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
* * *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알겠으니 일단 먹어."
흑발 엘프 아가씨는 조신하게 애플파이를 한 입 베어물었다.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배가 고팠는지, 베어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우물우물 볼살이 통통하도록 복스럽게 먹는게 정말 귀엽고 보기 좋았다.
'저 볼테기를 기냥 막 꼬집어주고싶네. 으. 참자.'
"맛있다..!"
이것보다 맛있는 것을 분명 많이 먹어봤을텐데, 너무 순수하게 맛있다고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우물.. 우물.. 꿀꺽. 음. 잘 먹었습니다!"
예의바르게 다 먹고 나서도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하는 아가씨는, 정말이지 교육 잘 받은 있는 집 아가씨스러웠다. 나는 슬쩍 아가씨를 놀렸다.
"잘 먹네. 입 옆에 파이조각 붙었다."
"죄송합니다. 남자분 앞에서.."
대체로 남자를 아래로 보는 게 보통인 이쪽 엘프들에 비해, 이 아가씨는 확실히 달랐다.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나를 '레이디' 대접을 해 주는 것 같다. 나는 아가씨 입 옆에 붙은 파이조각을 쓱 때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아니야. 난 잘 먹는 여자 좋아해."
아가씨는 이런 계통에는 면역이 없는지 얼굴이 새빨게져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으.. 그.. 저기.. 남자가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되요. 다른 사람들이 가벼운 남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가벼운 남자 맞는데? 이쪽 기준으로 나는 말도 안 되는 (나쁜말)일 것이다.
"가벼운 남자는 싫어?"
"에.. 그게.. 싫지는.."
살짝 미끼를 던지니까 어쩌질 못하고 두근두근하는 것을 보니 이거 분명히 천상 태어나서 한 번도 못 해본 아다였다. 여자들이 동정남을 볼 때 이런 느낌일까. 울긋붉긋 무르익어서 톡 치면 헤으응하고 넘어올 것 같은 느낌이다. 진짜 귀엽네.
'그럼 어디 보자. 어디부터 공략해 볼까? 다짜고짜 가출했냐고 묻기는 좀 그렇고.'
나는 잠깐 생각하다 가볍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너 혹시 무슨 고민 있니?"
"네? 고민 있는 지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길거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잖아. 그리고 너 보니까 평소에 이런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뭐가 답답하니까 나온 거 아닐까 해서."
"사실 조금.."
"무슨 고민인지 이야기해 볼래?"
"앗 아뇨. 좀 개인적이고 부끄러운 거라.. 하지만 정 듣고 싶으시다면.. 아냐.. 그래도 부끄러워요.."
이것은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사춘기 남학생의 고민을 들어주겠다고 갑자기 나타난 예쁜 누님 정도. 이 아가씨, 부끄러워서 튕기기는 하지만 한번만 더 톡 밀면 바로 넘어올 것 같다. 근데 궁금하긴 하다. 대체 무슨 고민일까? 이상한데 털이 났나? 뭐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일단 지금은 살짝 물러나자.
"흐음, 그래? 부끄럽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내가 순순히 물러나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이것은 삼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다. 나는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티를 팍팍 내는 아가씨를 애써 무시하며 묵묵히 걸었다.
"저기.. 오빠.."
드디어 아가씨가 못 참고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칼같이 말을 끊었다.
"아, 다 왔네. 여기야."
"에..? 여기가 어디죠?"
"고민상담소. 내가 일하는 곳."
"에?"
"한 타임에 7골드 반 타임에 4골드야."
"아."
아가씨는 뭔가 실망스러운 것 같았다. 그야 뭐 가출해서 만난 멋진 오빠가 사실 호스트였다면 실망스럽겠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넌 이런데 다니기는 어울리지 않는 건 알지만, 무슨 고민이 있는지 내가 꼭 들어주고 싶어."
아가씨는 호객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조금 시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돈 없어요.."
"알아. 파이도 내가 샀잖아.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나는 그렇게 속삭이면서 아가씨에게 10골드를 쥐어주었다.
