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167. 예림의 발견
* * *
민수 형까지 오자 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리 측에 사람이 넷 쯤 되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진 것.
"차량 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민수 형이 정중히 다시 물었다. 하지만 놈은 진땀을 흘리다가, 갑자기 손을 들고 입구를 향해 휘저었다.
"동주 형님! 여깁니다!"
그러며 내게 속삭였다.
"넌 뒤졌어. 이새끼야."
뭐야? 우리는 입구를 쳐다봤다가 다같이 입을 떡 볼렸다.
동주라고 불린 남자가 들어오자 입구의 청경이 주춤거렸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듯한 커다란 덩치.
배와 목에 잔뜩 붙어있는 지방. 그 아래에 있는 꿈틀거리는 근육들.
그리고 몸을 뒤덮은 문신들.
누가 봐도 생활하는 인간이라고 짐작할 만한 외모였다.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인상을 팍 구겼다.
꿈에서조차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었다. 가까이 다가와 목을 양 옆으로 뚜둑거리며 물었다.
"이건 다 뭐야?"
"아니, 이 새끼가... 갑자기 삼억 오천 못 주겠다면서 보험사를 불렀습니다 형님."
놈이 나를 쏘아봤다. 멧돼지처럼 콧김을 불어대며 묻는다.
"야, 좆만아. 너 번호 뭐야."
"그건 왜 물어봐?"
나도 겁대가리를 상실한 상태.
"이새끼가..."
놈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꽈악 움켜쥐었다. 마치 문 틈 사이에 끼인 듯한 고통이 어깨를 달렸다.
"이, 씨발"
나도 지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꺾어버릴 심산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영선 누나에게 배운 호신술중 하나.
그리고 동시에 민수 형과 영선 누나도 달려들어 놈을 떼어놓으려고 했다.
손목을 틀어서 놈의 팔을 꺾으려고 한다. 덩치가 당황하며 손을 뗐다.
그러면서 형을 노리고 반대쪽 팔을 훙 휘둘렀다.
풍압에 머리칼이 일어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펀치였는지 고개를 흔들어 흘려보냈다.
덩치가 인상을 쓰며 외쳤다.
"얼씨구? 너 복싱좀 했냐?"
그러며 민수 형의 정장 깃을 움켜쥐었다. 순간 형의 안색이 변하며 윗옷을 벗어버리며 빠져나왔다.
덩치는 손에 윗옷을 들고 형을 빤히 노려보다가, 병원 안을 살피고 혀를 찼다.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청경들도 이 쪽을 보며 주춤거리고 있어서 쉽사리 행동하긴 어려웠다.
상황이 나쁘다는 걸 깨달았는지 양복을 바닥에 휙 던져버리고 날 지목했다.
"한번 더 묻는다. 너 번호 뭐야? 이름은?"
하지만 민수 형이 끼어들었다.
"저한테 먼저 연락하십시오."
덩치의 이마가 사고난 람보르기니보다 더욱 구겨졌다.
한숨을 푹 쉬고는 사람 창자를 끊어먹을 듯한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우리 쪽에서 계산해서 연락할 테니까. 연락 잘 받아. 명함 내놔."
형이 명함을 내밀자 빼앗듯 받아갔다.
그리고는 양아치를 데리고 병원 뒷편으로 나갔다.
양아치는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줄 몰랐는지 덩치의 등과 우릴 번갈아 보다가 인상을 팍 쓰고 뒤를 따라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민수 형. 감사합니다."
그러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어차피 해결 보수 받을거야.
그보다 날 부른 건 잘 했어. 아주 질 나쁜 놈들이다."
민수 형은 떨어진 양복을 주워들며 혀를 찼다.
"주먹 쓰는 것도 거리낌이 없고. 몸집도 그렇고.
유도 하던 놈 같은데. 더럽게 험하네. 관장님이라도 불러야 하나?"
아, 관장님. 영선 누나 아빠.
한번 마주쳤었지. 아까 주먹을 휘두른 덩치보다 더 두껍고 더 큰 대왕 곰이셨다.
