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결승 (4)
* * *
한편.
스칼렛이 오스카를 상대하던 그 때.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아카데미는 안전한 거 아니었어?”
“대륙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아카데미에 테러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의문.
“그래도 공작 전하가 직접 나섰으니 금방 해결 될 테지.”
“공작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이곳에 또 테러가 벌어지면 어떡하나?”
“무슨 그런 불길한 소리를…!”
“걱정이 되니까 그러지….”
불안.
“야. 우린 어떡하냐? 가만히 있어? 나서야 되는 거 아냐?”
“씁.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공작 전하가 크로이체프 공녀한테 여기 남아 있으라 한 거 못 들었어?”
그리고,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어린 생도들.
에일린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나서서 진정하기를 호소해도, 그들은 소수. 그들만으로 통제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떡하지. 말을 안 들어….”
“탑주님. 저희가 아무리 목청을 키워도, 이 많은 숫자를 한 번에 통제할 순 없습니다.”
차라리 마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언가의 여파로 대기 중 마나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가급적 마법을 쓰는 건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체페슈 공작이라면 이토록 어지러운 마나의 흐름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을 발현할테지만.’
에일린이 난처해 하던 그때.
“돕겠습니다.”
안나가 에일린의 곁에 섰다. 스칼렛과의 전투로 지쳤던 육체는 잠깐의 휴식으로 이미 만전에 가깝게 회복되었다.
애초에 소모가 큰 싸움이 아니기도 했고.
“모두 들으십시오─!”
쿠웅!
안나의 발이 땅을 굴렀다. 농밀한 마력이 일대를 휘감았다. 일대를 침식하던 기이한 마나의 흐름이 깨져나가고, 이윽고 정상적인 형태를 되찾아간다.
“…!”
에일린의 시선이 안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 담긴 질투, 그리고 경악.
‘그 사이 또 성장했어…?’
일그러지고, 뒤틀린 마나의 흐름. 평범한 마법사라면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을 끄집어내는 순간, 비정상적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회로가 과부하 해 타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리 육체를 단련한 기사라지만, 단순한 마력의 방출로, 그 반발을 무시한 채 그 흐름을 되돌려놓은 것이다.
‘기교는 없었어.’
에일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추측대로, 안나의 마력 방출에, 마나의 흐름을 어떻게 제어해 정상화 하기 위한 복잡한 기교는 없었다.
그저 강렬한 힘의 폭발.
아마 이 일대가 완전히 침식되어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을테지만.
다행이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안나의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아무튼.
정작, 이곳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을 구했을 안나 본인은 그것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큼큼 목을 가다듬곤.
“이곳을 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옛말에 ‘필사즉사 필생즉생’이라고 했습니다!”
“반대 아냐…?”
에일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들도 고개를 기울였지만, 뭐가 잘못 됐는지 모르는 안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뭉치면 살 것이고, 흩어지면 죽을 겁니다! 크로이체프와 프리드리히가 여러분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니 당황하지 마시고,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중앙의 말에 어느덧 익숙해진 안나이긴 하나,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속담까지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선가 들은 것은 있어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말한 것이었다만.
“저기. 공녀….”
“아, 네. 프리드리히의 가주님이십니까?”
“네. 부끄럽지만….”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알고 있거든요….”
안나가 입을 다물었다. 두 여자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에일린은 괜히 말했나 싶었다. 그래도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다가, 이 사람이 또 다른 곳에서 같은 실수를 하면, 괜히 자신의 잘못이 되는 것 같아서.
“…아, 아! 그, 그, 그렇군요…. 하, 하하. 대륙 끝, 동방의 속담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제가 아직 중앙어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러시구나….”
두 여자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꾸벅, 목례를 하고, 각자 맡은 바를 위해 뒤돌아선 두 여자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괜히 얘기했어…!’
‘쪽팔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안나의 분투가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에 와닿았단 것이리라.
“의외로 허당인데? 처음 봤을 땐 완전 냉랭해 보였는데. 항상 옆에서 대신 대답해주는 시종도 있고. 말도 한 번 제대로 못 붙여봤다야.”
“그 시종이 북부 유력 후작가 영애라던데?”
“뭐? 그런 사람이 왜 시종 노릇을 해?”
“모르지 나야. 공녀랑 소꿉친구라긴 하더라.”
북부에서 내려온 이후,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샤를 제외하면, 스칼렛과 데이지, 레티시아, 아이리스 정도를 제외하면 알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던 안나다.
처음엔 서투른 말투 탓에. 그리고 어느덧 중앙의 말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스칼렛 정도가 아니면 입을 여는 게 어색해져 버린 탓에.
덕분에 아카데미 생도들은 안나가 입을 여는 것 광경 자체가 꽤 생소했다.
이번 일이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테니, 안나에게는 좋은 일이리라.
“저 영애가 바로 다음 대의 ‘검성’….”
“대공이 말하기를, 수년 내로 자신을 추월할 재능이라고 하더이다.”
“허어…. 처음에는 영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여겼거늘, 지금 보니 아주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지.”
“제국의 미래가 밝구만.”
이쪽은 서열전을 참관한 귀족 중, 마법이든 무술이든, 어느 한쪽의 무력에 통달해 이름을 날리는 이들.
변방의 남작가에서, 그 무력과 전공을 인정받아 백작가로 승작된 이가 있고.
대대로 그 힘을 이어 제국 내 명실상부한 무가(?家)로 인정 받은 가문의 가주가 있다.
“북부는 향후 수십, 수백년은 더 안정된 상태겠어.”
“북부는 혹한의 추위만 아니라면, 대륙 어느 곳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자원의 보고….”