"에? 이건?"
"이걸로 나 보러 와. 사실 공짜로 이야기 들어주고 싶지만 휴식시간이 끝나서 말이지."
아가씨는 당황했다.
"아니, 저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그러면 고민 해결하는데 써, 아가씨 같이 귀엽고 순진한 소녀가 끙끙거리면 마음이 편치 않거든."
쿨하게 멋있게 10골드 줘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다 계산이 있었다. 사과파이 하나도 빚지는 걸 싫어하고 죄송해하는 아가씨다. 그런 아가씨가 고민 해결하라며 업소오빠가 준 10골드를, 그냥 날로 먹고 날라버릴 리가 없다. 120% 분명 가게로 들어온다.
가게로 들어오면 조용한 방에 둘만 있게 되고, 조용한 방에 둘만 있게 되면.. 그 다음은 뭐다? 뻔하지. 어지간히 돈 많은 집 아가씨 같은데, 지금 쿨하게 준 10골드는 나중에 백 골드, 천 골드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괜히 군말 더 붙이지 않고, 산뜻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면 고민이 빨리 해결되길 바랄게."
그리고 문을 닫고 가게로 들어와 카운터에 앉아있는 클라리스에게 속삭였다.
"2번 방에 가 있을테니 손님 오면 넣어주세요. 조금 있으면 들어올 거에요"
장사 일이십년 한 게 아닌 클라리스는 내가 뭘 낚았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작별했는데 아무래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좀 이상하겠지.'
내가 2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과 정확하게 동시에, 가게의 문을 열고 아가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이 가게에 들어온 오빠를 만나고 싶어요!"
클라리스는 친절하기 그지없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2번 방입니다."
* * *
나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곧이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들어온 것은 주춤거리는 아가씨였다. 민망하면서도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런 곳은 처음이니?"
"네.."
사실 나도 오늘이 첫날이지만, 그 뭐냐 분위기라는게 있잖은가. 이렇게 벌벌 떠는 동정 아가씨에겐 경험 많은 옵하가 사르르 이끌어주는게 어울릴 터.
"일단 앉아."
내가 소파에 앉으라고 부르자 아가씨는 쪼로로 따라와서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이제보니 가슴만이 아니라 엉덩이도 토실토실하다.
'엘프들이 보기에는 좀 뚱뚱하겠구만.'
나도 이제 감이 좀 온다. 슬랜더, 빈유가 미녀취급인 세상에서 200살도 안 된 나이에 C컵 이상인 저 괘씸한 몸매라면, 상당한 추녀 취급일 것이다.
'떡알못들 같으니라고.'
나는 발끈발끈하는 쥬지를 진정시키며, 슬쩍 아가씨 옆으로 다가갔다.
"이름이 뭐야?"
"저는..아르피엘이에요. 아르피엘 엘룬드."
가문명까지 말하는 엘프는 처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엘프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건 장로였던 이레네였는데, 그조차도 부를 때는 이레네 장로가 끝이었다. 아마 아르피엘의 사회적인 지위는 이레네보다 높을지도 모른다.
"엘룬드는 유명한 가문이야? 내가 잘 몰라서.."
"아, 엘룬드 가문은, 광산업하고 제련업으로 조금 알려져 있어요."
말은 조금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저 부끄러움 많이 타는 아가씨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걸 봐서 그냥 그냥 허접한 가문은 아닌 것 같다. 느낌 상 중소기업급에서 최상위거나 대기업급의 최하위 정도.
"그렇구나."
"대부분 공업용 광물이라, 일반인 분들은 잘 모르셔요."
"음, 대단한 집 아가씨였네."
"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잘 살 뿐이에요."
역시 이쪽 세계도 조금 잘 산다고 말하려면 대기업 하꼬는 되야 하는가 보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 있어? 개인적인 거라고 했지? 혹시 신체에 관한 거야?"
"아.. 예.. 조금. 복합적인 거에요."
"뭔데?"
"아.. 그게.. 조금.."
