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노스페라투 (16)
* * *
바사고.
제 삼석의 대악마. 스칼렛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하게 짓씹어서인지, 선명한 붉은 입술이 핏줄기를 흘렸다.
바사고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마왕에 비견될 무력을 지닌 네 개체의 대악마 중 하나라는 것 정도밖에.
스칼렛의 머릿속에 있는 ‘푸른 장미 정원’이나, 루나에게서 전해들은 ‘푸른 백합 정원’에서의 스토리에서, 서열 2위의 아가레스부터, 서열 5위의 마르바스까지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마왕의 숙청.
단순히 그 한 줄로, 마왕에 버금가는 대악마들은 등장조차 하지 못하고, 그 설정만 한 줄 남기는 게 끝이었다.
그랬던 바사고가, 무심한 눈으로 스칼렛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주륵.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스칼렛 또한 마주 보는 것으로 응수했다.
대치는 길지 않았다.
촤르륵─! 펼쳐진 책을 한 손에 들고, 대악마─바사고는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의 그대로선 나를 이길 수 없노라.」
하나의 선언.
단순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라, 실로 그렇다는 것을 긍정하듯, 스칼렛과 그 파티에게 유리하게 조성되어 있던 결계 내부의 환경이 요동쳤다.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해나가는 마기에, 스칼렛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 마음대로.”
동시에, 불길한 마기와 대조되는 깊은 어둠이, 공간을 침식해 좀먹던 마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흠.」
“가라.”
짧은 감탄을 흘리는 바사고. 스칼렛은 명령과 함께, 데이지가 일말의 주저 없이 <포루나>를 들고 앞으로 도약했다.
「음.」
자신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는 데이지에게 흘긋 시선을 준 바사고는, 다시 스칼렛에게 눈을 돌렸다.
마치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는 태도에, 울컥한 데이지가 오러를 피어올렸다.
화륵─! 꽃처럼 피어오른 오러가 검신을 은은하게 빛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리라. 데이지는 분노했을지언정 오만해지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겐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를="" 위해─!=""/>
에일린의 영창이 끝났다. 데이지의 몸에 활기가 돋았다. 타오르는 오러가 한층 커지고,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에일린은 <무영창>으로 동시에 다른 마법을 준비했다.
데이지가 검을 휘두르는 궤적에 장애물을 남기지 않기 위해, 바사고의 마기를 최대한 지워낸다.
단순한 마법이라면 단숨에 수십 개도 무영창으로 시전할 수 있는 에일린이,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어 시전한 마법.
「….」
바사고의 눈길이 에일린을 향했다. 그리고 그 일순간을, 검사는 놓치지 않는다.
타앗─! 오러를 씌운 검극이 바사고를 향해 휘둘러졌다.
싸움이 벌어진 직후, 방심한 틈을 탄 기습적인 공격. 이 이상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공격을 할 기회는 없을 거라고, 데이지는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을 완전히 없는 취급하는, 이 오만한 악마에게, 아주 약간의 생채기라도 낸다면─.
─타앙!
“…!”
데이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에일린이 전력을 쏟아 걷어낸, 아니, 걷어내었던 마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검격을 쳐내었다.
“큿…!”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에일린이, 재빠르게 데이지의 몸에 바람을 휘감았다. 자신의 마법이 무용지물이 되어 굴욕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전투 중이었으니.
“잘 했다!”
데이지가 에일린의 마법으로 뒤로 빠짐과 동시에 스칼렛이 외치고, 어둠이 움직였다. 불길한 마기를 밀어내고, 그림자가 넘실거리며 바사고의 어둠을, 스칼렛의 어둠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점과 점.
선과 선.
면과 면.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 마치 형형색색의 그림 위에 검은 물감이 떨어진 듯 이질적인, 한 없이 그저 ‘어둠’일 뿐.
