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206. 예림이와 데이트
* * *
인생네컷. 사진 박스 안에 들어가서 컨셉을 잡고 네컷짜리 사진을 찍는 거다.
아무래도 예림이는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지 날 박스 안에 세웠다.
"오빠. 오빠가 컷마다 저한테 다가온다고 생각하고.
프레임 안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여요!
마지막은 컷은 빈 사진으로 찍구요!"
아하. 대충 이해가 간다.
나도 영화 동아리에서 촬영깨나 해봤으니까.
내가 프레임을 빠져나가 예림이 쪽으로 다가가는 컨셉이구만.
첫번째 네컷 촬영을 마치고 두번째 촬영.
예림이가 부끄러워 하다가마지막 컷에서 나한테 안기는 사진이 완성됐다.
...뭐야. 이런 것도 의외로 재미있네?
완성된 사진을 두 장씩 뽑아 나눠 가졌다.
예림이는 마음에 드는지 생글생글 웃었다.
"영화 스틸컷처럼 잘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오빠 영화 동아리라고 했죠? 출품한 작품 있어요?"
출품작이라. 안 좋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저번 촬영작품에서. 동아리에서 그럭저럭 예뻤던 새내기 여후배가 주연으로 바뀌자 감독 형이 대본을 바꿨었지.
뜬금없는 베드씬을 삽입해 놓고는 '아니, 이게 예술이라니까? 너는 예술을 보는 눈이 없니?' 란 개소리를 하다욕쳐먹고 탈퇴했다.
그 이야기를 해주자 예림은 이마를 찌푸리며 질색을 했다.
"어우. 진짜 음습하다."
"덕분에 작년 출품작은 없어. 올해에는 작품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자 예림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혹시 작품 찍을 때 배우 필요하면 말해요!
제가 찍는 거 도와드릴게요!"
"어? 그럼 나도 각본에 베드신 넣는다?"
"아, 오빠! 오빠는 맨날 그런 생각만 하고!"
예림이는 깔깔 웃으며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오빠. 동아리 활동 할 거면. 여름방학 끝나고 복학 할거에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글쎄다. 복학은 안 할 것 같은데."
폰허브 동영상 찍는 것만으로도 바쁘다고!
기획. 편집. 썸네일 제작. 운동. 그리고 여배우들 기분 상하지 않게 관리까지!
여기에 복학이라도 했다간 모든 계획이 망가질 터.
이번 학기엔 폰허브에 몰빵해서 채널을 확 키울 생각이었다.
학교생활에 투자할 시간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예약했던 식당 줄에 섰다.
"딤섬 좋아하지?"
"헐. 저 완전 만두 귀신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뭐. 그냥 여러가지로 기억하고 있는 거지.
같이 카페 알바할때 근처에서 샤오롱바오 먹기도 했고.
옛날에 같이 먹었던 거 기억 안나냐고 시시덕거렸다.
그런데 앞의 줄에서 힐끔힐끔. 시선이 느껴진다.
남자 두 명이서 왔는지
왜 이렇게 쳐다보지?
게다가 예림이 쪽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뭐 문제있나?
혹시 내 폰허브에서 인식저해가 풀린 건 아니겠지?
불길한 감각에 큼, 큼 헛기침을 하는데 그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저... 김강민 형 아니세요?"
내 이름을 안다고? 누구야?
"어? 맞는데. 누구...세요?"
"아. 저희 영화동아리 후배...
개총때 한 번 뵈었는데."
누구더라?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자 희미하게 떠올랐다. 동아리 개총때 몇 번 오며가며 인사한 애들이긴 한데.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난다.
촬영할 때도 뭔가 적당적당히 하려는 녀석들이었고...
그러고 보니 탈퇴한 감독 형이랑 친하게 지내던 녀석들이었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반갑다. 너네도 밥 먹으러 왔어?"
"네. 여기 맛있잖아요.
같이 오신 분은 여자친구신가요?"
그러자 예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자친구 맞아요!"