“광산은 드워프들의 나라와 비견할만 하고, 대호수의 마력과 비슷한 ‘순수함’을 품은 호수도 있지.”
“쓰읍. 북부에 돌릴 예산을 늘려야 하나.”
이들은 제국에 내로라하는 거상들이다. 황실의 인가를 받아 은행업을 하는 이들부터, 체페슈, 프리드리히, 혹은 그 외 공작가의 후원을 받아 운영 되는 상단의 주인들.
이곳에서, 안나는 확실하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부, 부럽다.’
에일린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야 물론, 이건 순수하게 안나가 기회를 잘 잡은 것이기도 하고, …딱히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걸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체페슈 공작께서 맡기고 가셨는데.’
제국의 내로라하는 거상도, 이름을 날리는 무가의 가주도.
모두 프리드리히에 비하면 그 빛이 바랜다.
오직 한 사람. 체페슈의 가주, 스칼렛. 다른 누구보다도, 그의 인정이 절실했다.
크로이체프. 설원을 지배하는 검의 명가. 그들 역시 프리드리히와, 체페슈와 대등하긴 하나, 다만 어디까지나 검의 명가.
마탑의 차기 탑주로써, 에일린이 필요로 하는 것은 스칼렛의 인정과 도움이었다.
프리드리히의 가주가 체페슈의 가주에게 매달리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 프리드리히는 제국을 지탱하는 일곱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세 가문의 하나이다.
그런 가문의 주인이 되어서, 그 권위를 깎아내려서야 되겠는가. …같은 말들을 들을 때마다, 아니, 감히 프리드리히의 가주에게 그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간단하게 줄여 번역하면 그렇게 해석이 가능해지는 질문을 받을 때면, 에일린은 대답했다.
‘우리 아빠 친구한테 도와달라고도 못해? 그럼 너네가 좀 도와주든가!’
그렇게 말하면, 감히 그녀의 권위에 은근히 도전하던 어린 놈들은 안색이 하얗게 되어서는 도망가곤 했다.
에일린이 표현하는 ‘도와달라’는 건, 그녀가 아크 메이지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일테니까.
자신조차 아크 메이지의 경지를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어찌 다른 사람이 아크 메이지가 되게끔 돕는단 말인가.
‘허허. 어린 친구들의 치기이니 용서해주시지요.’
그 과정을 지켜보던 마탑의 늙은이들은, 허허 웃으며 에일린을 달랬다.
체페슈 공작이, 전 프리드리히 공작의 오랜 악우라면, 마탑의 원로들은 아버지의 오랜 동료이자 제자들.
그 중 몇몇은 미숙하나마 아크 메이지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했다.
실로, 현재 에일린의 지지 기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이들이다. 마탑의 원로들이 에일린을 흔들리지 않고 지지하기에, 아직 아크 메이지에 도달하지 못한 어린 그녀가 어렵지 않게 마탑주의 자리를 확고히 했으니.
아무튼. 그런 영감들이 에일린에게 말한 것이다.
‘체페슈 공작의 도움은 꼭 받으셔야 합니다.’
‘저희의 백 마디보다, 체페슈 공작의 한 마디가 탑주님의 경지를 한층 진일보 시킬 겝니다.’
반드시, 체페슈 공작을 어떻게든 꼬셔야 한다고.
‘그러니까 여기서 잘 해야 눈도장을 찍을텐데….’
살짝 초조해진 에일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전에 마탑에 초대하겠다고 했을 때 받아들여주긴 했으나, 이번 일을 통해 확실히 눈도장을 찍고 호감을 사는 편이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떡하지…. …어?’
순간.
사람들을 이끌어 폭발의 여파로 엉망이 된 주변을 정리하던 안나의 주변에, 강렬한 마나…, 아니, 마나라기엔 무척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에일린이 손을 뻗었다.
“피해──!”
“…?!”
안나는 피하지 않았다. 에일린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는 대신 자리를 지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했다.
‘내가 피하면 다른 사람들이…!’
안나가 다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중상.
안나가 중상을 입을 정도면 다른 사람은 죽는다.
그 당연한 진실에, 안나는 피하는 대신 방어를 택했다.
“큿!”
에일린은 혀를 찼다. 안나의 의도를 이해했기에, 공격을 위해 빠르게 회전하던 마력의 흐름을 살짝 바꾼다.
순식간에 손바닥 위로 그려진 마법진. 종, 횡, 얽히는 마력의 회로, 과부하 없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완성된 마법진이 발현했다.
북풍의 가호.
지금 상황에서, 가볍고 유려한 검술을 자랑하는 안나에게 가장 적합한 버프.
가호가 안나에게 적용됨과 동시에, 허공이 찢어졌다.
“──!”
타앙!
강력한 마탄. 눈을 번뜩이며 그것을 쳐낸 안나가 신음하는 사이, 찢어진 허공의 너머, 긁는 듯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치가 빠르군.」
“…!”
“크윽…!”
단순히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웅웅 울린다. 불쾌감에 눈을 찌푸린 안나의 시야에,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공을 찢고, 공간을 넘어, 차원의 저편에서 드러난 형형색색의 눈동자. 긴 손톱과, …그리고.
“저게 뭐야.”
강렬한 압박에 어깨를 움츠렸던 에일린의 중얼거림.
그 말대로.
「과연.」
눈동자와 손톱. 찢어진 듯 쭉 늘어나는 입. 그리고 날개, 꼬리. 드러난 몸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그 정도 뿐.
저것이 과연 살아있는 생명체인지.
마법사. 그 중에서도 특출난 ‘눈’을 지닌 에일린의 시선에,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것이다.
“악마…!”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에 ‘진체’로 강림한 악마.
혐오와 증오를 먹고 사는 이계의 침략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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