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66. 예림 부모님과의 상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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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부모님을 뵐 계획은 없었다. 예림이의 짐만 챙겨서 나갈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예림이의 부모님은 내가 온다는 소식에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거절이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흐트러져 보이면 안 돼.'
최선을 다해 머리를 다듬을 동안 예림은 자신의 아랫배를 문질렀다.
아직도 뱃속에 내 아기씨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원망을 담아 날 노려본다.
"원래는 다섯시에 씻고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다 오빠때문이야..."
예림이 네가 먼저 파이즈리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애초에 저런 거유로 내 자지에 봉사하겠다는걸 어떻게 참아!
하지만 여기선 내가 굽히는 게 맞겠지.
"내가 잘못했어. 들어가자."
사과를 들은 예림이는 내 팔을 가볍게 때리고 화를 풀었다.
딩동, 벨을 누른 후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갔다.
"예림이 왔니!"
어머님이 현관에서 웃으시며 기다리고 계셨다. 예림이의 어머님이 맞으시구나 하는 게 딱 느껴지는 외모와 몸매였다. 소싯적에 남자들이 꽤나 따라다녔을 것 같았고, 지금도 어머님 나이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김강민입니다."
"강민 씨. 오랜만이네요. 저번에 병원에서 본 게 마지막이죠?"
예림이를 닮은 부드러운 미소였다. 다행히 예전 사고의 후유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듯 건강해 보이셨다. 안도하며 선물로 챙겨온 곶감 한 박스를 꺼내자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아이구. 우리가 곶감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예림이한테 선물로 뭐가 좋을까 물어보길 잘했네. 원래 이런 건 신경써야 한다고!
멋쩍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석과 골프 가방 등이 있는 걸 보니 역시 예림이네가 잘 사는 집안은 맞는 것 같았다.
예림이가 내 손을 끌고 원목 식탁에 앉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남자친구 왔어!"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예림이 아버님, 진짜 잘생겼는데?'
중소기업 사장님이라기보단 옴므 중년 모델에 가까운 분이셨다.
병원에서 봤을 땐 누워계시니 키도 알 수 없고. 부러진 코에 붕대와 부목 붙이고 계시느라 몰랐는데.
키도 크시고 린드버그 안경테가 잘 어울리신다. 랄프로렌 셔츠에 깔끔한 정장 바지까지.
내가 어쩔 줄 몰라하자 아버님이 손을 저었다.
"괜찮네. 앉게."
같이 식탁에 앉았다. 묘하게 상견레같아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다행히 어머님이 알맞은 타이밍에 요리를 내오셨다.
그런데... 엄청나게 많았다.
"엄마,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딸이 남자친구 데려온다고 해서 신나게 만들다가 이렇게 됐지 뭐니."
잡채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낚지볶음은 엄지손가락 두께로 통통했다. 위에 올라간 참깨가 먹음직스러웠다. 거기에 짙은 갈색의 달콤한 육즙을 뿜어내는 찹스테이크까지. 예림이는 엄마에게 뭐라고 하면서도 엄청 신난 표정으로 내 접시에 이것저것 음식을 옮겨줬다.
"큼. 큼. 사이가 좋구만."
아버님이 날 시샘하듯 바라봤다.
애지중지 키운 예쁜 딸이 남자친구 그릇에 반찬 덜어주고 있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지.
"예림이도 많이 먹거라."
아버님은 예림이의 행동을 슬쩍 말리며 본격적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진 않았나?"
"아, 아뇨. 차 가지고 와서 괜찮았습니다."
아버님이 눈썹을 쓰윽 들어올렸다.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차라 흐음 이런 느낌이었다.
"부모님 차인가?"
"아뇨. 제가 영상 편집쪽 일을 하고 있어서.
스스로 벌어서 샀습니다."
이건 플러스 점수인지 아버님이 쓰윽 웃으셨다.
"허허. 대단하네. 학과가 컴공이라고 들었는데?"
"네, 컴공이긴 한데 그쪽으로 진로를 택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영상 편집이 재미있어서."
