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 321. 챠르의 마음을 풀자 (2)
"언니, 그것만 사서 되겠어? 집에 사람이 몇인데."
샤를은 크리스피 한 판을 추가하며 챠르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한테 예쁜 옷도 사주고, 귀걸이도, 목걸이도, 구두도 - 사줘야 할 게 많았다. 고생한 언니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다.
"잠, 잠깐만, 샤를-"
"아휴. 일단 입어봐. 저기 걸려있는 것도 사이즈 44로 주세요. 이것도 레이어드해서... 어때? 마음에 들어?"
챠르는 자신의 몸을 두른 드레스를 손으로 쓸어내며 탄성을 질렀다.
"우, 우와아..."
마계에서 입던 거칠거칠한 옷들과는 품질 자체가 달랐다. 이런 드레스는 마계의 대공들도 쉬이 입지 못할 터. 챠르의 반응에 샤를이 밝게 웃으며 다른 것도 입혔다. 챠르는 카트에 턱턱 쌓이는 옷더미를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백화점이란 곳에 들어올 때부터 주눅들긴 했었다. 마계에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 화려한 쇼핑을 즐길 순 없었다. 괴테가 활동하던 시절에 멈춰 있는 과학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사치.
직원이 쇼핑백 걸린 트리로 변해가자 챠르가 중얼거렸다.
"너, 너 남자친구- 무슨 왕족이야?"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뭐. 돈 좀 벌긴 하지."
강민과 샤를은 폰허브를 시작한 이후 두달만에 VIP등급을 찍었었다. 순이익으로 따지면 월 2억꼴로 돈이 들어왔고, 새 집에 가구를 들여놓을때 모조리 백화점에서 결제했더니 냅다 vip로 올려줬다. 처음엔 VIP가 무슨 소용이람- 싶었지만 언니가 짐 들어주는 직원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 대단하다..."
챠르는 주눅이 들었다. 어쩌면 강민이라는 남자 꽤 괜찮을지도... 물론 뭘 해서 돈을 버냐는 물음엔 샤를도, 유다도 필사적으로 답을 피했다.
"자, 언니. 이것도 해볼래?"
이번엔 샤넬 매장으로 들어가 악세사리류를 고른다. 챠르는 자신의 반짝거리는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머! 엄청 잘 어울리신다! 혹시 모델이세요?
직원이 호들갑을 떨 만 했다. 챠르의 외모도 서큐버스답게 아름다웠다. 사슴처럼 날씬하게 파인 목덜미, 샤를이 후드티에서 드레스로 갈아입혀 금방이라도 저녁 무도회에 나갈 것 같은 복장, 날카롭고 요염한 눈동자, 배우같은 외모-
물론 칭찬을 듣는 장본인은 목걸이를 이리저리 돌려볼 뿐이었다.
마계의 창관에서 일할때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게에서 빌려주는 악세사린 많았지만, 그 중 자신 소유의 물건은 하나도 없었었다. 그런 걸 사느니 차라리 저녁에 빵 한 조각을 더 먹겠어- 라고 생각하던 챠르였지만 막상 목걸이가 목에 걸리자 다시는 벗고싶지 않았다. 너무 예쁘고 반짝였다.
"으아..."
"언니 눈 너무 커졌다. 이걸로 할게요. 일시불이요."
"돈,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아까까진 강민을 파산시켜버리겠다고 호기롭게 외쳤지만, 물건들이 쌓여가는 걸 보자 두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샤를은 폰을 만지며 싱긋 웃었다.
"오빠가 결제 문자 보고는 왜 이렇게 찔끔찔끔 사냐고 그러는데? 언니 사고 싶은 거 다 사래."
"으으, 으으... 나, 난- 이거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러면서도 다이아 반지에 시선이 고정된다. 샤를은 챠르가 쳐다본 제품들은 모조리 구매했고, 챠르가 이젠 안 사도 된다고 애원할 무렵이 되서야 쇼핑이 멈췄다. 챠르는 백화점에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폭 쪼그라든 채, 도넛을 갉작거렸다.
"어때, 언니. 나 엄청 잘 살지?"
"응, 응..."
챠르는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비교하자면-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여동생이 재벌 2세와 결혼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펑펑 쏟아지는 자본주의의 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끼웠다 뺐다 해보며, 샤를이 마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진짜로 결혼 허락해 줘야 하는 걸까?
결혼 허락을 안해준다면, 샤를은 어쩔 거야- 아이까지 있는데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샤를이 언니의 손을 끌고 다른 매장으로 향했다.
"언니, 이번엔 내 옷좀 살게."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본 챠르의 눈이 커졌다.
"헤헤, 사실은 오늘 행사 있기도 해서 여기 온 거거든-."
입구에 걸린 플랜카드에서 [ 베이비 페어 ]라는 글자가 휘날렸다. 챠르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입구부터 쭉 늘어선 아이 옷, 아기 신발, 속싸개, 유모차- 그리고 활짝 웃는 샤를.
샤를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더불어 강민에 대한 분노도 다시 솟아올랐다. 서큐버스한테 억지로 혼전 임신 플레이를 시키는 미친 놈. 혼전 임신, 혼전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지, 이런 놈하고 결혼을 어떻게 시켜!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샤를은 언니의 타는 속도 모른채 열심히 물건들을 살폈다. 어떤 색의 물건을 사는 게 좋을까 물어본다.
"아직 성별은 모르시는 거네요?"
"네, 아직 임신 초기라..."
"요새는 남자애들도 핑크색 많이 써요. 귀엽잖아요."
