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327화 (327/358)

〈 327화 〉 322. 챠르의 마음을 풀자 (3)

하지만 강민은 그 날 이후 챠르를 만나는 걸 피했다. 핑계는 다양했다. 게이트를 연 사실에 대해 성당 기사단에 보고해야 한다, 후유증으로 박성연에게 치료받는다, 집 관련 세금 문제로 세무사 만나는 중이다- 그럴싸하게 들리는 핑계였기에 챠르도 어쩔 수 없었다.

'아휴, 이게 며칠 째인지-'

한숨이 나왔다. 싸우려는 태세를 취했지만 강민이 만나주지 않자 날카로운 분위기도 점점 무뎌져갔다. 강민은 그 틈을 파고들어 놀러 다니라고 샤를과 여자친구 한 명씩을 붙여줬고, 신용카드도 건넸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을 즐기라는 거고, 속내는 자신을 구슬리려는 속셈이겠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즐거웠는걸. 다른 여자친구들은 잘못이 없으니까 매몰차게 굴기도 미안하고.'

못 이기는 척 놀러다녔다. 남산 케이블카, 광화문, 서울 갤러리아, 명동,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콘래드 스위트룸-.

'수영장이 진짜 진짜 대단했지. 야경도 예쁘고, 침대도 푹신하고 호텔 조식은 얼마나 좋았는지.'

마계에서의 식사라곤 물과 거의 차이가 없는 스프, 찐 감자, 축일에 기껏해야 달걀. 그런 생활을 해왔던 챠르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강민의 여자친구들은 시골 어르신 왔을 때 모시고 다니는 셈 아닌가? 하고 망설였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챠르는 마계 촌놈이었으니까.

"다음번엔 어디에 데려다 달라고 할까?"

챠르는 즐거운 추억들을 떠올리다가, 사이사이에 끼어 있던 여자친구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강민... 그래. 나한테 잘 해주는 건 좋아. 하지만 같이 보내는 여자들은 왜 다 그 꼴로 오는 거야?'

영선의 목에 진하게 남아있는 키스마크. 미카엘의 짧은 숏팬츠 사이로 힐끔힐끔 드러나는 매직으로 쓰인 지저분한 낙서, 유다의 다 지워진 립스틱, 예림의 스커트 아래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강민의 향수 냄새, 노브라로 돌아온 아나이스.

자신과 동행하는 여자마다 강민과 진한 섹스를 암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약올리는 건가?

물론 강민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챠르와 샤를 사이에 낀 나만 손해야! 라고 외치던 여자친구들이 보상을 당겨 받은 것 뿐.

물론 적나라한 섹스의 흔적을 본 챠르는 화가 나 속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니, 정확히는 아랫도리가 촉촉해진다고 해야할까.

섹스한 티를 팍팍 내는 꼴을 한 여자친구를 겉으로는 욕했지만, 마음 속에선 강민과 가열차게 구르는 자신이 자꾸만 떠올랐다. 뿔에 구멍을 뚫으며 임신하라고 외치는 강민.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 좆물을 받으며 능욕당하는 자신-

챠르는 침을 꿀꺽 삼켜버리며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서큐버스라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지, 여동생의 약혼남이랑 이런 생각이라니 안 돼!

안 되겠어. 담판을 지어야지.'

오늘도 바쁘다고 못 만나겠다는 강민의 작업실에 억지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강민이 앉아 있는 책상을 보자마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저 책상- 기억 속에서 본 적 있어.'

여긴 샤를이 강민과 등산 갔다 내려와서 간지럼 섹스를 한 곳이었다. 저 책상 위에서, 강민이 자신의 여동생을 간지럽히며 앞뒷구멍을 즐기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될 때까지 괴롭힌 곳. 순간 등허리가 찌잉 울렀다.

'정신 차려, 챠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탕한 상상을 떨쳐내고 강하게 나갔다. 품 안에서 계약서 초안을 들이대며 강민에게 싸인을 요청했다.

"내 동생이랑 결혼하기 전에 써야 할, 혼전서약서예요. 읽지 말고 그냥 사인해요. 샤를한테도 싸인 받을 테니까."

하지만 악마와의 계약을 누가 읽지도 않고 대뜸 하겠는가. 강민은 계약서 첫 조항을 읽었고, 그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처음부터 거절당한 챠르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샤를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샤를은 강민 씨 아이를 임신했잖아요. 하렘의 다른 멤버들이랑 똑같이 취급할 거예요? 유다 씨랑 있다가도 샤를이 보고 싶다, 뭐 먹고 싶다 하면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샤를만 제 아이를 임신할 게 아니라서."

챠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친언니 앞에서 다른 여자도 임신시킬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역시 이 남자는 발정난 숫말같은 놈이었다.

"아니, 샤를 하나만으로 만족을 못해서 전부 다 부인으로 삼겠다구요? 그냥 섹파가 아니고?"

"전부 똑같이 사랑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챠르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다른 조건이라도 맞추려고 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두번째- 샤를 눈에 눈물나게 하는 플레이는 안 돼요."

"예를 들면?"

강민은 두루뭉술한 조항들을 보며 물었다.

"초, 초대남 같은 거라던가- 다른 남자 불러서, 샤를 임신시킨다던가-"

이번엔 강민의 얼굴이 찌푸려질 차례였다. 챠르는 강민의 이마에 떠오른 주름을 보고 입을 합 다물었다.