"재주가 많구만. 우리 딸이랑은 아르바이트에서 만났다고 들었는데, 아주 열심히 사는 것 같아."
아버님은 별 뜻 없이 던진 칭찬이었지만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장학금 타기 위해서 미친듯이 공부하고. 그러면서도 생활비 벌기 위해서 알바에 알바를 거듭하고. 제발 하루 여섯시간만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었는데.
사실 군대에 있을 때가 오히려 편할 지경이었다.
힘들었겠다는 말을 해준 어른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큰한 코끝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예림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남자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버님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림이랑은 어떻게 친해졌나? 우리 딸이 저렇게 보여도 의외로 속은 잘 안 털어놓는데."
"아, 그건"
제대로 밥을 뜨지도 못한채 계속 말했다.
딸의 첫 남자친구라 체크할 게 많으신 듯, 질문이 이어졌다.
어머님이 결국 팔을 툭 치며 제지했다.
"여보. 당신도 좀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강민 씨 밥 한술도 못 떴잖아요."
"아이쿠. 미안하구만. 딸 남자친구는 처음이라..."
안경테 너머의 눈빛은 처음보다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질문이 한참 남으신 것 같았지만 일단 식사를 하신다.
나도 간신히 밥을 삼켰다. 음, 이거 정말 맛있네.
배가 어느정도 차자 이번엔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죄책감을 감추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고가 크게 나셨었는데. 몸은 좀 괜찮으신지..."
범죄자가 술에 취하게 만들어 차에 태운 후, 람보르기니로 받아버린 사고.
나 때문에 무당인 척 하는 범죄자랑 엮여서 큰일 날 뻔 하셨었는데.
그러자 아버님은 갑자기 얼굴에 크게 웃음을 띄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강민 군이 입원 수속도 도와주고 그랬었지?
그때에는 정신이 없어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다시 한번 고맙네."
"아니,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리고 그 사고 때문에 오히려 잘 됐어."
"예?"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아버님이 웃으시며 사고 이후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내가 그래도 회사 사장이다 보니, 친구들이 보험에 좀 가입해 달라 이것저것 부탁을 많이 해 온단 말이지. 거절할 수가 없어서 사장용 보험에 가입한게 상당해.
돈이 워낙에 나가서 해약할까 생각했었는데. 저번 람보르기니 추돌사고가 범죄 피해로 분류가 됐다네."
음주운전 사고였다면 예림이의 부모님이 억대의 돈을 물어줬어야겠지만, 강제로 술을 먹여진 뒤 사고에 이용당한 것이 밝혀졌다고 했다. 그리고 보험금을 받았는데
"치료비랑, 휴업손해금, 특약 보상금 합해서 거의 십억 가까이 나왔지. 친구가 이걸 받는 사람 처음 본다고 깜짝 놀라던데."
"진짜로 그랬어?"
예림이도 모르는 이야기였는지 깜짝 놀랐다. 예림의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 한참 힘든 시기였었는데 어음 부도날 뻔 한거 간신히 막았어. 덕분에 회사도 정상화됐지. 전화위복이 된 셈이야."
나는 속으로 엄청나게 안도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죄의식에 짓눌려서 집 전세금 빼서라도 보상금을 대신 낼 생각이었는데.
모든게 잘 풀렸다니.
예림이도 이 사실은 처음 들었는지 식탁 밑으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왔다.
'다 잘 끝나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듯 가만히 손을 쓸어줬다.
진짜로, 다행이다...
그런데 아버님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우물쭈물하며 큼큼 기침을 했다.
"그것보다. 음...
너희에게 해 줄 말이 있는데.
일단 강민 군 자네는 아직 학생이지?"
"네.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말하기 힘드신 듯, 안경을 벗고 자신의 콧등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말을 했다.
"피임은 확실하게 하거라."
예림은 당황해 쿨럭, 하고 두꺼운 낙지를 뱉어냈다. 고춧가루가 기도에 들어갔는지 엄청나게 기침을 해댔다. 물을 주자 예림이는 벌컥벌컥 마시고 아빠를 노려봤다.
