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결승 (5)
* * *
악마.
지금까지 스칼렛에 의해 그 계획이 몇 차례나 저지되고, 또 손 쓸 틈 없이 몇 개체가 소멸당하긴 했으나.
그들은 명실상부 마계의 지배자들이며, 단신으로 대도시 하나를 손쉽게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특별히 상성이 나쁜 아이리스나 스칼렛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들도 진체의 악마 하나를 겨우 감당해내는 수준.
“악마….”
안나가 침음을 삼켰다. 설마하니, 악마가 강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에일린 역시 낯빛이 창백하다. 허나, 둘 중 어느 누구 하나도 도망가고자 하는 기색은 없었다.
악마의 강림까지 예상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나, 어쨌든 스칼렛이 맡기고 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의 기대를 져버리고 싶지 않았다.
「인간.」
악마가 입을 열었다. 아니, 과연 입이라는 기관이 존재하는지 의심 될 정도의 외형을 지닌 악마의 목소리는 오히려 전음에 가까웠다. 악마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머리에 꽂히듯 들려왔다.
“크읏.”
머리가 뒤흔들린 것 같은 자극에 안나가 이를 악물었다. 정신방벽을 강하게 쳐둔 에일린은 안나보다는 덜해보이나, 머리가 살짝 울렸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의 두 눈이 두 사람을 향했다.
「너희가 이들의 대표인가?」
“질문의 저의가 뭐지?”
악마의 질문에 순순히 답하는 대신, 안나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검을 그러쥐었다. 명백한 경계, 그것을 넘어선 적대에 가까운 태도에도 악마는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들이라 함은, 아마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 안나가 악마와 대치하는 사이, 에일린은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호기롭게 나서려 하는 생도들.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정체는 몰라도 괜히 나서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는 상인들.
그리고 언제든 안나와 에일린을 도와 악마와 싸우기 위해 경계 태세를 갖춘 귀족들.
자신과 함께 온 마탑의 마법사들.
‘…도움이 될까?’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에일린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중, 누가 악마와의 싸움에서 유의미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마탑의 마법사들이라면, 에일린이 펼치는 마법의 보조를 맡으면 된다.
이름난 제국의 기사들이라면, 에일린의 전위를 맡고, 안나의 부담을 덜어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에일린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끝났다.
「음.」
악마의 눈동자가 안나와 에일린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에일린과 생각이 겹친 안나가 외쳤다.
“지금─!”
안나의 몸이 튕겨나갔다. 가속조차 없이, 순식간에 악마의 앞에 도달해선, 오러를 피어올린 검을 휘둘렀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쉬이 봐주진 않겠다.」
콰앙! 주먹으로 안나의 검을 쳐낸 악마가 발을 굴렸다. 마기를 퍼뜨려, 에일린의 마법 행사를 막으려 들었다.
“어딜…!”
안나 역시 오러를 방출해 악마의 마기를 막아냈다. 그럼에도, 진체로 강림한 악마의 마기를 온전히 막아낼 순 없었다. 침식의 속도를 늦출 뿐.
에일린은 이를 악물었다. 악마의 마기가 침식하는 것보다 빨라야 했다. 눈을 감은 그녀의 머릿속에, 방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특성, 「걸어다니는 도서관(S)」의 권능 중 하나.
기억하고 있는 마법진 중 몇 가지를 스톡 형식으로 쌓아두곤, 언제든 즉발형으로 쓸 수 있는, 마법사─ 그 중에서도 배틀 메이지에게는 더없이 강력한 특성.
파앗─! 눈을 뜬 에일린의 손을 통해 마법이 발현했다. 미리 저장해두었던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이, 대규모로 펼쳐지며 사람들을 감쌌다.
“뭐, 뭐냐, 이건?”
“마법?!”
전조도 없이 즉발로 발현된 마법에 감탄과 경악이 뒤섞인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거라면 문제 없겠지, 라며 안심하는 상인들과, 자신들 역시 마법의 대상임을 눈치 채곤 아쉬움에 한탄하는 생도들.
“가만히 있어요…!”
에일린이 이를 꽉 물었다. 사람들이 섞여 있어, 그 중에서도 전투에 도움이 될 이들을 골라내는 데에 애를 먹었다. 쿨럭…! 올라오는 피를 도로 삼키곤, 기어코 완벽히 사람들을 분류해냈다.
“이제 됐어──!”
에일린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공간 이동의 대상에서 제외된 마탑의 마법사들이 에일린의 마법을 보조했다. 마찬가지로 남게 된 제국의 이름난 기사들 또한 따라 뛰쳐나왔다.
“좋아…!”
화아악─! 빛무리와 함께 생도들과 상인들이 이 공간을 벗어나고, 전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 안나가 검면에 오러를 환하게 피어올리자.
「흐읍…!」
쿠우웅! 쿠웅! 악마가 땅을 쿵쿵 밟아댔다. 단순히 발을 구르는 수준이 아니라, 한 번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지면이 쩌적 쩌적 갈라졌다.
“으아앗…!”
“레비테이션을 써라!”
자연스럽게 몸이 흔들린 마법사들이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빠르게 공중부양으로 허공으로 떠오르는 몇 초 사이.
「나를 방해하지 마라─!」
콰아아앙! 악마가 부리는 마법이 발현했다. 드래곤의 용언 마법과, 인간이 부리는 마법과는 전혀 다른 법칙의 재현.
