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252. 미끼를 물어버린 미카엘
* * *
용산구에 위치하고 있는 저렴한 레지던스 호텔.
호텔 직원은 최근 투숙한 이상한 손님에 대해 동료와 이야기를 나눴다.
"매니저님. 이상하지 않아요?"
호텔 직원들은 장기 투숙한 손님이 누군지 궁금해 들썩였다.
새하얀 은발에 여리여리한 몸. 학생처럼 보이는 외모에 모델처럼 예쁘장한 얼굴. 대체 뭘 하는 외국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장기 투숙이라니.
"한국으로 유학 온 부잣집 따님 아니예요?"
"기숙사가 다 차서 그런 건가? 가능성 있지 않아?"
하지만 추론은 부정당했다. 여자 직원 한 명이 목소리를 깔고 속삭였다.
"그 손님. 매일 남자랑 같이 나가잖아. 누구야? 아빠일까?"
"아빠 아닐걸? 나 호텔 앞에서 둘이 손잡고 키스하는거 봤어.
그리고 남자가 방에서 자다 가기도 하던데.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남자 자고 간 다음날엔 꼭 침대 시트 갈아달라고 하던데?"
침대 시트 교체 요청은 보통은 성관계를 암시한다. 직원들은 혀를 찼고, 남자 직원들은 부러움과 경악 반에 입을 떡 벌렸다.
"미친. 그럼 뭐야? 원조교제? 아니면 뭐,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여자 몇살이야? 외국 애들이 발육 빠른거 감안해도 지금 고딩 안 된것 아냐?
남자 쓰레기새끼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여권 봤는데 성인 된지 한참이던데."
"진짜로?"
직원들은 일은 안 하고 모여서 수근거렸다. 그러다 입구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후다닥 흩어졌다.
'야. 자기 말하니까 왔다.'
강민이었다. 발렛파킹을 부탁하고 로비에서 기다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밝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백색 드레스를 입은 미카엘이 걸어나왔다.
도자기 인형같은 외모. 눈에 띄는 은을 녹인듯한 흰 머리.
직원들은 청소하는 척 하며 둘을 흘끔거렸다.
강민에 대한 시샘과 질투가 홀을 가득 메웠다.
"미카엘. 갈까?"
강민은 신경도 쓰지 않고 미카엘을 데리고 나갔다. 폰허브 영상으로 돈을 벌어 일시불로 구입한 팰리세이드의 조수석에 태우고 데이트 장소로 향한다.
"여긴 어디예요?"
"코엑스 아티움."
오늘 강민이 할 데이트는 미카엘과 뮤지컬을 보는 것이었다.
작품은 오페라의 유령. 미카엘도 이제는 데이트가 익숙한지 강민의 손을 붙잡고 얌전히 에스코트를 받았다.
곧 조명이 꺼지고, 막이 올랐다. 미카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온전히 집중했다.
성가와 소설책 말고는 문화생활과 연결이 없던 삶이다.
한국에 와서 공연을 본 게 처음이니 빠져들 수밖에.
공연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훌륭했다. 으시시한 지하, 아름다운 크리스틴.
미카엘은 강민과 같이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배가 안개 호수를 가르고 떠간다.
그리고
"크리스틴, 노래해! 노래하라고!"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팬텀이 귀기 섞인 고함을 지른다.
여성을 손아귀에 쥐고 흔드려고 하는 미친 남자. 오페라의 유령.
미카엘은 그 순간 강민이 팬텀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나이스를 손에 쥐고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려는 통제광. 미치광이 괴물.
슬쩍 눈을 돌려 강민을 봤다.
'...잔다고?'
강민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미카엘은 강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 자는 무신경함도, 그리고 왜 공연장에 데리고 왔는지도.
왜 친절하게 대해주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미카엘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대체 왜 나한테는 잘 해주는 걸까? 혹시 나한테 반해서?
남자여자 관계에는 젬병인 미카엘이었기에 강민의 의중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속 시원하게 알려주기라도 하면 편할 텐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최근 미카엘의 모든 일상은 강민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나이스한테 연락하는 건 금지였기에 강민밖에 만날 사람이 없다.
그리고 호텔에 머무르는 돈은 강민이 준 카드로 지불한다. 식사도 모두.
부담되지 않냐고 물어보지만 마음껏 쓰라고 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면 돈을 쓴다던데.
아나이스한텐 가혹하게 하면서, 왜 자신한텐 이렇게 상냥하지?
혹시라도 강민의 마음을 아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넷플릭스로 로맨틱 코미디같은 것도 봤었다.
'재미있었지만 소득은 없었지...'
강민의 마음을 짐작하기에는 차라리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같은 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미카엘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결국 뮤지컬이 끝날때까지 집중도 제대로 못했다.
"강민 씨, 일어나세요."
미카엘은 잠든 강민을 흔들어 깨웠다.
볼에 점퍼의 지퍼 자국이 날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어우, 아흐. 죄송하네요.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자서."
다른 여자들이랑 껴안고 뒹구느라 잠 못 잤겠지.
미카엘은 강민의 채널에 하루 하나 꼴로 올라오는 폰허브 영상을 생각했다.
앞이든 뒤든 사용당하며 울부짖는 강민의 여자친구들.
자신의 여자친구한테 그렇게 심하게 굴다니. 짐승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여자들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걸 생각하니 묘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왜 나만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걸까?
"오늘은 저번에 먹었던 닭도리탕 어때요?"
지금 데려가는 가게를 봐도 그렇다.
지나가듯, 여기 정말 맛있네요 말했던 곳을 기억해 주고.
