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결승 (6)
* * *
수백, 수천 마리의 마족.
대륙에서 가장 가혹한 환경으로 알려진 북부에서, 수 없이 많은 마족을 대공과 함께 참살했던 안나조차 본 적 없는 광경.
“이거, 잘못하면 여기서 죽겠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기가 질린 목소리로 로베르 백작이 중얼거렸다. 안나는 굳이 맞장구 치는 대신 검을 치켜세웠다. 칼날에 서린 오러가 한층 날카로운 예기를 띠었다.
《버티면.》
“음?”
“…버티면, 될 거예요.”
순간 안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의아해 했던 백작이, 얼굴을 붉힌 안나가 말을 바꿔 설명하자 “흠….”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렇단 말이지.”
버티면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과연 뭐가 된다는 말인가. 백작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믿었다.
어차피 믿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죽을테니까.
도망? 황제 폐하께 작위를 수여 받은, 명예로운 제국의 기사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흐흐. 젠장. 말년에 이게 웬 고생인가.”
“여기서 죽든 살든. 어느 쪽이든 명예로운 일이란 것은 확실하군.”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 안나의 눈동자가 뒤를 향했다. 블랙우드, 헤일리…. 그들과 함께 제국의 이름난 무가(?家)로 알려진 루펠드의 젊은 가주.
천년제국의 창이라 불리우며, 몇 년 이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것이라 평가 받는 루펠드 후작.
“명예는 무슨…. 죽으면 모두 끝인 것을.”
“나와는 달리 그대는 어차피 살날이 머지 않았을텐데. 이번 기회에 제국에 한 몸 불사지르시지.”
“어린 놈이 하는 말 하곤….”
늙은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젊은 후작은 무심히 창을 쥐었다. 나이 많은 백작이,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후작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놀아주곤 했으므로.
두 무인은, 그렇듯 전장의 한복판에서 서로를 향해 질타했다. 마치 평소와 같이.
「인간을 죽여라!」
──크오오오!
“저기, 저기요…!”
덤벼드는 마족. 그가 이끄는 마물의 무리. 여전히 투닥거리는 두 사람에게 한 마디 하기 위해 안나가 입을 열려던 그 때.
“흐읍!”
“쯧.”
검과 창이 한 곳을 공격하면서도 부딪히지 않고 매끄럽게 마족의 군대를 난도질하는 광경을 보며,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덤덤한 얼굴로 후작이 말을 덧붙였다.
“흠. 그대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놀려먹을 늙은이가 없게 되지 않나….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주시게.”
“싸가지 없는 것. 네놈 딸에게 달콤한 사탕과 초콜릿을 잔뜩 먹여주마.”
“…부인이 화낼텐데.”
실없는 대화. 허나 그 대화의 간극 사이, 쉼 없이 마족의 군단을 갈아버리고 있다. 안나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람 뿐 아니라, 이곳에 남아있던 이들이 착실히 자신의 자리에서 마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공녀님. 뭐하나? 어서 가 저기 저놈의 멱을 따버리시게.”
“…네.”
안나는 두 사람에게 뒤를 맡기기로 했다. 마족과 인간이 뒤엉킨 전장에서 벗어나자, 에일린 역시 마탑의 마법사를 뒤로 하고 그녀에게 합류했다.
“도울게요.”
“괜찮을까요?”
에일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동자에,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안나 역시 두말 없이 에일린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안나 개인의 힘으로, 악마 사브나크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혼자서는 버티는 것조차 못해.’
빠른 판단. 상대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꿰뚫는 안목.
비록 사브나크가 서열이 높지 않은 악마라고 하여도, 마스터조차 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적이다.
너무 큰 격차는 아예 가늠할 수 없듯, 사브나크와 자신의 격차를 정확히 파악해낸 것은 그만큼 안나의 경지가 현재 물 오른 상태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이에요.’
에일린은 속으로 감탄했다. 안나 못지 않은 재능을 지닌 그녀다. 이렇게 옆에 서 지켜보니, 안나의 성장세가 체감이 되었다.
당장 어제와, 또 오늘 아침과, 그리고 악마를 눈 앞에 둔 지금. 안나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리. 잘 지내봐요.”
“…네?”
에일린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안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앞뒤 없이 대뜸 그렇게 말하니 안나로썬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조만간 벽을 넘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랑 안면을 터서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아…. 감사합니다.”
“뭐, 그것도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겠지만요?”
에일린이 살짝 웃으며 덧붙였다. 장난스럽게 말하기는 했으나, 진심이었다. 이곳은 작지만 위험한 전장이었고, 차기 검상이나 마탑주로 불리우는 두 사람의 목숨마저 쉬이 꺼질 수 있는 곳이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다만 어디까지나 살아야 하기에,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기에.
장난스럽게, 함께 싸우게 된 전우에게 농담을 하곤.
그리고.
“버티기만 하면, 체페슈 공작이 와서 도와줄테니까.”
믿음.
악마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런 믿음이 두 사람을 진정시킨다. 울렁거리던 속을 진정시킨 안나가 몸을 낮추고, 사브나크를 향해 검극을 겨눴다. 동시에 에일린의 마법이 안나를 감쌌다.
‘가벼워졌어.’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몸을 가볍게 해주는 마법을 받은 안나의 몸이, 빠르게 쏘아졌다.
「본좌를 먼저 노리겠다?」
사브나크의 반응은 빨랐다. 뒤틀린 육신이 우드드드득─! 소리를 내며 그물처럼 펼쳐졌다. 가히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안나의 눈이 일그러졌다.