불길한 마기가 전방위를 향해 포탄처럼 쏘아짐과 동시에, 갈라졌던 대지의 틈 사이로 마기가 불길처럼 일렁이며 올라왔다.
“크으읏…!”
매직 미사일.
매직 쉘.
수십 개의 마기의 탄환을, 마찬가지로 마력으로 만들어낸 탄환으로 상쇄시킨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검은 불꽃은 마법 장막으로 막아냈다.
에일린이 재빠르게 마법으로 막아내는 그 틈을 안나가 파고든다.
“하아…!”
크로이체프 류.
반월(半月).
카가가가가각! 내리친 검격을 두껍게 마기를 둘러씌운 손등으로 쳐낸 악마. 악마의 손등이 찢어져 핏물이 흘렀다.
퉁! 악마가 마기를 실어 팔을 흔드는 것으로 검격을 쳐낸다.
안나가 뒤로 가볍게 물러나곤, 자세를 바로잡았다.
“후우….”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흔들리는 땅 위에서도 마법을 펼쳐낸 에일린이 맞받아치긴 했으나, 그것은 에일린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그마저도「천리안(S)」이 있었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라, 무리한 그녀의 입가에 다시 핏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안나 역시 정면에서 폭발적인 마기를 받아낸 것으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응축된 탄환만큼은 아니어도, 짙은 마기의 방출은 그 자체만으로 폭력이기에.
「이놈들….」
시커먼 빛의 악마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목구비의 구별이 없기에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안나는 그것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뭘 잘 했다고.’
안나는 그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다. 먼저 쳐들어와 놓곤 짜증을 낸다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허나 그것은 안나 개인의 감상일 뿐. 그녀의 속마음을 모르는 악마는 말을 이었다.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내가 누군인지 알고도 이리 시건방지게 굴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찮은 인간놈들아.」
우르르릉!
악마의 분노 서린 목소리와 함께 천둥이 쳤다. 에일린이 올려다 본 하늘은 맑았다. 벼락이 치려는 조짐조차 없었다.
그것인즉 악마는 단순히 그 분노를 표하는 것만으로 천둥을 울리게 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이게 악마의 진체….’
마스터 클래스, 혹은 아크 메이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맞상대가 불가능한 수준의 적.
20위권의 상위 서열쯤 되면, 마스터 클래스가 둘이어도 감당하기 벅찬, 그야말로 파괴의 화신 그 자체.
「본좌의 이름은 사브나크.」
파직, 파지지직….
악마의 주위로 약한 정전기가 일었다. 불길한 어둠이 불꽃처럼 피었다. 그림자가 물감이 번지듯 바닥을 물들였다.
“으, 으윽….”
“다들 정신 차려!”
마음 약한 마탑의 어린 마법사가 먼저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에일린이 소리를 높였으나, 불안함이 전파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어졌다.
「마왕 폐하께 마흔네 번째 자리를 부여 받고서.」
안나의 표정이 굳었다. 검을 쥔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포보다는, 적개심과 증오로 불타올랐다. 에일린 역시 표독스럽게 사브나크를 노려보았다.
「너희의 세계를 침략하러 온 선봉대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폭언이며, 선전포고다. 사브나크는 보란 듯 선전포고를 끝내곤, 징그럽게 일그러진 입꼬리를, 아니, 과연 그것이 입이 맞는지조차 의문인 기관을 씨익 올렸다.
그리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껄껄껄…, 긁는 듯한 목소리에 모두가 불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자세 하나만큼은 봐줄만 하군.」
허나.
「누가 감히 폐하께 세례를 받은 본좌를 향해 적대심을 표해도 된다고 하였지?」
콰앙! 사브나크의 몸뚱이가 움직였다. 꿈틀거리던, 미상의 형태를 지니고 있던 그의 육신이 순식간에 강건한 형태를 갖추곤, 안나를 향해 쇄도했다.
“어딜…! 흐읍!”
“앗…?!”
카앙! 카가가가각! 안나가 검을 휘둘러 맞서기 전에, 둘의 사이에 끼어든 기사가 있었다. 절묘한 흘려내기. 일신의 무력만으로 백작위를 얻어낸 남자.
황제에게 푸아트령을 하사받고, 제 가문을 백작가로 만들어버린 용사, 로베르 백작. 비록 마스터 클래스에는 못 미쳐도, 제국 내에서도 그 무력을 폄훼하는 이는 없다.
“이 빌어먹을 것. 내 오러는 아예 씹어버리는구만…!”
성질을 부리듯 으르렁 댄 로베르 백작. 사브나크의 일격을 흘려낸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보아하니 두 공녀의 오러 아니면 상처를 못 입히는 것 같은데…. 맞소?”
“…확실하지는 않지만. 예.”
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스칼렛이 그녀에게 남으라고 했던 이유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스칼렛이라면, 무엇이든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군…. 알겠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 다른 이들 역시 수긍했다. 체페슈 공작의 전언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숫자라면 할만하겠지.”
로베르 백작이 말했다. 이번에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악마는 잠깐 고민했다.
왜 내가 혼자 상대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오라. 나의 군세여.」
주인의 부름에 따라 나타나는 수백의 마물, 마족의 형세.
안나는 그만 툭 뱉고 말았다.
《씨발.》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북부의 말이었기에. 알아들은 사람은 없을테지만.
아무튼 안나는 욕을 뱉었다.
씨발.
스칼렛님. 이거 진짜 제가 할 수 있는 일 맞나요?
대답은 딱히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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