하지만 일단은 내가 돈으로 책임질 수 있다면 돈으로 책임지고 싶었다.
괜한 폭력 사태에 휘말렸다가 더 큰 일이 일어날수도 있으니까.
"그것보다... 수리비랑. 합의금이 얼마나 나올까요?"
그러자 민수 형이 안경을 매만지고 서류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양복을 입은 민수 형은 평소와는 영 달라 보였다.
말레이곰에서 엘리트가 되었다고나 할까.
영선 누나와 예림이도 얌전히 앉아서 형이 계산하는 걸 지켜본다.
그런데 태블릿을 툭툭 두드리던 민수 형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아, 근데 저 놈 자기 차 번호도 안 불러 주고 갔네. 미친놈인가?"
"제가 알아요."
아까 양아치가 사고현장 사진을 보여줄 때 혹시 몰라서 기억해 놨다.
"723자 5876. 노랑 람보르기니 에보."
휘유. 잘 했네. 민수 형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차종을 듣자 한숨을 쉬었다.
"친구 분 부모님 골치아픈 거 받으셨네.
근데 왜 하필 람보르기니 에보야? 그것도 노랑색?
영 맘에 안 드네. 이 차 재수없는 차인데."
"응? 민수 오빠. 왜? 뭐 문제 있어?"
옆에서 영선 누나가 묻자 형이 올백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 있는 건 아닌데. 우리 보험 손해사정사 사이에 유명한 차 있거든.
사고만 스무 번인가, 서른 번 넘게 난 거.
지금 저 양아치가 타고 있는 거랑 똑같은 노랑 람보르기니 에보.
보험 사기치는 거 같긴 한데 증거가 워낙 없어서. 골치 아파."
그리고 태블릿으로 차량을 조회해 보던 민수 형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잠깐만. 이거...
우리 사이에서 유명한 차 같은데?"
"예?"
민수 형이 태블릿을 이 쪽으로 돌려 보여줬다.
빼곡히 화면을 채운 사고 내역이 쏟아졌다. 범퍼 교체는 아예 적혀있지 않았고, 휀다와 본네트 수리 이력만 뽑아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후방추돌. 전방추돌. 백밀러손상. 우린 입을 떡 벌렸다.
민수 형도 눈을 빛내며 차량의 세부내역을 봤다. 이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운전자의 개인 차량이 아니라 법인 차량이었다.
"법인 차량이잖아? 열반농원? 이건 어디야? 법인에서 람보르기니를 굴려? 뭔가 구린데?"
그러며 차 견적이 얼마나 나올지 계산을 시작했다.
"보자. 이 정도 사고내역이면 걍 움직이는 관짝이라고 봐도 상관 없거든? 보험 가입 거부 먹어도 할 말 없고. 보험료만 일년에 천만원 단위로 나올거야. 사고 감가상각 다 따져서 계산해 보면 삼억 오천은 진짜 개 짖는 소리고. 많이 나와봤자 팔천만원.
렌트카도 외제차급 말고 엔트리급으로 끈다고 치고. 그럼 차량 관련으론 1억원."
예림이와 내 표정이 동시에 환해졌다. 그리고 형은 계속 말했다.
"하는 짓거리 보니까 4주인데 전치 12주 꽉 채워서 해 줘야 할 것 같다.
썩을 새끼. 이마 부상으로 전치 12주라니.
그래도 손해보상이랑 합의금 더하면... 월급보전 600. 합의금 2천만원.
1억 2천 6백이면 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얼마 안 나왔다. 다행이었다. 가슴 속에 안도감이 흘렀다.
예림이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내가 거기에 덧붙였다.
"저, 지금 5천만원 있어요. 예림아. 내가 다 해결해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미안해."
그러자 민수 형의 눈이 예림이를 향했다.
"아, 강민이 너 여자친구 부모님이 사고난 거야?"
"여자친구 아닌데요."
예림이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민수 형은 당황해서 우리 둘을 살폈다.
"음... 어...?"
"사귄 적도 없어요."
