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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영애의 동생이 되었다-168화 (168/199)

〈 168화 〉 설원에 핀 꽃 (3)

* * *

깜짝이야.

시트리의 시답잖은 소리에 나 역시 적잖게 당황하긴 했지만, 누님은 그 수준을 넘어 거의 경기하듯 몸을 떨며 소리쳤다.

“누구, 누구, 누구 맘대로, 이 더러운 년이……!”

창끝이 시트리를 향한다. 시트리가 곤란하단 표정을 짓곤 나를 슬쩍 돌아봤지만, 딱히 내가 그녀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으므로─그녀가 처녀라는 사실에는 흥미가 동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슬쩍 뒤로 물러섰다.

「아…….」

정작 누님의 적대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아낸 시트리는 곤란하다는 기색으로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그나저나, 시트리……. 설마 사브나크가 자신의 영멸을 대가로 상위 서열의 대악마를 불러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당장은 이쪽에 적의가 없는 시트리가 소환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봐야할까.

“스칼렛! 어서 이리로 오렴!”

누님이 앙칼지게 외쳤다. 날카롭게 창끝에 맺힌 오러가 불길한 빛을 발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림자를 타고 누님의 옆으로 이동했다.

「흐으으응…….」

의미심장한 목소리. 시트리의 눈이 나와 누님을 번갈아 응시했다.

「두 사람. 보통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이네요.」

눈치도 빠르고.

누님의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창백한 피부에 선명하게 떠오른 홍조. 누가 보더래도 시트리의 말에 찔린 모양새였다.

「좋아요. 재밌는 사실도 알았겠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할까요?」

일부러 적의 없는 태도를 쭉 견지해온 덕에, 내가 이곳에서 결전을 벌이기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시트리가 먼저 몸을 물렸다.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면,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반대로, 쉬운 싸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격전 속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는 누님을 제외하면, 단순히 싸움의 여파만으로도 많은 사상자가 생길 터.

마찬가지로 시트리 역시 나와 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에 대한 기묘한 호감 덕분인지, 아니면 영멸을 각오하면서까지 싸울 생각은 없어서인지.

아마 둘 다이겠지만.

덕분에, 그림자를 일렁이며 경계하면서도, 싸울 의지가 없음을 넌지시 드러내니 시트리 역시 기세를 차차 갈무리했다.

“…….”

돌아가는 상황을 통해, 눈치 빠르게 나와 시트리 사이 무언의 거래가 오갔음을 깨달은 누님이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안녕히.」

전이의 문을 연 시트리가 천천히 몸을 옮겼다. 「천리안」을 통해 문 너머를 추적한 결과, 노스페라투의 성채가 보였다.

역시 그곳으로 가는가.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나는 「천리안」을 해제했다.

“누님.”

“흥.”

“……왜 그래.”

“아이리스한테 다 이를거야.”

“뭐를.”

“악마한테 헬렐레 했다는 거.”

내가 언제 그랬냐고.

그야, 처녀라고 하니까 눈길이 가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안 그랬어.”

“그랬어! 가슴도 막 흘긋흘긋 훔쳐보고!”

날조였다.

“게다가, 어? 악마인데! 막 그냥 보내주고!”

“그냥 보내준 거 아니야.”

“……그, 그래?”

제 가슴을 콩콩 두들기며 항의하던 누님의 기세가 살짝 꺾였다. 출렁거리는 건 보기 좋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안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접어두고,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선명한 분홍색 마력의 잔흔(??).

노골적으로 시트리가 남기고 간 흔적. 그리고 동시에, 노스페라투로 간 그녀가 허튼 수를 쓰지 못하게 내가 새겨둔 금제.

아까 전.

전장에 난입해, 시트리의 등 뒤를 점했을 때. 일대를 장악하던 시트리의 ‘영역’을, 나의 ‘영역’으로 역으로 장악을 시도했었다.

결과는 반반.

“그럼…….”

“대신 나도 당분간 힘을 좀 아껴야겠지만.”

시트리는 현세에 강림한 상태 이상의 힘을 축적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마계에서 자신의 군단을 불러오는 것 또한 불가능.

대신 나 역시 시트리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쉼 없이 마력을 소모해야 했다.

지금도 시트리의 등에는 나의 낙인─ 붉은 박쥐 한 마리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노스페라투면…….”

“글쎄. 그놈들이면 모를까, 시트리는 정말로 나랑은 별로 싸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마음에 안 들어!”

누님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게 뻔해 일부러 조금 말을 덜어내긴 했으나, 나는 내심 시트리가 나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후후. 제 흔적이 당신에게 남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지도요.

은밀하게 내게만 전하고 간 그녀의 전음.

거기에, 영역 싸움 중 은근히 내게 져주면서,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는 것을 대놓고 허락한 듯 보이는 태도.

‘원래 시트리가 이렇게까지 호의적인 여자였나?’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홀로 고민해봤자 나오지 않을 결론에 머리를 싸맬 필요는 없었다.

내게는 상의할 상대가 버젓이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응.”

“시트리가 날 좋아하는데 어떡하지, 같은 걸 나한테 묻는 거냐, 너는?”

“그건 비약이 너무 심한데.”

“그게 그거지─!”

탕탕! 누나가 탁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병약한 정령사 주제, 요즘 이거저거 워낙 잘 먹어서 그런가, 탁상이 찌그러지려 했다.

나중에 좀 튼튼한 걸로 구해다줘야 하나.

