러면 별 소용 없네?"

"저.. 그래서 말인데."

"뭔데?"

"그거 먹고 저하고 도망치는 건 어떨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뭐?"

셀렌디네는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노예문양 지우고 도망쳐서, 저하고 조용한 시골에 내려가서 살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먹여살릴게요. 몸만 오세요."

"아니 마음은 고맙긴 한데.."

하필 딴 데 팔려나갈 상황에서 이런 제안이 들어오니까 좀 혹한다. 하지만 저렇게 도망쳐봐야, 별로 미래가 밝을 리가 없다.

"생각은 해 둘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구슬을 챙겼다. 정 급하면 먹고 튀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지금 당장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너 지금 몇 골드나 있냐?"

"30골드 정도요..?"

"다 내놔. 나가자."

"나가자니요?"

"나가서는 싸도 된다던데?"

"그런가요?"

"너도 잘 몰라?"

"마력에 관한 건 귀족이 아니면 잘 몰라요."

"아무튼 나가자."

"..저랑 나간다고요?"

"왜, 이상해?"

"아니, 저.. 보통은 잘 안 나가려고 하니까요."

"난 아냐. 아침운동도 좀 할 겸 나가자. 30골드면 너무 싸긴 한데, 뭐 구슬도 구해왔으니까 그걸로 퉁치지 뭐."

나는 셀렌디네에게 34골드를 받아, 클라리스에게 타임비 6골드(2타임)를 건네고 거리로 나왔다. 햇살이 화창한 거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날씨 정말 좋네."

내가 신나서 한동안 걸어가는데, 어째 셀렌디네가 좀 이상했다. 옆에서 안 걷고 조금 뒤에 떨어져서 우물거리며 따라오는 게 아닌가.

"거기서 뭐 해? 일로 와."

내가 잡아끌자 셀렌디네는 부끄러워했다.

"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나와 셀렌디네가 붙어서 가는 것은 원래 세계로 바꿔 생각해 보자면 이십대 미녀와 왠 빻은 아저씨가 팔짱을 끼고 가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업소 안에서야 이런저런 농탕을 치더라도 밖에서 만나면 영 껄끄러운, 아마 그런 느낌일 것이다.

"걱정 말고 일로 와."

내가 셀렌디네의 탱탱한 빵디를 쪼물거리며 재촉하자 셀렌디네는 얼굴이 푹 익어가지고선 내 옆에 붙었다. 나는 셀렌디네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도 빵뎅이 잔뜩 두들겨 줄 테니 각오하라고."

셀렌디네는 남자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환장하겠으면서도 좋아죽겠는지 조용히 손가락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난 셀렌디네에게 물었다.

"저게 뭔데?"

"여..여관이요."

보니까 그렇고 그런 여관, 원래 세계로 따지면 러브호텔에 해당하는 곳인 것 같다. 나는 셀렌디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들어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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