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중간 시험 (2)
* * *
아이리스와 데이트를 즐기거나, 누님과 기숙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뒹굴거나, 데이지를 데리고 크리스티나와 만나러 가 두 사람 몰래 손장난을 치거나….
그런 나날들을 보내니, 시험 날이 되었다.
말만 늘어놓고 보니 한량 같이 놀기만 한 놈이 된 것 같은데.
실제로도 한량 같이 놀기만 하긴 했다.
아이리스랑 데이트 하는 게 일이라면 일이겠으나, 적어도 데이트 할 때에는 그런 감정을 품지 않으려 했고.
아이리스에게 무척 실례되는 행동일테니까.
“오라버니.”
‘고대마법’의 시험날.
시험장에서 만난 아이리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소문이 생각보다 퍼지지 않고 묻혔다곤 하나,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나와 아이리스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다 알고 있을 터였다.
특히 그 날 함께 자리에 있었던 생도들은 더더욱이나.
그러니 아이리스가 내 옆에 서자, 생도들의 시선이 은근히 모였다.
대놓고 이쪽을 쳐다보지는 못 하는 것 같지만.
“아이리스.”
흡.
숨을 삼키는 생도가 보였다.
아이리스가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건 못 들은 모양인데.
아무튼 지난 그 날 이후로 나와 아이리스는 서로를 부를 때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행동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 정도나마 했기에 소문이 이 정도라도 퍼진 거라고 해야할지.
아이리스의 상대가 내가 아니었거나, 내 상대가 아이리스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다들 입 단속을 하려들진 않았을텐데.
아무래도 지체가 너무 높다 보니 알아서들 입을 다물게 되는 모양이었다.
“준비는 잘 했나요?”
“오라버니가 알려준 덕분에요.”
푸근하게 웃는 아이리스.
첫 날 신입생 대표로 단상 위에 섰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때와는 참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뭐가 달라진 거지? 하겠지만.
아이리스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지하는 ‘자애롭고 다정한 황녀’의 모습을, 내 앞에서는 억지로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좀 더 자연스럽게 웃고, 자연스럽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내 앞에서는.
그런 면이 좋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보여주지 않는 자연스러운 면모를, 오직 내 앞에서만 보여주는 소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 시험 결과가 잘 나오면.”
말하다 잠깐 머뭇거린 아이리스가, 내 귓가에 소근댔다.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제 쪽에서 들어주는 게 아니라요?”
보통 이럴 땐 시험 잘 쳤으니까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나?
의아하게 바라보니, 아이리스가 후후, 작게 웃곤.
“오라버니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잖아요.”
흠.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아이리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조교를 대동한 교수가 시험장으로 들어왔다.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조교가 생도들에게 시험지를 나눠줬다.
그간 배웠을 고대마법의 이론들이 빽빽하게 시험지의 면을 까맣게 채우고 있었다.
고대마법의 식 자체를 '감응'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나는, 복잡한 수식을 보자마자 식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떨까 싶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어느새 자리를 멀리 띄운 아이리스를 흘깃 쳐다봤다.
“으으응….”
조금 어려워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나름 잘 풀어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 볼까.
1번 문제.
두 개의 수식이 결합 했을 때 그려지는 마법식을 표현하시오, 라.
답란 위로 손을 뻗었다.
감응해본 바 ‘소리’와 ‘증폭’의 수식이었으므로, 두 개의 식을 분해 후 재결합….
‘확성’ 마법의 식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후, 나타난 마력 배열이 종이 위로 스며들었다.
‘1번 문제라 쉽게 낸 건가.’
아니.
이 두 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나라서 쉬운 문제일 것이다.
여태껏 거의 대부분의 고대마법은, 식의 뜻조차 해명되지 못한 채 보존만 되고 있었을 뿐이니까.
아마 이 문제에 나온 ‘확성’의 마법식조차도,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밝혀낸 것이리라.
‘그럼 문제의 목적이 단순히 마법식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게 아니라는 건데.’
즉.
학사 수준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수많은 석학들이 단서 없이 머리를 들이박아 겨우 마법식 하나의 뜻을 밝혀내는 게 작금의 고대마법 학계인데, 일반 학부생에게 마법식의 해석과 결합을 요구할 리가 없었다.
그럼….
‘암기력 테스트인가?’
유추할 수 있는 건, 이미 이 마법식을 강의 중에 가르쳤고, 순수하게 강의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지 확인하는 문제일 것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2번 문제부터는 마법식의 해석 후 결합시키라던 1번 문제와 달리 마법식을 최대한 '분석' 해보라는 문제였다.
결합의 결과를 요구하는 1번 문제와는 달리, 최대한의 노력을 요구하는 2번 문제는….
나한텐 더 쉬웠다.