「과연.」
그 ‘어둠’을 눈에 담은 바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사고가 부리는 마기가 품은 어둠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파괴적이고, 거칠 것 없는 한 없는 멸망의 힘이란 것에서는 닮았다고 할 수 있을테지만.
「바알의 그것과 같은가….」
마왕, 바알.
단순히 순수한 무력만을 놓고 비교했을 때엔, 삼석인 바사고와 큰 차이 없을 바알이 어째서 만마의 위에 유일하게 군림하는 진정한 왕인가.
바로 그것을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
「그렇다면, 보여주마.」
전투가 시작한 직후부터, 바사고는 단순히 마기를 내뿜고 있었을 뿐이었다. 에일린이, 데이지가, 그리고 스칼렛이 무엇을 하는지 묵묵하게 바라만 볼 뿐이던 대악마가,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펼쳐진 것만으로도, 마스터의 경지에 가까운 데이지와 에일린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괴이한 귀물.
“─!”
커다란 소리. 스칼렛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지, 살기를 머금은 외침과 함께 ‘어둠’이 바사고를 덮쳤다.
서열 12위의 대악마, 시트리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었을 공격.
다만 바사고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미동조차 없는, 부동.
덮쳐오는 ‘어둠’이, 자신에게 일말의 상처조차 내지 못하리라 자신하고 있는 태도였다.
쩌적─! 바사고의 주위를 감싸던 구체 형태의 마기에서, ‘손’의 형태가 빠져나왔다.
그리곤 실체 없는 ‘어둠’을 붙잡고, 짓눌러, 손아귀에 감싸 쥐어서, 뭉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큿!”
에일린의 도움으로 뒤로 빠진 다음, 기회를 보고 다시 기습하려던 데이지가 혀를 차며 멈춰 섰다.
체내의 마력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주시하는 에일린과, 뒤에서 불안한 눈으로 전장을 지켜보는 아델라.
‘……축복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입술을 깨문 아델라가, 스스로의 무력감에 어깨를 떨었다. 성녀의 축복이다. 아무리 에일린이 시전하는 버프가 뛰어나다한들, 진정한 성녀로 각성한 아델라의 축복에는 비할 바가 못 될 터였다.
“쯧!”
다만 유일하게 자신의 공격이 바사고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스칼렛만이, 가볍게 혀를 차고는 그럴 줄 알았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천리안」이, 방금 자신의 ‘어둠’을 붙잡고 찢어발긴 ‘손’을 꿰뚫어 봤다.
마지막 순간, ‘어둠’이 자신의 통제에서 살짝 벗어났던 것 같은 위화감.
아니.
통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낄 정도로, 마치 ‘유도’된 것 같은,
스칼렛은 표정을 굳혔다.
‘이건.’
기묘하고, 괴이한 힘.
스칼렛쯤 되는 경지에서조차 그 원리가 불분명한 힘이라면,
‘권능….’
스칼렛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알았다.
<그랜드>에 도달한 이가, 기어코 법칙에 개입하는 힘을 얻어냈을 때.
그 초월자가 얻은 ‘개입’의 방향성을, ‘권능’이라 불렀다.
마왕, 바알과 어느 정도 대등하다고 여겨지는 네 악마. 아가레스, 바사고, 가미긴, 마르바스….
그들은, 바알이 마왕으로서 걸맞는 ‘권능’을 가지고 있듯, 제각각 자신만의 권능을 가지고, 바알과 대등한 악마로써 군림하고 있다.
바사고의 권능은 <인도>.
수많은 선택과, 그로 인해 나아가는 과정들, 결과까지를 사다리 타기에 비유하자면, 바사고의 권능은 사다리 타기의 길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내는 힘이다.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내는 힘.
그것은 미래 예지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빌어먹게도 까다로운 권능이구만.”
바사고의 권능이 무엇인지, 「천리안」으로 통찰해낸 스칼렛이 거칠게 웃었다.
잠시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스칼렛도, 바사고도, 뿜어내는 기색만으로 주변을 일그러뜨리던 힘을 갈무리 했다.
