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4화 〉 309. 언니를 부르자 (1)
* * *
뒤이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강민의 손을 잡고 꼼지락거린다.
"저, 으, 다들 들으셨겠지만.
제가, 지금 임신했거든요..."
"푸커헙!"
아직 이 소식을 듣지 못했던 수녀 둘은 먹던 파스타를 뱉어냈다.
입가에 소스가 처덕처덕 붙은 황망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봤다.
"혼, 혼전 임신이요?"
"세상에..."
도저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샤를을 쳐다봤다.
샤를의 얼굴이 토마토보다 더 빨개졌다.
하지만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손을 배에 올리고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넷, 네에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 주시면 좋겠어요.
저희 서큐버스들 혼전 임신엔 되게 엄격하거든요."
"...그래요."
"축하해요. 샤를."
"샤를, 그럼 이젠 엄마 되는 거야?"
"벌써 유부녀라니."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다들 여러가지 마음으로 샤를을 축하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복잡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니모나였다.
축하 인사를 건네며 가만히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샤를도 임신했구나.'
부러움에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발표도 할 수 있고. 좋겠네.'
자신은 아직 아무에게도 임신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일단 강민에게는 임신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자기 멋대로 배란하고, 좋을 대로 이용했는데 무슨 염치로 말하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주인이 되어달라는 부탁까지 들어준 강민에게 짐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말을 해야 하는데.
니모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박성연과 나눴던 이야기가 마음을 내리눌렀다.
며칠 전. 집에 도착하자 파리한 모습의 박성연이 리프트를 타고 내려왔다.
갈가마귀 편으로 보내준 계약서를 한 손에 들고 울먹인다.
"여보. 이 계약서, 진짜가 아니라고 해줘.
제발, 제발"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새빨갰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수염과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뒤엉켜 엉망이었다.
힘들어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박성연을 꽉 껴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성연 씨, 성연 씨"
"아니지? 계약자가 내가 아니라 강민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잖아, 대체 왜?
거짓말이지? 그냥 나 흥분시키려고 하는"
니모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같은 남편이 불러온 결과에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아냐. 자기야. 내가 말했잖아.
나 NTR 플레이 더는 못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다른, 다른 남자한테 날 보내겠다고 그랬잖아
이건 가벼운 놀이일 뿐이라고 하면서."
니모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상상만으로 죽을 것 같았다.
강민까진 어떻게든 참았지만. 남편이 다른 파트너들에게 자신을 빌려주고.
매번 남자를 바꿔가며 섹스한다는 말은 절망에 가까웠다.
"그래서, 난 더 이상 못 버티겠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미안해. 미안해."
성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게 진짜가 아니길 바랬지만 눈 앞의 진실은 냉혹했다.
NTR플레이를 즐기다가, 아내가 결국 남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다.
분명히, 아내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렇지만.
박성연은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감각이었다.
'이게 진짜라고?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분노에 휩싸여 소리질렀다.
"니모나!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널 마계에서 꺼내줬잖아!
넌 죄의식도 없어? 날 이런 꼴로 만들어 놓고!
그러면서 다른 남자에게 가겠다고?"
성연은 자신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쾅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여보, 안돼, 하지 마!"
니모나는 울며 주먹 사이에 자신의 몸을 끼우고 말렸다.
애절하게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성연 씨, 그만해, 제발 그러지 마. 미안해, 미안해."
"미안하다면, 이 계약 당장 취소해!
그럴 수 있잖아! 왜 안 하는건데!"
니모나는 계약을 취소하라는 말에 참지 못하고 절규했다.
"왜 취소해야 하는데! 취소하면 결국 날 보낼 거잖아!
지금 생활도 예전과 똑같을 텐데! 대체 왜! 뭐가 불만인데!
혹시. 계약을 취소하면 나중에 다시 구슬려서. 다른 남자와 자게 하려고?"
성연은 입을 다물었다.
니모나의 말은 정곡이었다.
정말로 NTR 플레이를 그만둘 생각이라면 계약서를 취소할 필요도 없다.
결국 성연은 주도권이 사라지자 상실감을 느끼고, 되찾고 싶어서 떼를 쓰는 셈.
최소한 원래 아내인 지현과 했던 것처럼, 둘이서 사이좋게 네토라레 플레이를 즐기고 싶다는 게 진짜 바람이었지만
니모나와 지현은 아예 다른 사람이다.
네토라레 플레이는 둘 다 마음이 맞아도 힘든데.
그걸 억지로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이 앞에 있다.
아내의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니모나는 엉엉 울며 성연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내 마음은? 내 마음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거야?
우리 맨 처음에 약속했었잖아. 마력만 다 모아오면 그만두기로 했으면서!
어떻게든 계속하려고 하는 거, 정말 싫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계약을 취소할 생각은 없어!"
성연은 망연자실했다. 그제서야 깨닿는다.
자신은 이제 파산한 도박중독자 신세라는걸.
돈을 빌려올 곳도 없고, 니모나가 자신에게 베풀어주는 애정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이를 악물고 니모나에게 손을 뻗는다.
"니모나, 니모나...
계약을 다시 한번만 생각해 줘...