"아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 그래."
아버님은 팔장을 끼고 근엄한 태도를 취했다. 이번엔 어머님도 입을 열었다.
"대학생 때 아기가 생기면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란다. 엄청 고생할걸."
잠깐, 두 분 다 되게 젊어보이시는 게 혹시?
머릿속으로 뭉클거리는 의혹이 피어났지만 굉장히 실례되는 상상인 것 같아 후다닥 집어넣었다.
상상 대신 허리를 펴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저도 책임감 있는 어른입니다. 분별있게 행동하겠습니다. 일이 생겨도 책임질 거구요."
당당한 태도에 부모님은 만족하신 듯 끄덕거리셨다.
하지만 예림이가 옆에서 내 발을 꾸욱 밟았다.
나도 내가 이런 쓰레기같은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피임 잘 하라고 말씀하는 여자친구 부모님 앞에서 딸 뱃속에 아기씨를 잔뜩 채워놓은 상태일 줄은!
피임 마법이라도 걸어놔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책임지고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머님은 턱에 손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아직 사귄 지 100일도 안 된건 알지만. 엄마는 걱정이다, 예림아."
예림의 얼굴이 빨개졌다.
100일이 안 됐지만 온갖 섹스는 다 해봤는데 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
하지만 어머님은 아직 순진한 딸이 부끄러워하는 걸로 이해하신 모양이었다.
"자, 그럼 정리하고 일어날까요?
강민 씨.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놨죠."
"아닙니다. 즐거웠는걸요."
내가 이야기를 나눌 동안 예림이는 후다닥 방에 가서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나왔다.
70L짜리 캐리어 네 개. 짐도 많아라!
끌고 나와 팰리셰이드에 짐을 싣자 뒤에서 아버님이 흥미롭게 쳐다봤다.
"허허. SUV?
강민 군, 편집에 재능이 있나 보구만?"
솔직히 같은 학번 친구들과 비교해본다면 실력은 0.1%에 들 거다.
원래도 영화 동아리에서 편집하던 실력이 있는데, 거기에 폰허브 시작하고 매일같이 편집 경험. 각도 조정. 자막삽입 등등.
괜히 내 영상이 폰허브에서 1등이겠어?
어깨가 으쓱거리는 걸 내리며 겸손을 떨었다.
"뭐, 열심히 하다 보니 어쩌다 과분한 기회를 얻은 거죠."
"자네 실력인 것 같네만."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날 굉장히 맘에 들어하시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예림이 가슴에 있는 키스마크라던가, 뱃속에 있는 걸 들키지 않아서.
"그럼 가보겠습니다."
예림이가 차에 타자 부모님들은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우리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빠...고생했어요..."
"응, 너도..."
***
강민 커플이 떠난 뒤 예림의 부모님은 서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병원에 있을 때 보니까, 사귈 것 같더니만 결국은 사귀는구만."
"그래도 남자친구는 괜찮은 애인 것 같아서 다행이예요."
성격도 싹싹하고. 예의바르고. 생긴 것도 서글서글하니 잘 생겼다.
둘은 예림의 옛날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 왕따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요새는 집에서도 밝고. 친구들이랑 여행도 다니고. 얼마나 다행인지."
"참 생각이 바른 청년같은데 다행이야."
부모님은 강민이 예림의 남자친구여서 안심하셨다.
...강민의 폰허브 채널은 절대 들키지 않도록 하자.
물론 인식저해가 걸려있긴 하지만...
***
"라는 일이 있었어요. 영선 누나.
예림이한테 질내사정 해놓고 피임 이야기 들으니까 진짜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구요."
팰리셰이드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이야기했다.
어제의 상견례에 이어, 오늘도 영선 누나 부모님을 뵈러가야 한다.
아아 그 곰들이 드글거리는 굴로 들어가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위가 아파왔다.
하지만 영선 누나는 내 위통을 가속화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나, 나도...비슷한 거 해주면 안돼?"
자신의 배에 손을 올리고 있는 영선누나를 보자 스트레스로 뇌혈관이 끊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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