주변에 말할 수 있는게 기쁜 듯. 내 팔꿈치를 꽉 잡았다.
그때 점원이 앞에서 번호를 불렀다.
"27번 들어오세요!"
"아. 저희 번호 불렀네요.
그럼 식사 맛있게 하세요."
후배들은 인사하고 들어가며,깜짝 놀라 쑥덕거린다.
'와. 미친. 존나 이뻐...'
'우리 영화 찍을때 여주랑은 비교도 안 되네.'
'완전 아이돌 같은데? 연영과 사람인가?'
들어가는 통로에서 목소리가 울려서 여기까지 들린다.
멍청한 감독과 친하게 지내는 놈들답게 목소리를 제대로 줄이지 못한다.
예림이는 그 쪽을 쳐다보다가 내게 물었다.
"오빠. 쟤들이랑 친해요?"
"아니. 안 친해."
"으흥. 그렇겠죠?"
예림이는 잠깐 콧김을 불고, 입구에 있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드러난 배 쪽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노출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반응을 흘끔흘끔 살핀다.
"저보고 이쁘다는데. 기분 어때요?"
뒤에서 껴안아 주며 거울을 보고 웃었다.
"예림이 진짜 이쁘지.
내 여자친구라서 다행이다."
"히힛."
예림인 웃으며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제대로 된,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는 기분이구만!
"아. 우리 차례 됐다."
점원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예림이랑 걸으면주변 남자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게다가 나 보라고 입은 배꼽 드러나는 크롭티니 오죽하겠어.
'...음. 좋네.'
모두의 선망 섞인 시선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펴진다.
자리에 앉자 남자들은 들킬까봐 시선을 거둬들였다.
뿌듯함을 느끼며 메뉴판을 펼쳤다.
"예림아. 뭐 먹을래?
샤오롱바오랑. 슈마이 있는 세트?"
"완전 좋아요!"
예림이랑 내 취향에 맞게 음식을 시키고 자스민 차와 함께 신나게 떠들었다.
앞으로 해 보고 싶은 거라던가. 여행 가보고싶은 곳은 있어? 바다는 어때? 하면서.
하지만 우리 둘다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는 피했다.
아직까지 연애 초반이니 서로 조심하고 있다.
예림이는 나를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나는 하렘을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아직까지 서로 전략 수립은 끝나지 않은 상태!
그러다 보니 둘 다 고양이들처럼 그 주제에 관해서는 털을 곤두세우고 피하는 중.
하지만, 문제는 급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둘이 느긋하게 바다 놀러갈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영선 언니. 맥주 드실 거에요?"
"당연하지. 샤오롱바오엔 칭따오 마셔야 해."
"유다 언니는요?"
"나는 오후에 손님 있어서 패스.
아 나도 마시고 싶다아"
"이따 저녁에 모여서 놀래요?"
샤를과 영선 누나. 유다 누나의 목소리다.
젠장. 그러고 보니 예림이랑 데이트 계획 짜는 동안 샤를이 이것저것 조언을 해 줬지?
여기 예전에 유다 누나랑 가 봤는데 완전 맛있어서 단골 됐다고 했었고!
오늘 여기로 밥 먹으러 온 거였다.
그보다 셋이서 잘 놀러다니는구나!
예림이도 셋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뭐, 뭐에요? 저 셋이 친해요?"
"아. 그런가 봐."
아무래도 예림이 나타난 이후 셋이서 마음이 맞았나 보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후궁의 등장에 밀려난 첩들이니까...
원래도 친한 건 알았지만 나한테 말도 안하고 따로 만날진 몰랐네!
다행히 셋은 우릴 눈치채지 못하고, 옆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림도 귀를 바짝 세우고 들었다.
묘하게 딱딱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 험담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근데 진짜로...설마 예림이 욕을 하는 건 아니겠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건 영선 누나였다.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근데 강민이도 참... 너무했다.
예림이 좋아했다는 건 알겠지만...