“징그러워…!”
오러가 피어올랐다. 악마를 향한 혐오를 양분 삼아, 여지껏 어느 때보다도 커다랗고 정순한 오러였다.
그물처럼 안나를 덮치는 살덩어리들이, 오러가 지나가면 부드럽게 잘려나간다. 까드드득! 잘려나간 단면이, 오러의 속성─ ‘빙결’에 의해 얼어붙었다.
“됐어…!”
그 광경을 본 에일린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와중에도, 중위 마법을 십수가지씩 펼쳐내며, 안나가 무리 없이 사브나크의 상대를 할 수 있도록 백업하고 있었다.
「시건방지구나!」
콰앙! 얇게 퍼지던 그물 모양의 살덩어리들이 뭉친다. 얼어붙었던 단면은 떨어뜨리고, 얼어붙은 부위를 잘라낸 다음 새롭게 돋아난 살덩이가 기괴히 꿈틀거렸다.
단면을 얼려 재생을 막았다며 좋아하던 것도 잠시. 오러의 속성인 ‘빙결’의 힘을 그토록 간단히 깨뜨린 악마의 저력에 에일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끄에에에엑─!
단면 틈 사이사이, 입처럼 벌려진 구멍 사이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윽…!”
안나의 몸이 휘청거렸다. 머리에 꽂혀 뒤흔드는 비명소리에 몸이 반사적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크읏…. 정신 차려요!”
소리를 이용한 공격에 당한 것은 똑같으나,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충격이 덜했던 에일린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안나를 덮치는 살점의 파도를 보곤, 곧바로 마력회로를 과부하 시킨다. 찰나의 순간, 미친 듯이 돌아가는 회로.
안나의 몸을 지키는 바람의 장막. 살점의 파도를 밀어내는 대지의 파도. 밀려난 살점 덩어리들이 다시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내는 불의 장벽.
덜컥덜컥덜컥…. 에일린의 몸에서는 부드럽고 빠르게 돌아가던 마력이, 마법의 발현을 위해 사용되는 과정에서 무언가 걸린 듯 뻑뻑해졌다.
‘마기…!’
사브나크의 마기.
정순한 마나와 완전히 정반대의, 마나를 오염시키고, 마법의 발현을 막는 악마의 힘.
에일린이 이를 악물었다.
더욱 회로를 가열시킨다. 억지로 마법을 발현시켜, 안나의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사방에서 안나를 노리는 살덩어리들 사이에서 그녀를 꺼내기 위한 공간마법.
“으으으으─!”
쿼드러플 캐스팅.
물론 중위 마법 이하라면, 에일린 수준의 마법사에게 있어 대단할 것 없는 일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병렬 사고를 통해 십수가지의 마법을 펼칠 수도 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마력회로를 과부하 시켜, 단 1초에서 2초 사이, 찰나의 순간에 가장 완벽한 캐스팅을 통해 안나의 몸을 빼내기 위해 쿼드 캐스팅을 성공시켰다.
그것도 사브나크의 영역, 그가 침식해 지배하는 공간 속에서, 안나의 몸을 공간 마법으로 빼내기까지 성공했다.
그것은 에일린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나타내면서.
“큽…! 쿨럭…!”
동시에 그녀 수준의 재능도, 아직 완숙하지 않은 지금은 감당하기 어려운 무리일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과부하 된 마력회로가 너덜너덜 해졌다. 아직 망가지진 않았으나, 몇 번 더 무리를 한다면…. 에일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마력 회로가 망가져도, 가문의 보물고를 뒤져보면 회복할 수단은 충분히 있을 터.
“정신 차려요─!”
그럼 지금은, 우선 눈 앞의 일을 해결할 때다. 에일린은 기껏 과부하 시킨 회로를 진정시키는 대신, 한층 더 빠르게 가열시켰다. 눈 앞이 붉게 물들었다. 무리한 마력 회로의 가열이 실핏줄을 터뜨린 것이다.
“크읏…!”
때마침 정신을 차린 안나가 검을 다잡았다. 에일린의 보조 마법이 재차 그녀에게 깃들었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사브나크가 끌끌 웃었다. 허나 악마의 속 역시 편치 않았다. 저 멀리서, 오싹할 정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주 멀리, 공간 마법이 없다면 이곳에 오기까지 수십분은 걸릴 거리임에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하고 소름 끼치는 힘.
악마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빠르게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악마의 우묵하게 파인 수십 개의 눈이 자신의 군세를 둘러보았다.
마탑의 마법사. 제국의 기사. 제국 내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악마의 군세와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본좌의 군세와 백중세인가…. 그렇다면, 우선은 그대들을 먼저 정리해야겠구나.」
사브나크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붉은.
섬뜩하고 불길한 색. 핏물이 사브나크의 육신을 분쇄했다.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붉은 용.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의 형상에 안나와 에일린이 당황하던 찰나, 용의 형상이 퍼엉! 소리와 함께 터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
마기.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의 기운이 섬뜩하고 불길하다면, 마기는 혐오스럽기에 불길하다. 마기가 용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고, 그 속에서 육신을 재생한 사브나크가 울부짖었다.
“흐읍!”
촤악!
「──크아아악!」
사브나크의 몸뚱이를 꿰뚫고 지나가는 한 자루의 창.
혈루(血?).
그것을 다루는 이는, 대륙에서 단 한 명 뿐. 안나와 에일린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들었다.
레티시아 체페슈.
“모두 괜찮니?”
그녀가, 스칼렛을 대신해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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