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화 〉 303. 영선은 강민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 * *
"영선아. 너 요새 펀치가 엄청 좋아졌다?"
"그래요?"
"엉. 깔끔해. 스텝도 마찬가지고. 잡생각이 사라졌다고 해야하나? 들어갈 때 들어가고. 빠질때 빠지고. 이정도면 그냥 올림픽 들어가도 바로 메달권이겠는데?"
프로 대회 우승컵을 들고 사진까지 찍고 내려온 영선은 고민했다. 자신도 원인이 궁금했다. 복싱이야 평소처럼 했을 뿐이고. 트레이닝을 늘린 것도 아닌데. 뭐 때문이지?
"강민이 덕분인 거 아냐?"
농담처럼 던지는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강민과 연애하고 난 이후 스트레스가 아예 사라졌다.
꽁꽁 묶여 앞뒤로 강민에게 능욕당하고, 목이 쉬도록 울며불며 비명을 지르는 섹스를 하고 난 후에 찾아오는 기분좋은 탈진감. 끝나고 다면 강민과 같이 큰 욕탕에 들어가 서로 씻겨주며 장난도 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연애였다.
욕구불만으로 으르렁대고, 자신이 정말 구제불능의 변태가 아닐까 고민하며 밤을 새던 나날들은 안녕을 고한지 오래. 게다가 커플링도 받았겠다, 스트레스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영선을 보고 민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진짠가 보네. 야, 난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연애하더니 아주 사람이 다 변했어."
레프리 역할을 맡아 준 말레이곰 민수는 영선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어렸을 때 복싱 관원들 캠프 따라와 벌레 잡으러 뛰어다니던 꼬맹이 시절이 엊그제같은데.
업어 키우다시피 한 꼬마가 어느 새 이렇게 연애도 하고.
게다가 복싱 글러브를 벗자마자 보관해 놓은 반지를 꺼내어 끼는 걸 보니 강민과 연애하는 게 정말 좋은 듯 했다.
"보기 좋아. 난 네가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다. 선머슴처럼 싸돌아다니던 꼴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하여튼. 강민이한텐 고맙네."
"헤헤."
영선은 머리를 긁으며 부끄럽게 웃었다. 큰일이었다. 강민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아랫도리가 찌잉찌잉 울렸다.
'나, 강민이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물론 영향을 끼친 건 다른 요소도 있었다. 자신의 경기용 레깅스 아래에 있는 남자화장실 문신이라던가, 클리토리스 피어싱에 대해 민수 오빠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것이다.
물론 민수 오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겠지. 묘한 기분에 몸을 배배 꼬는데 민수가 저 너머를 가리켰다.
"야, 저기 강민이 아니야?"
"어, 어?"
강민과 유다가 관중석에서 일어나 걸어오는 중이었다. 유다의 손엔 커다란 꽃다발까지 들려있었다.
"영선아! 우승 축하해!"
"누나. 우승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어, 언제 왔었어? 아우. 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영선은 뛰어가 둘을 동시에 꼬옥 안아줬다. 경기 응원까지 와줄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보다 강민이, 내가 경기 뛰는 것도 다 알고 있었구나 정말,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친구가 또 있을까? 영선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꽃다발을 받아들고 히히 웃었다.
"보러 오는 줄 알았으면 링에서 인사라도 해줄걸! 오늘 경기 내용도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미안해라."
좋지 않았다고? 강민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영선 누나랑 복싱을 같이 하다 보니 눈치를 챈건데
"누나, 오늘 엄청 봐주면서 했지?"
"쉿! 상대방 들을라!"
영선은 깜짝 놀라며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오늘 경기장 찾아온 관중들에게 너무 빨리 끝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힘을 좀 빼고 뛰었지만 3라운드 TKO로 상대방을 박살내 버렸다. 강민은 새삼 영선의 재능을 체감했다.
"아마 내가 저기 서 있었으면 1라운드 TKO였을거야. 영선 누나 진짜 잘한다..."
"1라운드는 무슨. 30초만에 닥터스톱이다."
영선은 킥킥 웃으며 강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마 MMA 입식타격 룰까지 적용하면 15초 안에 트위스트 걸어서 허리를 접어버릴 수도 있을걸?
"하여튼. 우승 축하해. 영선아. 오늘 축하턱 네가 쏠거냐?"
"아, 당연하지! 상금 받은 건 바로 한턱 쏴야 한다고!"
그렇게 강민과 유다는 쫄래쫄래 복싱장 관원들과 식사자리라고 생각하고 이동했지만
"먹어라."
돼지갈비가 강민의 접시 위로 우르르 올라온다. 곰처럼 번뜩거리는 눈빛이 강민을 위아래로 살핀다. 강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영선의 아버님이 계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같은 테이블에 영선의 부모님, 영선, 민수, 유다, 그리고 자신까지 여섯 명밖에 없을 줄은 몰랐는데.
"저, 민수 형 말고 다른 관원분들은"
"영선이가 워낙 밥먹듯 우승하다 보니까 다들 그러려니 해. 그리고 저 테이블도 우리 관원들이고."
다른 관원은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영선 아버님이 운영하는 도장은 태권도장처럼 아이들 맡아주는 역할까지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강민이 체할 것 같은 표정으로 고기를 먹자 아버님이 으르렁댔다.