샤를은 속싸개와 포대기를 사곤, 다른 매대로 가서는 유모차를 기웃거렸다. 유다는 실버크로스 제품을 보며 '무슨 차 한대 값이네'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샤를에게 이건 어떠냐고 물어봤다. 백화점 직원이 따라다니는 VIP라는 걸 감지한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 친절하게 설명했다.
"제품이 얼마나 잘 나왔는지, 아이가 타고 있어도 흔들리지가 않아요. 차량보다 승차감이 좋거든요."
"흐음-아직 임신 초기라- 유모차는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샤를은 슥슥 밀어본다. 챠르를 쳐다보며 밝게 웃는다.
"언니. 이거 어떨 것 같아?"
"괜찮네..."
대답해 주면서도 한숨이 푹푹 나왔다. 서큐버스 뿔에다 구멍 뚫고, 결혼하기도 전에 사랑을 확인해 보겠다고 임신시키는 남자친구가 대체 뭐가 좋아서 그렇게 헤벌쭉 웃는지!
언니에게 괜찮은 지 물어볼 때마다 표정이 더 안 좋아졌지만, 샤를은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다는 마음에 들떠 눈치채지 못했다. 매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돌고, 화장실좀 갔다오겠다고 말하고 떠났다.
"..."
졸지에 어색한 사이인 챠르와 유다는 앉아 서로 힐끔거렸다. 챠르의 시선이 슬쩍 피어싱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유다의 기억도 몸으로 체험했었다. 클리토리스에 피어싱을 박히면서도 강민에게 봉사하던 여자였지?
"...강민이 그렇게 좋아요? 피어싱도, 다른 여자랑 같이 결혼해야 하는 것도 다 감내할 만큼?"
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이 좋았다. 아무리 섹스할 때 심하게 해도 결국엔 웃으며 사랑해주는 남자친구, 어둠 속에 있던 자신을 끌어올려준 사랑스러운 사람, 그리고 용기 없는 자신 대신 아버지에게 복수까지 해준 멋진 남자친구-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저,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정신적으로 많이 학대당했었거든요."
유다는 자신의 손목에 남은 악보 모양의 자해 자국, 그리고 귓불의 찢어진 자국을 슬쩍 내보였다. 아버지가 귀걸이를 잡고 쥐어뜯어버렸을 때 남은 흉측한 상처를 보며 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왜 그랬던 거예요?"
유다는 말하기 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정돈했다. 과호흡이 재발할 것 같은 이야기였지만- 강민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강민이 얼마나 착했는지, 얼마나 용감했는지-
"제 아버지는요- 목사였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길고 긴 이야기.
탁자 위에 있던 커피에 든 얼음이 모조리 녹을 정도로 길었다. 챠르는 샤를이 어느 새 테이블로 돌아온 것도 모른 채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착한 척, 고고한 척 하던 목사가 파멸하는 이야기라니. 서큐버스를 정말 신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진짜로요?"
강민이 마법을 걸어 목사가 불륜을 저질렀던 걸 모두에게 폭로하는 장면에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몹쓸 변태놈이었지만 봐줄 법한 구석도 있는 남자였다.
"언니. 그것 말고도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깜짝이야. 샤를. 언제 왔어?"
"진작 왔지. 그보다- 내가 맨 처음에 강민 오빠랑 어떻게 만났냐고 하면-"
셋은 백화점 테이블에 앉아 긴긴 이야기를 했다. 예림이인 척 변신하고 강민을 꼬신 일부터 영선을 만나고, 폰허브를 찍고, 유다를 만나고- 그 간 있었던 모든 일들을 천천히 풀어놨다.
- 아하. 동영상으로 마력을 수집했다? 똑똑하네?
- 부모님은 이미 뵈었다고?
- 무슨 섹스할 때마다 강간플에, 애널, 야외노출- 옷은 항상 입히고- 그냥 쓰레기 아냐? 너 그냥 장난감으로 보는거라니까?
- 와. 니모나 걔... 랑 박성연도 진짜 또라이다...
- 뭐? 성당기사단에게 대들었어? 허 참, 그런다고 내가 좋게 볼 줄 아나.
- 프로포즈는 어떻게 받았다고?
"아으... 말하는 것도 힘드네..."
샤를은 자신의 입가를 문질렀다. 다섯 시간쯤 이야기를 들은 챠르도, 내내 이야기한 샤를도, 같이 뺄건 빼고 더할건 더한 유다도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중간중간 푸드코트에서 사 온 음식들의 잔해를 정리하며 샤를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서 언니, 강민 오빠. 어떤 것 같아?
나는 언니가 들러리도 서주고, 부케도 받고, 축복해 줬으면 좋겠는데..."
챠르는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샤를이 강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챘다. 반짝이는 눈빛, 밝아지는 목소리. 꼬리가 있다면 강아지처럼 붕붕 흔들리겠지.
"네 마음은 잘 알겠어, 샤를."
하지만- 강민이란 남자는 결국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는 바람기로 샤를을 슬프게 만들 것 같았다. 더욱 더 변태스러운 플레이를 하자고 하며, 끝내는 초대남 같은 것에도 손대겠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눈에 눈물나게 하는 놈은 절대 안 돼!
...하지만.
말려도 샤를의 뱃속에 아이가 있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강민이 그 놈한테 맹세 시킬게 몇가지 있으니까. 그 때 다시 이야기해."
"음, 음? 무슨 맹세 시킬 건데-?"
"넌 알 필요 없어. 언니가 알아서 할게."
샤를은 걱정스럽게 언니를 봤다. 하지만 언니의 말을 거역할 순 없었다.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