강민의 소유물이라니."
"그럴 순 없어. 미안해."
니모나는 울며 거부했다. 마음이 아팠다.
'제발. 성연 씨.
다시는 NTR 플레이를 하지 않겠다고 말해줘...
이렇게 해도 정신을 못 차리는거야?'
니모나는 남편이 미안하다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걸 꿈꿨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니모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 아무 말 없이 도서관에 쳐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였는데, 임신했다고 어떻게 말하겠어'
그렇게 우울해하는데, 갑자기 강민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그리고 박성연 씨가 오시기로 했거든요?
게이트 여는 작업을 도와주겠다고 하시네요."
'뭐?'
니모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일 남편이 여기로 오겠다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채 이야기를 나눴다.
"박성연이면 저번에 죽은 아내 데려오겠다고 게이트 열었던 그 마법사 맞지?
게이트 구축 지식은 그 사람 믿을 만 하지. 성당기사단에서도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요주의 인물로 마킹했었는데."
"다행이네요. 언니 불러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샤를. 언니는 어떤 사람이야?"
"음. 엄청 자상하고, 잘 돌봐주는 사람인데요"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니모나만 어쩔 줄 몰라하고.
곧 박성연이 게이트 구축을 도와주는 날이 왔다.
***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아냐. 그냥 허머 뒷좌석에 타 있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그보다 아주 집이 좋구만. 집들이 선물일세."
강민은 선물을 받아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빈티지 와인? 심지어 여섯병짜리?'
라벨만 봐도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게이트 여는 걸 도와주시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아냐. 자네가 니모나와 찍어서 보내주는 영상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강민과 박성연 모두 니모나의 새 계약에 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둘 다에게 서로 불편한 상황. 마치 전남편과 현 남편이 모인 집들이라고 해야 할까.
니모나가 박성연과 잘 이야기했다고는 하지만, 강민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특히 지금도 그랬다.
성연이 니모나를 바라보는 저 절절한 눈빛.
이혼하고 나서 후회하는 남편같은 태도였다.
미드에서 자주 보이는 '혹시 재결합을 할 수 있을까?' 상태.
'아니, 그래도 당신 둘이 아직 결혼한 상태잖아?
중간에 낀 나한테 떠넘기지 말라고!'
강민은 껄끄러운 자리를 피해 성연을 게이트 부지로 데려왔다.
그리고 성연은 순수한 마도의 연구자답게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자신이 샀던 부지에 흐르던 마력이 수도꼭지 정도라면, 여긴 떨어지는 폭포수에 가까웠다.
"대체 영상을 얼마나 찍어서 올리는 겐가?"
"뭐, 그냥 하루 두 편 정도..."
성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펴봤다.
전 세계에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마력이 부족한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식이 버틸 수 있는 구조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일단... 이건 순은 막대로 써야겠군. 원형식에 3차원 돔 구조로 지탱하고. 압력 분산은 기둥 열 여섯개"
혼자 열심히 중얼거리던 박성연은 강민에게 물었다.
"준비를 부탁했던 재료는 다 있나?"
금을 녹이는 왕수, 순은 막대, 사파이어, 에메랄드, 루비, 그 밖에도 연금술에서 귀중하다고 알려진 재료들을 가득 담은 박스를 꺼냈다.
"좋아. 식을 구성해 보지. 알려줄 테니까 이대로 더하도록. 어차피 나중에 샤를이 한번 점검할 거니 괜찮겠지."
샤를도 옆에 와서 아카식 레코드에서 얻어낸 지식들로 게이트를 구성한다. 수녀들도 쭈볏쭈볏 다가오더니, 마법적 지식을 한 자락이라도 얻어갈 겸 그리는 걸 도왔다.
'젠장. 더럽게 힘드네.'
네 명이서 준비하는 데도 거의 열 두시간 가까이 걸리는 대작업이었다. 박성연은 셔츠를 팔뚝까지 걷어붙이고 땀을 뻘뻘 흘렸다. 휠체어 위에서 오차를 수정해가며 정교한 작업을 반복하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마법진을 그리던 손이 주먹을 쥐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흐아, 흐아"
오전에 시작해 거의 한밤이 되서야 작업이 끝났다. 파김치가 된 샤를과 수녀들은 먼저 씻겠다며 집 안으로 돌아갔고, 강민은 성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저 혼자서라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하지만 성연은 뭔가 담아둔 말이 있는듯, 멈칫거리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큰 마음을 먹고 입을 열었다.
"내가 이만큼 도와줬으니. 한 가지 요청해도 되겠나?"
"말씀하지요."
"그, 내 아내... 니모나와 자네가 새로 맺은 계약때문인데.
혹시 계약을 취소해 줄 수 있겠나?"
강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 혼자 바란다고 계약이 취소되는 게 아니라서.
니모나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만."
"...여보.
진짜로 계약 취소하려고?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귀신처럼 스륵 나타난 니모나에, 성연과 강민 모두 죽을 정도로 놀랐다.
"여보. 그게 아니고..."
하지만 성연은 니모나의 눈물 맺힌 눈을 보며.
다른 남자에게 안겨 있을 때. 슬퍼할 때 가장 예쁘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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