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노스페라투 (12)
* * *
소란스러운 밤이긴 했지만, 결국 아델라는 체념한 후 노숙을 택했다.
사실 말이 노숙이지. 실제론 노숙이라기엔 무척 호화로운 잠자리라, 떽떽거리던 아델라도 정작 잠자리에 들고 나선 불만스레 꿍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이 녀석, 말하는 걸 들어보니 과거에 나랑 노숙 좀 해본 모양이던데.
그래서 그런지 적응도 빨랐다. 새벽에 잠깐 확인해보니 셋 중 제일 깊게 잠든 걸 보니.
잘 자면 좋은거지, 뭐.
“일어나라, 아침이다.”
“웅으으엥, 5분만 더 자게 해주시어요….”
펄럭─! 뭉그적 거리는 아델라의 이불을 빼앗았다.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성녀의 잠옷차림이 훤히 드러났다.
굴곡이 예술적이군.
감상은 잠시. 이불을 빼앗긴 탓에 찬바람을 맞은 아델라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곤.
“……진짜 나쁜 남자십니다. 하긴, 남자란 대부분 그렇지요.”
“너, 신도들 앞에서도 그런 말 하지는 않지?”
“저를 뭘로 보시는 거지요……?”
하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일어나 아침 먹을 준비를 하고 있던 데이지와 에일린을 돌아봤다.
“다 됐나?”
“네, 주인님.”
그림자 속에서 꺼낸 커다란 테이블과, 신선한 식재료와 도구들을 이용해 만들어낸 호화로운 식탁.
여행길에 먹을 수 있으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비주얼이다.
“…흠흠.”
아침 세안을 마친 아델라가 조심스럽게 테이블의 한쪽을 차지했다. 두 눈이 아닌 듯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감에 반짝거렸다.
“공작과 함께 다닐 땐, 이런 점은 정말 좋답니다. 옛날엔 제가 요리하기도 했었는데… 이것도 다 추억이네요.”
“…….”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이 꼬맹이, 나한테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일부러 의미심장한 단어나 뉘앙스의 말을 골라서 해대고 있다.
이건 그건가? 예쁜 여자들을 끼고 있는 나를 향한 심술 같은 건가?
“와아. 이건 동부 극단에서만 나오는 열매로 만든 소스로군요? 성국에선 정말 구하기 힘들어서, 저도 몇 번 못 먹어본 것인데… 이런 걸 맛볼 때마다 소녀는 공작의 그림자 속은 사실 음식 저장고로 쓰일 때 가장 가치가 빛나는 게 아닐까 싶답니다….”
아니. 그냥 먹는 걸 밝히는 년이 맛있는 걸 눈 앞에 두니 필터링이 안 되는 것 뿐인가.
“…먹자.”
“네….”
“흥….”
조금 풀이 죽은 것 같은 데이지와, 토라진 듯 이쪽을 흘겨보는 에일린.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딱히 사이가 나쁜 것 같진 않은데. 미묘한 관계라고 하는 게 맞을까. 사실 나도 조금 당황했다.
아델라와 내가 아는 사이라곤 생각한 적이 없어서, 사실 그녀를 부를 때도 그녀에게 ‘성녀’의 의무에 대해 얘기해 조력을 얻을 생각이었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동료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지만.
“…어머. 왜 다들 식사는 안 하고 계시지요?”
식도락을 즐기다, 뒤늦게 식탁 위가 고요함을 깨달은 아델라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이 무척 순수해 보여서, 데이지도 에일린도 입을 우물거리다 이윽고 픽 웃은 다음 식사를 시작했다.
아마 ‘미성년을 상대로 제가 무슨…’이라거나, ‘에휴. 어린애를 상대로 질투라니 꼴사납게…’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계속 되었다….
*
아델라.
성녀.
특이사항은 남성혐오, 동성애자.
여기까지 나열하고 나면, 과거의 트라우마 같은 게 그녀의 성적 기호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정답만 말하자면.
‘그런 건 딱히 없지요.’
없다.
아델라는 스스로 무척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삶의 굴곡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누구나 똑같지 않은가?
기껏해야 성녀로 각성한 후 길러준 양친이 그녀를 두려워 해 거리를 두었다거나, ‘성녀’라는 종교적 최고상징인 그녀를 이용하거나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수작들을 겪는다거나, 반 종교단체의 테러 위협을 받는다거나…….
겨우 그 정도.
물론 아델라 역시 그게 정말 ‘겨우’라고 치부할만한 일들은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성녀’라는 자신의 자리가 가진 무게와 책임 또한 알고 있었다. 평범한 소녀라면 겪지 않아도 되는 일도, ‘성녀’라면─ 여신의 총애를 받는 사도라면, 감내해야 하는 일임을.
그 때 아델라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불과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소녀는 어른이 되었다.
다만 그것이 아델라가 남자를 혐오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다. 여성을 좋아하는 성적 기호야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치더라도─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델라 본인은 자신의 기호가 선천적인 것이라 믿고 있기에─그것과 남성혐오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성폭행? 음심을 담은 남자들의 시선?
그런 것도 없었다. 성녀가 된 이후 성국의 중심, 여신을 모시는 대신전에 기거하는 그녀다. 당연히 그녀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이들 역시 극도로 한정적이며, 그들은 대개 성녀보다도 깊은 신앙심을 품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성녀님.’