우리 내팽겨치고 일주일에 하루 겨우 만나주고.
나는 슬프다. 진짜.
저번에 산란플 하느라 얼마나 부끄러웠는데.
그렇게 희롱해 놓고는 일주일동안 같이 자주지도 않고.
물론 연락은 꼬박꼬박 하지만..."
다행히 평범한 투정이었다.
그러자 샤를이 내 편을 들어줬다.
"그래도 예림 언니가 따지고 보면 맨 처음이었으니까요.
여러가지 사건도 있었고. 부모님도 큰 일 겪었으니까
강민 오빠도 잘 대해주려고 하는 거고."
유다 누나도 손가락을 꾸물거리다 의견을 표현했다.
"나는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예림이는 싫어할까?
난 샤를도 좋고. 영선이도 좋고. 예림이랑도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샤를 용서해 준 것도 그렇고. 착한 사람 같아."
그러자 샤를과 영선 누나가 유다 누나를 쓰다듬었다.
언니를 대한다기보다는 막내동생을 쓰다듬는 것 같다.
"언니는 왜 이렇게 귀엽지?
언니 안 같아. 엄청 착해. 겉모습이랑 진짜 달라서 귀여워."
"귀, 귀여워?"
"그럼요. 유다 언니는 진짜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근데 언니 말이 맞아요. 사실 저도... 주말에 오빠 못 보는 건 조금 힘든데..."
예림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
아무래도 들키면 더 골치아파질 것 같아,손목을 붙잡고 몰래 빠져나와 계산했다.
밖으로 나온 예림이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봤다.
"저, 미안. 나도 셋이 여기 올 줄 몰랐네."
하지만 예림이 신경쓰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닌 듯 했다.
"...부럽네요.
전 저렇게 친하게 몰려다니는 여자 그룹은 없었거든요.
저한테 착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진짜? 의외인데?"
예림이가? 왜? 여자 무리에서도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아빠가 공장 부지 이사한다고, 중학교때 전학을 갔었거든요.
전학가서 무리가 절 끼워주긴 했었는데.
그 중 한명 남친이 저한테 고백하고 나서 멀어졌어요.
저한테 친구 남친 뺏어간 여자라고 욕하고."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도 예림이 네 성격이면... 친구들 많았을 것 같은데?"
엄청 밝게 챙겨주고. 그런 성격이잖아.
그러자 예림이가 쓰게 웃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거든요.
학교에서 잘나간다는 남자애가 저한테 찝쩍거렸는데.
스토킹하듯 반 앞에서 기다리고. 전교생 보는 앞에서 불러서 고백하고.
저는 싫다고 말했는데 안 받아준다니까 그때부터 학교에 이상한 소문 내고.
칠판에 막, 이상한 낙서도 돼 있고 그래서전학도 또 갔었는데....
그런데 학교 옮기고 나서도 계속 괴롭히더라구요. 흑, 아우.
아으 갑자기 왜 이러지."
예림이는 자기 이야기를 하다가 북받쳤는지 눈 주위를 훔쳤다.
훌쩍거리는 예림이의 어깨를 껴안고 토닥여 주자, 예림이 마음 속에 있는 더 깊은 말을 꺼냈다.
"...지금도 무서워요.
오빠 여자친구들이 저 욕하진 않을까.
원래 남자친구 뺏어갔다고 원망하진 않을까..."
...아이고.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렇진 않을 거야. 예림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옛날 일도.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다 주변 사람들이 너한테 못 되게 굴었던 야.
괜찮아.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예림이는 정말로 서러웠는지 훌쩍거림이 더 커졌다.
"괜찮아. 네 잘못 아냐. 예림아. 괜찮아"
정말 진심을 다해 예림이를 위로해 줬다.
주변에서 우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다.
지금은 오로지. 예림이를 달래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슬퍼했던 중학교 시절의 예림이부터. 고등학교. 그리고 알바했던 때.
지금도 주변에게 미움받을지 걱정하는 예림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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