“후우우우. 아무튼 뭔데? 시트리가 착한 년처럼 구는 게 찝찝해?”

“찝찝하다고 해야하나. 그냥, 흠……. 뭐가 달라진 건가 싶어서.”

“아……. 나도 몰라. 고위 혈귀 빠순이라매? 원작에서 너는 안 나오고, 레티시아는 악역으로 나오는데, 시트리가 원래 그런 년인지 아니면 뭐가 달라진 건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원작에선 어떤데.”

“뭘 어때. 나쁜 년이지. 죽이고, 태우고.”

“비처녀였고?”

“그게 중요하냐고 시발럼아.”

중대사항이다.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작에서는 잃어버린 순결함이, 왠지 모르게 이 세계선에서는 유지되고 있다면, 그건 시트리가 원작과는 아주 다른 인물이 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몰라 씹새야. 걔가 비처녀인지 처녀인지 내가 뭐 어떻게 알겠냐고.”

“흠.”

“시무룩해지는 거 봐라. 솔직히 말해봐. 어? 좀 꼴렸냐? 꼴렸지?”

“아니라고.”

“씁. ……아니 근데 뭐. 원작이랑 다르면 뭐 어쩌게? 살려주게?”

사실.

내게 악마라는 종에 대한 악감정은 없는 편이다. 그저 그들이 마왕의 충실한 종이기에. 그리고 그 마왕이 언젠가 이 세계를 멸하고서, 내 소중한 이들마저 모두 죽이리란 것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심복인 악마 역시 적대시 하는 것 뿐.

그들이 저지른 죄악?

솔직히.

‘아무래도 좋긴 한데.’

처음.

내가 ‘스칼렛 체페슈’로 눈을 떴을 때. 그러니까, 백여년에 달하는 모든 기억을 잃고서, 체페슈의 저택에서 눈을 떴을 때에만 해도, 나의 도덕관념은 어디까지나 전생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면 달랐을 거다. 악마가 저지른 죄악에 분노하고, 경멸했을 터.

“…야, 괜찮냐?”

“어어.”

누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이 내 앞머리를 살짝 넘겼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누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때였다면.

지금은 다르다. 기억을 잃었다 해도, 백삼십년 가량의 세월은 내 몸에 경험으로 녹아있다. 애초에 전생의 도덕관념이 어쩌니 해도, 첫 살인을 저지른 후에 속 하나 울렁거리지 않은 나였다.

“괜찮지. 좀 피곤해서.”

“진조 주제에 피곤하기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러엄.”

누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한 듯 흠칫 몸을 굳힌 누나가, 이윽고 긴장을 풀고 내 어깨에 턱을 기댔다.

“뭐냐…….”

“좋으면서.”

그래. 너 잘났다. 누나가 중얼거렸다. 나는 들으란 듯 일부러 웃으며 송곳니로 누나의 어깨를 콕 찔렀다. “꺄악…….” 하이톤의, 깜찍한 비명소리.

송글송글 맺히는 핏방울. 흘러나오는 핏물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내 혓바닥을 타고 올라와 목구멍을 넘어갔다.

“윽, 흐…. 뭔데….”

끙끙 앓는 듯 약해진 목소리. 그녀의 긴 머리칼을 살짝 걷어내며 드러난 뽀얀 살결을 혓바닥으로 살짝 쓸면서, 낮게 속삭였다.

“그냥, 꼴려서.”

“미친 개씹변태모기새끼…….”

나는 웃었다. 누나의 말대로 나는 흡혈귀였다. 인간이 아닌 흡혈귀. 밤을 지배하는, 그림자 속 귀족.

그들의 왕.

위대한 진조…….

“야, 손, 손 어디 넣는데…….”

“옷 속으로.”

“그러니까 왜애!”

누나의 손이 내 팔을 밀어내려 애쓴다. 정령사치곤 강한 근력이나, 역시 내게 비할 바는 못 되기에, 그녀의 반항은 쉽게 제압되고 내게 뽀얗고 부드러운 젖가슴을 제공했다.

크기는 좀 작았다.

“씨발…….”

작게 투덜대는 여인의 욕설이 꼴렸다. 그랬다. 이 여자가 나의 소중한 이였다. 그녀 뿐 아니라 내게는 소중한 이들이 있었다. 나의 연인들이었다.

“너희만 있으면 되지 뭘…….”

“으흑, 뭐, 뭐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지 누나가 앓으면서도 되물었지만, 나는 대답 대신 송곳니를 다시 박아넣음으로 대답을 피했다.

마왕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렇기에 마왕은 나의 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행복을 망치는 짓이기에.

악마는 그런 마왕의 심복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나의 적이다. 허나, 만일 마왕의 심복이면서, 마왕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는 악마가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아이리스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떠오른다. 손에 들린 성검이 엄청나게 발광해대겠군.

성검. 성검이라…….

“으긋, 응, 아, 거기 하지마…….”

“작은 주제에 엄청나게 민감하네.”

“주겨버린다……!”

어느덧 열기 올라 달뜬 목소리로 애원하는 누나의 여린 몸뚱이를 탐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여신은 왜 나를 대리자로 택했을까.

하필 왜 스칼렛인걸까.

왜 환생이었을까.

“흐으, 흐으으. 야, 개새끼야…….”

“응.”

“아까부터 자꾸, 딴 생각만 하지……? 그럴 거면, 꺼져……!”

“…….”

뭐.

“미안. 이제부터 집중할게.”

일단, 삐진 누나를 달래는 데에 집중하도록 할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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