그 말은 정말로 순수한 칭찬이고.
‘못 본 사이 많이 크셨습니다?’
이건 정말로 키가 많이 커서 뿌듯하다는 뜻이며.
‘성녀님은 훗날 좋은 신부가 되실 겁니다.’
어린 나이에 성녀라는 책임을 짊어지고 사랑 한 번 못해 본 그녀가 안쓰러워, 언젠가 그 책무를 내려놓고 진정한 사랑을 하길 바라는 진지한 덕담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착한 사람들도 무척 많네요.’
자연스럽게, 아무리 외부에서의 위협이 들어와도 성녀는 주변을 둘러싼 ‘선한 사람들’의 장막에, 세상을 혐오할래야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이 성녀의 주변을 순수하게 정화해주었으니까.
정작 그들이 기를 쓰고 지키려는 성녀는 이미 진즉 세상 돌아가는 바를 꿰뚫어 본, 속 검은 여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녀의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니다.
현실적일 뿐.
‘과분한 사람들이네요, 저한텐.’
양친에게 버림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이들을 만났다. 인자한 교황과, 엄격하지만 은근히 아껴주는 추기경과, 무섭긴 하지만 충성스러운 이단심문관들….
여하튼 아델라는 성녀가 된 이후 만나게 된 인간관계가 무척 만족스러웠다.
마음에 안 드는 흡혈귀 공작이 한 명 있긴 하지만.
그녀를 견제하려는 정치적 수작 같은 것들도, 교황이 나서서 막아주었다. 추기경이, 이단심문관이 나서 아델라는 지키는 검이 되었다.
테러 위협?
여신의 총애를 받는 성녀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니.
‘이만하면 축복 받은 인생이지요.’
트라우마? 두려운 과거? 그런 것 따위 없다. 세상을 평화롭게 하겠다는 거룩한 목표 또한 없다.
‘제 주변만 잘 살면 되는데, 굳이 무리해서 팔 벌릴 필요 없지요.’
흔히 성녀 하면 떠올릴 박애주의적 모습과는 괴리가 심하지만, 아델라는 당당했다.
‘제가 멀쩡히 살아있기만 해도, 그걸로 위안을 얻고 마음의 구원으로 삼을 신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함께 잘 살아가면 된다. 그게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일일테니.
아델라는 정말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뭐, 제 손 거들 수 있는 일이면 거들면 되는 거고…….’
무리하지 말자. 제 분수를 잘 알아야 한다.
건강하다면 건강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런 아델라가 어쩌다 남자를 혐오하게 되었느냐면.
‘───세상에. 공작보다 괜찮은 남자가 없다니.’
십사 세, 이제 갓 사랑이 무슨 감정인가 고민해볼 나이, 소녀는 경악했다.
이 대륙이 이토록 넓은데, 어떻게 저 웬수 같은 남자보다 나은 이가 없단 말인가!
딱히 남자를 자신의 짝으로 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아델라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였으므로.
다만 이것은, 연애 소설을 읽는 소녀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성녀’라고 함은 그만큼 뭇 남성들의 심장을 사로잡을 단어가 아닌가?
그러니 서점에서 유행하는 연애 소설을 사와 책을 펼치는 소녀의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본 것이건만.
아델라의 얼굴이 침통으로 물들었다.
‘그 남자’가 누구인가?
생긴 건 여신님 못지 않게 생긴 주제에, 하는 짓거리는 시정잡배의 그것과 다름 없다. 말투와 행동거지가 품위 있고 우아하면 뭐하나? 정작 그 내용물이 시궁창이거늘!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찬양하기 바쁘지만, 아델라는 속지 않는다. 악마가 다 뭐냐. 바로 그 남자가 악마다!
……성녀된 이로서 다른 사람을더러 함부로 악마라고 부르는 것은 무척 부주의한 행동이니만큼 생각으로라도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을 잠깐 반성하고.
아무튼 각설.
아델라에게 ‘스칼렛 체페슈’란 남자는, 도저히 사랑을 할 대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물론 첫만남부터 그러진 않았다. 최악에 가까운 만남이었으나, 풋풋한 소녀 아델라는 그 와중에도 여신님이라고 착각할만큼 아름답던 그의 얼굴에 확 꽂혔었으니까.
다만 이런저런, 온갖 일을 겪고 나니, 이젠 그냥 나이차 많이 나는 친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어떻게 공작보다 나은 남자가 한 명도 없을 수 있단 말이죠?’
너무 오랫동안 스칼렛과 알고 지내서인지, 아니면 스칼렛이 너무 편해져서인지, 아델라의 머릿속에서, 비록 연애 소설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자신과 어울릴만한 남자는 스칼렛보다 못나서는 안 됐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세상에 스칼렛보다 나은 남자는 없었다.
그에 견주는 여자라면 몇 명 있다는 것 같지만, 아무튼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럴 수가….’
아델라는 낙담했다. 남자란 과연 스칼렛보다도 못한 놈들 뿐인가…. 하찮구만…. 역시 내 짝은 같은 여자 뿐…. 여신님도 여성이시잖아? 역시 여자가 최고….
*
“조금 짜증나네요.”
“뭐가. 야, 그만. 때리지 마라.”
“좀 맞아주면 안 되나요?”
“뭔데, 갑자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