"뭐가 불편한가? 양심에 찔리는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러며 강민과 유다를 날카롭게 훑어봤다. 야생의 감이 이야기하고 있다. 유다라는 여자와 강민은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
"여보... 뭐하는 짓이에요...?"
엄마보다는 누나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어머님이 조용히 손을 올렸다. 그리고 일격. 탄탄한 근육에 막힐 줄 알았지만 손가락을 붙들고 관절기를 거시는 걸 보니 어머님도 무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으신 듯 했다.
"미안해요. 손님까지 왔는데 이이가 이럴 줄은 몰랐네."
"여보, 여보. 잠깐만. 부러져 부러져"
"조용히 해요."
"처,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님. 영선 누나 남자친구 김강민이라고 합니다."
강민이 인사하자 하자 어머님은 손을 놓으시고 환하게 웃었다. 강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반가워요. 아휴. 선머슴같은 우리 딸이 요새 자꾸 치마도 입고 하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만. 이렇게나 귀여운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랬구나. 우리 관원들이 눈에 안 찰 법도 하지."
너스레를 떠시며 손을 휘휘 저었다. 강민은 감사를 표하며 한 가지 질문했다.
"감사합니다. 저, 어머님도 주짓수 하시는지...?"
"어머. 어떻게 알았어?"
그야 가방 안에 블랙벨트가 삐죽하게 튀어나와 있으니까. 블랙 벨트면 사범 급 강민은 개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영선을 대하듯 사근사근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도 영선 누나한테 주짓수 배우는데 어렵더라구요."
"아~ 어렵지, 어려워! 벨트 뭔데?"
"아직 그랄도 못 딴 흰띠입니다."
어머님은 강민같은 초보자가 정말 기쁜지 어깨를 탁탁 쳤다. 맥주를 콸콸 따라주며 마시라는 시늉을 한다.
'차 가지고 왔지만 오늘은 대리 불러야겠구나.'
강민도 술을 좋아하기에 짠, 하고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넷 모두 신나서 주짓수와 운동 코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요새는 복싱만 배워서는 안 된다 MMA가 대세다. 상대방을 죽이려면 모든 종합무술에 통달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며 유다에게도 주짓수를 권했다.
"언니. 귓가에 피어싱만 좀 빼면 금방 시작할 수 있다니까?"
"유다 씨. 운동하면 우울증이 사라져요. 한번 해봐요."
아직도 사람들을 대하는 게 서툰 유다 누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어머님이 유다의 어깨에 손을 촥 두르며 장점을 더 이야기했다. 근데 그 장점이라는 게
"주짓수 이게 괜찮은 남자 만나는 데에 참 좋거든! 나도 남편이랑 주짓수 하다가 만났어. 자꾸 나랑만 스파링 하고싶어 하길래 모른 척 하고 해 줬거든. 근데 점차 같이 밥먹자. 술먹자 이러다가 주짓수 스파링을 침대에서 하고싶어하더라고? 나도 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해 줬지. 이야 매트보다 침대 위해서 훨씬 잘하더라고? 여보, 그치?"
강렬한 입담에 밥을 먹던 사람들은 쿨럭 하고 먹던 걸 토해낼 뻔 했다. 다들 필사적으로 가슴을 치며 걸린 걸 넘기려고 애를 쓴다.
"아니. 뭐 이런 이야기 가지고 그래."
어머님은 깔깔 웃으며 소맥으로 주종을 바꿨다. 영선 누나의 음란함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은 태도였다. 강민은 낯부끄러운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연신 술을 시켰고. 술병이 테이블 주변 한 바퀴를 돌아갈 무렵이 되자
"우리 사위, 그래서 영선이랑 결혼할거야?"
"으오오오, 결혼이라니, 안 돼, 안 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곰과 취권을 쓰는 어머님.
지옥같은 광경이 되었다. 하지만 강민도 상당히 취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 누나와 당연히 결혼할 생각입니다!"
"헤헤, 진짜아?"
"강민아, 나도"
흡. 유다는 잽싸게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지만 강민은 얼음물이 쏟아진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슬슬 술자리를 정리했다.
"자, 다들 들어가시죠. 오늘 많이 취했습니다."
결국 영선을 축하해주는 술자리는 영선 누나의 부모님이 엄청나게 취한 채로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어 버렸다. 게다가 부모님 두분 연신 키스하며 들어가는게
"나. 동생 생기는 건 아니겠지?"
영선은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강민에게 기대 물었다. 무례한 상상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됐어. 누나. 이제 집 가자.
그리고 오늘 우승한 거 축하해."
"헤헤."
영선은 강민의 차 뒷좌석에 타서 히히 웃었다. 조수석은 유다에게 양보했고, 뒤에서 목을 감싸며 물었다.
"강민아.
오늘 우승한 기념으로
나 상 주면 안돼?"
허벅지를 비벼대는 영선. 강민은 그런 영선에게 속삭였다.
"당연히 상 줄게. 누나.
오늘은 유다랑 같이, 밤새 지하실에 있는거야"
"읏, 아아아앗♥"
영선은 피학감에 젖어 강민을 바라본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남자친구.
부모님한텐 엄청 착한 남자친구인 척 하면서.
사실은 다른 여자친구까지 술자리에 동석시키는 변태 남자친구.
그래서, 너무 좋아서 죽어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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