뭔가 엄청 주저하기에, 나는 더 밀어붙이지 않고 기다렸다. 이럴 땐 짜증을 내기보다는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괜찮아. 천천히 이야기 해."
"저기.. 오빠."
"아, 잠깐 너 몇 살이니?"
"173살인데... 왜 그러세요?"
일단 성인은 확실하고, 오빠가 아닌것도 확실하다. 따지자면 엄청 눈나지만.. 뭐 어떤가. 오빠소리 들으면 좋지.
"아냐. 음.. 괜찮아. 이야기해 줄래?"
"그, 저기.. 저는 외동딸이라.. 엘룬드 가문을 이어야 하는데요."
"음."
"우리 가문은 대대로 마력이 짙어서 아이가 잘 안 생기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후계자를 만들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마력이 강한 엘프들은 아이가 잘 안 생긴다고.
"그, 제가 좀 남자를 꺼려서, 지금까지 피해오다가.. 어머니가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하셔서.. 며칠 전에 처음으로 남자하고 하려고 했는데요.."
"으음."
"그.. 어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남자분을.. 그 세우고.. 올라타려는데.. 남자분이 절 보고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거에요."
"엑? 왜?"
"그.. 아마 어머니께서 형편이 안 좋은 집의 남성분을 사서 제 첫 상대를 연습시키려고 하신 것 같아요.. 분명 그 분도 처음이었을 텐데.. 저같이 뚱뚱하고 가슴도 나온 여자가 올라타니까 소름끼치도록 싫었겠죠.. 남자로서 저 같은 여자에게 첫경험을 빼앗긴 다는 건 치욕스러운 일일 테니까요."
이게 무슨 죠스바 뼈발라먹는 소리냐 싶었지만 난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아.. 음.. 그렇구나."
"남자분의 눈물어린 눈을 보니..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도망쳤어요.. 오늘 어머님이 다시 해보라고 하셨는데.. 도저히 못 하겠어요. 지금도 그 남성분의 눈물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이야기를 하는 아르피엘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흐음."
원래 세계로 따지자면 빻은 부잣집 소년에게 부친이 여자경험 좀 해보라고 가난한 집 처녀를 데려왔는데, 소년을 보고 처녀가 우니까 순진한 소년이 상처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눈 앞의 얘를 보자면 도저히 안 믿기지만.. 억지로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네.'
아르피엘은 엘프로 따지자면 아직 청소년기를 못 벗어난 파릇파릇한 나이였다. 그러면서도 보통 저 나이의 볼품없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군살이 살짝 붙은 볼륨 있는 육덕진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도 저 포동포동한 허벅지를 벌리고 마구 범하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몸매다. 얼굴도 약간 귀욤상에 예쁘고. 그런데 저런 이기적인 미소녀가 스스로를 추녀라고 생각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나는 좋지만, 정말이지 참으로 가혹한 세계로다.
"아르피엘."
"네.."
"너는 그 남자에게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네.. 솔직히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요."
"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겠지.. 하지만 그래도 임신은 해야 하는 거지?"
"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요. 전 임신해야 해요."
교복 차림의 엘프가 임신 운운하는것에 나는 벌써 빠딱 서 버렸다. 이미 머릿속에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결론으로 아르피엘을 이끌어 갔다.
"아르피엘은 착하니까, 남자가 싫어하는데 억지로 하는 건 도저히 못 할 거야. 그렇지?"
"네.. 맞아요.. 흑흑.."
"그렇지만 가문을 이으려면 임신을 하니까. 못 하면 어머님이 실망하실 꺼고."
"네.. 전 어쩌면 좋죠? 훌쩍.."
아르피엘은 진짜 미안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이쪽의 엘프 여성들은 이레네 장로처럼 남자가 싫어하든 말든 여기저기 조물딱거리는 걸 우습게 생각하는게 보통이었다.
"그러면, 아르피엘을 좋아하는 남자하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아르피엘은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얼마나 섹시하고 애처로운지!
"저를 좋아해줄 남자가 있을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