그리고 감자와 닭다리를 세심하게 떠서 챙겨준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눈을 빤히 바라보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밝은 웃음을 돌려준다.
가슴 속에서 돌덩이 하나가 쿵 떨어져서 심장을 강타하는 느낌이 찌르르, 전해졌다.
'아, 말도 안 돼. 미쳤어? 미카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이 남자는 아나이스를 괴롭히던 쓰레기고. 미친 색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게 그렇다.
완전 개새끼인데 나한테만 잘해준다면.
정말 금이야 옥이야. 불면 꺼질까 쥐면 깨질까 조심하게 다뤄준다면.
머릿속으로는 개새끼란 걸 알아도 엄청나게 신경쓰이는 것이다.
나는 혹시 이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든다.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말로 달콤한 경험이다.
강민이 데려갔던 데이트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같이 손을 잡고 걸으며 성당기사단 생활이 어쨌는지 들어주질 않나.
호텔로 들어갈 때 갑자기 꽃다발을 안겨주고 오늘은 같이 자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피곤해 보인다고 들어가서 쉬라고 해주기도 하고.
'그리고, 섹스도, 입으로만 하고 있고'
자신이 두려워하자 강민은 입으로, 손으로만 해도 괜찮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정도 없이 껴안고 키스만 하고 잠들 때도 있다.
그런 날엔 잠도 오지 않고 가슴이 얼마나 쿵쿵거리는지.
남자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근육질 팔이 팔베개를 해주는 날엔.
잠은 커녕 이상한 기분에 밤새 뒤척거릴 뿐.
물론 강민이야 계산적으로 그런 것도 있고, 여자들과 날마다 섹스하다 보니 도저히 섹스할 기분이 안 들어서 도피처처럼 미카엘과 같이 잠드는 날도 있다.
그러나 의도가 어쨌든 미카엘의 입장에서는 랜스 차징을 당한 것처럼 마음이 흔들린다.
젠틀하고, 귀엽고, 잘생겼고. 어찌됐든 아나이스를 덜 괴롭힌다는 약속을 지킨다(폰허브 영상이 드물게 올라오는 걸로 봐선 그렇다).
결국 쓰레기지만 빠지게 될 수밖에.
미카엘은 강민을 원망하며 눈 앞의 닭도리탕을 노려봤다.
몇 입 깨작거리지만 입맛이 없다.
"미카엘. 왜 그래요? 입맛이 없어요?"
미카엘은 말도 못하고 붉은색 눈동자로 강민을 노려봤다.
도저히 답답해서 안 되겠다. 따라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셔버린 후, 술기운을 빌려 강민에게 쏘아붙였다.
"강민 씨. 대체 왜 저한테 잘 해줘요?
저희 무슨 사이에요? 맨 처음엔 아나이스 대신할 성노예 취급할 것 같더니.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줘요?"
그리고 입 끝에 맴도는 질문을 혀로 굴렸다.
혹시, 당신, 저 좋아해요?
하지만 질문을 던질 용기가 없다.
그리고 강민이 좋아한다고 솔직히 말하면, 못 이기는 척 받아줄 사람은 미카엘이다.
나쁜 짓 하지 말라고 강민을 손에 쥐고 흔들 요량.
그리고 겸사겸사. 은근슬쩍 하렘에 슬쩍 끼어들어 볼 생각도 있다.
'...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강민은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다.
미카엘의 마음은 손에 올려놓은 것처럼 훤히 보였다.
남자라곤 없는 성당 기사단에서 살아서 그런지, 미카엘의 태도는 데이트 몇 번만에 녹아내렸다.
자꾸 자신의 얼굴을 보느라 걷다가 정강이를 부딪히고, 잠도 안자고 옆에서 숨을 조용히 쉬며 강민을 쳐다보기도 하고.
죄책감을 덜 요량인지 아나이스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니죠? 묻기도 하고.
손을 잡으면 굳이 깍지를 껴 오고.
미카엘에게 지적하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할 테지만 옆에서 보는 여자친구들은 미카엘의 태도에 한숨부터 쉰다.
언제 오냐고 물어보는 문자메시지와 통화 빈도. 아무리 봐도 이건 사랑이지.
그리고, 오늘. 미카엘은 마침내 강민의 미끼를 물었다.
그 아래에 감춰진 낚시바늘에 입술이 꿰여 강민에게 끌려다닐 팔자.
강민은 부끄러운 척 머리를 긁으며, 살살 낚싯줄을 당겼다.
"제가 미카엘에게 왜 잘해주냐구요?
사실은 아나이스 대신 하겠다고 저한테 찾아왔을 때.
어쩜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거든요."
"진, 진짜요?"
미카엘은 눈을 크게 뜨고 강민의 얼굴을 살폈다. 진짜일까? 정말로?
강민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돌렸다.
폰허브 영상을 찍는 동안 늘어난 연기력이 빛을 발한다.
"...네. 그래서 심하게 하려다가도 못 하겠고.
미카엘은 뭐하는 사람일까. 자꾸 생각나기도 하고.
하지만 전 여자친구도 있어서. 어떻게 해야될 지 몰랐거든요."
"그, 그래도 당신 용서해 줄 생각은 없어요!
아니, 진짜로 반성하고 회개하면 물론. 용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긴 하지만...!
그리고 아나이스는 어떻게 할 건데요!"
하지만 파닥파닥, 손을 젓는 미카엘의 분위기는 명백히 들떠 있었다.
강민은 몰래 씩 웃음지으며 미카엘이 뜰채에 담길 거리에 올 때까지 낚싯줄을 당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