분석할 것도 없이 바로 답이 나오니까.
어떤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어떤 방식으로 분석해야 답이 나오는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괜히 시험 하나를 날먹하는 기분을 느끼며, 2번의 답을 시험지 위에 투영했다….
*
시험이 끝나고, 나와 아이리스는 약속했단 듯 나란히 시험장을 나와 자연스럽게 산책 하듯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괜히 대륙 최고의 교육 기관이 아니라는 듯 훌륭하게 조성 된 산책로.
원래 꽤 많은 생도들이 오가는 곳임에도, 나와 아이리스가 다닐 때면 한적해지곤 했다.
나는 딱히 손 쓴 적이 없으므로, 아이리스가 손을 쓴 것인가…. 라고 생각하기엔, 크리스티나와 함께 이곳을 올 때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드물어지곤 했다.
그럼 역시 내가 문제인가?
개인적으로 손을 댄 적도, 아니, 애초에 손을 쓰기는커녕 입조차 연 적 없는데 어째서 나를 피하는 것인지.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개인 시간을 보장 받을 수 있으니까.
인지도 있는 사람들이, 뒤를 쫓아다니는 사생으로 인해 사생활을 침해 받는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되려 다들 나를 피해 혼자의 시간을 보장 받는다는 건 장점이 아닐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오라버니?”
“아이리스.”
“네에.”
가령.
“여신님이랑 대화를 하고 싶은데.”
“여신님이랑요?”
누구의 앞에서도 쉬이 할 수 없는, 이런 얘기도.
그림자를 퍼뜨려 주변을 훑는 것으로, 혹여나 있을 엿듣는 귀도 차단했다.
“…여기서요? 제 기숙사에 가서 해도 괜찮은데….”
우물쭈물.
내 눈치를 살피며 그리 말하는 아이리스. 눈동자에 은근히 깃든, 기대와 걱정, 그리고 경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겁 먹고 있으시잖습니까.”
“읏.”
아이리스와 나의 사이는 정상적으로 교제하는 남녀의 사이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그 마음이 진실 되고, 진지한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런 아이리스를 이해했다. 그녀는 내 사정에 맞춰주고 있는 것 뿐이니까. 좀 더 여유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뭘요.”
아이리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손목에 손바닥을 감싸고는, 나를 슬쩍 올려다 봤다.
“뭐라고 전달할까요…?”
“음.”
나는 턱에 손을 올리고 고민했다.
뭐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기억을 잃긴 했지만, 오랜만입니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는지 아이리스가 잠시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에. 오랜만이라구 하셔요.”
“제가 기억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급하게 알아둬야 할 건이 따로 있거나 하지 않은가도 여쭤봐주세요.”
“…. 여신님이 기억하시기론 딱히 없다고….”
그런가.
“제가 아이리스랑 사귀는 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요.”
“엣.”
아이리스의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그런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다.
제국을 비호하고, 성국의 섬김을 받으며, 대륙 전체에 그 영향력을 끼치는 여신이다.
그 말은, 언젠가 내가 진조(?)로써 대륙의 태양이라 불리는 제국에 견주는 존재만큼 위상이 올랐을 경우, 제국과 황실을 비호하던 여신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것.
게다가 여기서 내가 황녀이기 이전에, 여신의 화신이나 다름 없는 용사 아이리스마저 아내로 들인다면?
내가 마음을 착하게 먹으면 모를까, 조금만 수틀리면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져버릴 것이다.
성국의 추기경 중 흡혈귀가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흡혈귀를 비롯한 인외종은 대부분 달의 총애를 받는 종족이니까.
물론 내가 마왕이랑 영혼의 막고라까지 뜨고, 기억까지 잃었는데도 내 뒷통수를 때리진 않겠지만.
아무튼 용사인 아이리스와, 진조로 각성해 언제고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아우르는 제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나의 결합을 여신이 어떻게 생각할 지 알아둬야 할 것 같으니.
그런 의도를 담아 물어보자, 아이리스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셀루나랑 바람 나면 가만 안 둔다고 하시네요.”
….
뜬금 없이?
“바람이요?”
“‘달의 은총’…, 이었나요? 오라버니가 고대 마법 강의 때 사용했던 거요.”
“그게 왜요?”
“그 정도는 여신님이 내려줄 수 있으니까 앞으로 그거 쓰지 말래요.”
“….”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이게, 조금, 불경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라버니?”
“혹시 여신님께 저 좋아하시냐고 여쭤봐──.”
번쩍!
아이리스의 손목에서 빛이 마구 발광하기 시작했다.
“꺅! 꺄악! 여신님! 귀 아파요! 귀! 으앙! 그렇게 말씀하셔도 오라버니는 못 들어요!!”
아무래도 날 좋아해서 한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그러게 바람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왜 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