'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요. 당신의 지저분한 생각은 정말이지... 사실 그거 당신의 로망 플레이같은 거 아닙니까?' 이라는 책망을 들은 것 같았다. 챠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눈이 사팔뜨기가 될 정도로 옆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하여튼 안 되는 플레이들, 여기 적을 거예요."

빈 종이에 하나씩 써내려갔다. 초대남, 타인 대여 하우스 펫, 뿔에 구멍 뚫기-

"음. 그건 샤를과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안 된다니까요!"

둘은 티격태격 싸웠지만 합의점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강민은 그냥 다른 남자와 섹스시키지 않는다는 맹세만 하고 싶어했고, 챠르는 자신의 여동생을 하드코어한 플레이에서 지키려고 최대한 맞섰다.

"남의 여동생한테 대체 무슨 짓을 시키려고 하는 거야!"

"서로 좋아서 하는 거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뿔에 구멍뚫고, 목 조르면서 섹스하고, 팔다리 없이 섹스하고! 다른 여자한테 했던 섹스들도 언젠가 샤를한테 할 생각이잖아!"

강민이 다른 여자에게 했던 섹스를 모조리 몸으로 겪은 챠르는 알레르기 반응에 가까울 정도로 소리질렀지만 강민도 완강했다.

"샤를도 좋아하거든요? 불러와서 물어봐요?"

"흥! 이미 가스라이팅까지 다 해 놓고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둘은 씩씩거리며 다퉜다. 한참 설전이 이어진 이후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이, 이 정도면 됐으려나-?'

챠르는 꼴깍 침을 삼키고 슬쩍 강민을 살폈다. 이 정도 싸웠으면, 이런 말을 해도 부자연스럽진 않겠지?

챠르가 진짜로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큼큼거리며 목을 다듬고 기어들어가듯 말했다.

"그럼, 정 계약서 못 쓰겠다면- 하드코어한 플레이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요."

"예?"

확인하기 위해 강민이 되물었다. 자신의 귀로 듣고도 믿기지가 않는 소리였다. 챠르는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요. 뿔에 구멍 뚫는다던가- 팔다리 자르고 한다던가. 촛불로 화상 입히는 거, 강제 피어싱 같은 건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여동생이 그런 걸 당하는 건 못 보겠으니까-"

챠르는 플레이를 말하는 순간 자신의 유두가 뾰족 서는 걸 느꼈다. 브래지어를 차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강민이 눈치채지 못하게 화난 것처럼 얼굴을 팍 찌푸리고 소리쳤다.

"그, 그게 싫으면 결혼도 없어요!"

하지만 역효과였다. 강민은 챠르가 진짜로 섹스를 원한다는 건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할 상대의 언니가 자신을 꼬시고, 넘어가는 순간 찰칵 하고 닫히는 위험한 덫.

강민은 의심을 품고 다시 계약서를 살폈다. 위험한 조건들이 있는지 봤다. 사실- 싸인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없는 조건이었다. 다른 남자와 강제로 성교 금지, 강민은 현재 여자친구 외의 여성과 성교 금지, 성교 외 폭력 행위 금지, 하드코어한 성행위 금지, 서로 아끼고 사랑할 것 등- 평범한 커플들도 쓸 법한 내용.

다만 이걸 본인이 아니라 언니가 진행한다는 점이 좀 걸렸다.

'샤를은 내가 아무리 하드코어 플레이를 해도 받아들일 텐데.'

저번에 했던 것처럼 묶어놓고 요도구 절정을 몇 시간이고 시켜도, 샤를은 감사하다고 말하며 받아들일 터였다.

'어기면 어떻게 되려나?'

쌍방 합의가 있으면 조정 가능, 계약을 어길 시 별거권 행사 가능 및 이혼에서 불리한 조건, 위자료 지급 등- 약한 처벌이었다.

그러다 강민의 눈이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에서 멈췄다.

- 샤를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강민은 꾹꾹 눌러쓴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홀몸으로 키운 언니가 동생이 행복하길 바라며 고심 끝에 내건 계약.

샤를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챠르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마음이었겠지.

혼자 남은 혈육이 불행하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영원토록 행복하도록 바라는 마음.

강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젠장. 알았어요. 알았어. 싸인할 테니까. 이거 샤를이랑도 최종안 맞춰서 가져와요. 하드코어한 플레이 거부 들어가 있는 거 보니까, 샤를이랑 아직 이야기 안 된 거죠?"

챠르는 딸꾹질을 했다. 딸꾹. 짐승같은 강민이 좋다꾸나 하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이건 예상 외였다.

"잠, 잠시만요. 진짜로 도장을 찍는다구요?"

"네. 네. 찍어요. 어차피 결혼할 생각인데. 다만 샤를이 계약서 내용 수정할 거 있다고 할 걸요. 샤를은 언제까지고 당신 동생은 아니니까 잘 이해해 주고."

챠르는 이게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짜내듯 물었다.

"저, 힘들지 않겠어요? 내 몸으로 만족하지 않아도 되겠나요?"

"어떻게 처형한테 그런 걸 요구합니까. 됐어요. 니모나랑 놀고 말지."

챠르는 얼떨떨해진 상태로 손에 들린 계약서를 바라봤다. 표준 혼전계약서에서 따온 한 조항에 눈이 멈췄다. 현재 있는 여자친구 말고 다른 여자와는 더 이상 성교하지 않겠다는 계약-

챠르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