"어, 저번에 정선 리조트 오셨을 땐 사귄다고...?"
하지만 예림이는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의아해했고, 민수 형의 눈이 이리저리 옮겨갔다.
앗차. 민수 형. 정선 리조트에서 예림이 얼굴을 한 샤를을 봤었구나. 나는 대충 뭉갰다.
"저... 그건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하여튼. 정식으로 계산해 보면 일억 이천 육백이라 그거죠?"
민수 형은 아직도 미심쩍은 듯 예림을 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근데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이것들. 보험 사기 치는 거 맞죠."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 아래의 눈이 어둡게 빛나는 중이었다.
먹잇감을 찾은 말레이곰같은 눈빛.
손해사정사로써 보험사기단을 잡아낸다면 커리어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 유명해지기도 좋겠고.
"법인에서 람보르기니를 몬다? 거의 99퍼센트. 거기에 사고이력 보면 확실하지.
어쩔래? 돈 안 주고 뻐팅기면서. 경찰에 신고해 볼래? 내가 도와 줄게."
경찰이라. 경찰 말고도 나는 이런 걸 도와줄 사람을 안다.
우리의 마법사 박성연 씨. 성당기사단에 의해 마력을 봉인당했어도 쓸모는 많다.
그에게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분한테 부탁해 볼게요. 그래도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하구요."
"3일 정도는 기다려 주지."
그 때, 내 폰에 전화가 울렸다. 뭐지? 폰을 꺼내 보자 유다 누나였다.
지금은 한참 바쁘다. 이따가 통화할 요량으로 거절했다.
그런데 문자가 하나 올라왔다.
[ 샤를이랑 만나기로 했는데. 샤를이 안 나와. ]
샤를이란 단어를 보자 가슴 속에서 뜨겁게 불이 타는 듯 했다.
잠깐, 근데 샤를이랑 만나기로 약속했었다고?
"잠깐만요. 전화좀 하고 올게요."
나는 폰을 들고 황급히 나갔다. 샤를이랑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그러고 보니 샤를은 언제부터 도망갈 생각이었지?
근데 도망갈 생각을 한 사람이, 약속을 잡나?
아니면 들킬 줄 모르고 약속을 잡았다가 튄 건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
그 동안, 민수는 예림이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다.
"저, 예림 양. 부모님이 음주운전 경향이라던가, 그런 게 있으십니까?
아니면 최근에 돈이 부족하셨다던가."
예림은 생각나는 대로 모두 설명했다. 최근 집에 이상한 물건을 사 오는 부모님.
그리고 박수무당이 굿을 한다며 자신을 붙잡은 것까지. 부모님은 음주운전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술도 잘 못 드신다는 점까지.
그 이야기를 들은 민수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혹시 그 무당, 이름이라던가. 정보는 아십니까?"
"몰라요."
"아쉽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뭔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다. 사이비 무당과 보험사기. 그루밍 범죄. 술을 못 마시는 부모님.
열반농원이라는 법인까지.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종이에 메모를 하는 민수에게 예림이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 근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세요? 그리고 정선 리조트는 무슨 말이예요?"
그러자 민수는 어이없어하며 반문했다.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예? 정선에서 저랑 마주치셨지 않습니까? 강민이랑 영선이랑 같이 오셨잖아요. 다른 분도 있고."
"간 적 없는데요."
"예? 무슨 소리세요? 영선이랑 같이 라운드걸도 뛰어주셨지 않습니까."
"제가요?"
영선은 옆에서 손을 파닥파닥 저어 봤지만, 내막을 알 수 없는 민수는 눈치채지 못하고 사진을 보여줬다.
"보세요. 정선 체스복싱 라운드걸."
예림은 멍하니 사진을 바라봤다.
허벅지의 타투. 어깨의 타투. 골반 옆의 타투.
폰허브 속에서 지겹게 봤던 여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였다.
'잠깐만... 이거, 딥페이크가... 아니었어?'
딥페이크인줄 알았는데. 진짜로. 나랑 이렇게나 닮은 쌍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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