「…….」
바사고의 눈이 에일린을 향했다.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솔직히 말해, 벌레처럼 짓눌러 죽일 수 있는 여자였다. 가진 바 재능은 대단하지만, 지금으로선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 않는.
그러니 대악마가 대화의 상대로 선택한 것은,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 자신과 말을 섞을 자격이 있는 눈 앞의 진조 뿐이었다.
바로 그 진조 역시, 시간을 끌기 위해서인지, 바사고에게 말을 붙이고 있었고.
여흥이었다. 대악마는 시간을 조금 할애하기로 했다.
“진짜로 미래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권능을 지닌 놈이, 나한테 미래를 물어보나? 이만한 기만질이 또 없는 것 같다만.”
「실로 그렇네만. 겨우 이 정도의 결과만을 관측한 것으로, 나의 권능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는 그 눈……. 과연, 이만큼이나 왕과 닮아 있다면, 숙명이라 봐도 무방하겠구나.」
원하는 미래로 결과를 이끄는 권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스칼렛에게 「그대가 보아라. 오늘 나는 죽을 운명인가?」 같은 말을 한 것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바사고는 시원하게 인정했다.
‘이래서 미래를 엿봐도 아무것도 안 보였던 건가.’
「천리안」으로 미래를 엿봐도 소용이 없다.
분명 「천리안」은 권능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힘이지만, 진짜배기 ‘권능’이 상대라면 그 색이 바래고 마니까.
그런 의미에서, 미래를 보는 눈과, 원하는 미래를 도출해내는 능력의 싸움은, 결국 더욱 강한 쪽이 우세를 점하는 법이기에.
천리안으로도 스칼렛은 바사고의 미래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사고가 덧붙인 말.
숙명(??).
마왕, 바알과 스칼렛을 엮는 운명의 이정표.
운명의 실타래를 끌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권능을 지닌 바사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원초부터 이어져 온 필연(必?).
스칼렛은 그 단어가 그렇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왕의 숙적은, 다름 아닌 아이리스가 아닌가?
자신은 그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뿐인 것이 아니었던가.
다름 아닌 여신이 직접 택하고, 성검을 내린 것이 아이리스다. 만일 스칼렛이 정말 마왕의 진정한 대적자였다면, 아이리스가 아니라 스칼렛이 성검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스칼렛의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거, 나도 위험하겠어.」
그때, 바사고가 중얼거렸다. 푸른 안광이 한층 더 새파랗게 타오르며, 무심한 듯 관조적이던 태도가 일순간 변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아델라의 외침.
아마 이곳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것만큼은 아델라를 따라올 이가 없으리라. 거기에 더해, 전장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던 입장 덕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을 느꼈다.
아델라의 외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데이지가 에일린의 뒷덜미를 잡고서, 스칼렛의 앞에 섰다.
“뒤에 서세요!”
이곳의 유일한 전위.
에일린과 스칼렛이 나란히 서고, 데이지가 앞에서 전방을 주시했다.
스칼렛은, 자신의 숙명이나 운명적 필연 따위에 대해선 우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대적자야. 다시 한 번 보아라. 이 바사고가, 이곳에서 죽을 운명인가?」
“나도, 모른다고!”
일행이 다시 진형을 짜기를 기다려주기라도 한 듯, 지켜보던 바사고가 손에 들려있던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파르르르륵─! 빠르게 넘어가는 책장.
<눈 먼="" 망자들의="" 이정표=""/>
바사고의 권능을 엮어내 현실로 체현해낸 보구.
「으음.」
잠시 고민하던 대악마가,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조금 진지하게 해보지.」
딸랑─!
은은하게 울리는 방울 소리. 책을 든 손이 아닌, 다른 한쪽 손에 들린 종. 바사고가 그것을 흔드는 것으로, 분위기가 일변했다.
페이즈 II.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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