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169화 (169/358)

〈 169화 〉 166. 어딘가 수상쩍은 자들

* * *

손 안에서 계약서가 녹아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샤를이­ 떠났다.

인정하기 싫지만 샤를은 내게 거짓말을 했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고 들키니까 도망쳐 버렸다.

날 보며 웃던 얼굴도 좋아한다는 말도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가슴 속이 불에 데인 것보다 아팠다.

"젠장, 젠자앙­"

깨진 타일에 베였는지 손에서 핏물이 화장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손의 상처는 아프지 않았다. 휴지를 뜯어 핏물을 대강 닦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머릿속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지만 샤를이 준 상처를 끌어안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박성연에게 전화해서 전세금 관련 이야기를 해야 하고.

보험처리에 대해 잘 알만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나는 내가 별 능력이 없다는 걸 안다.

내가 괜히 혼자 해결해 보려다가 일을 더 키울수도 있다.

이럴 땐 누군가를 알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능력이다.

주변에­ 보험 일하는 사람이 있나?

'내 근처엔 없어.'

하지만 영선 누나라면 인맥이 있을 거다.

영선 누나의 복싱 도장은 다니는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그 중에 보험 쪽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

일단 연락하려 했는데, 화장실의 조그만 창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돈부터 받아요?"

아까 사고난 람보르기니 운전자다.

합의에 도움 될 만한 사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변기 위로 올라가 운전자가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관찰했다.

불편한 사람과 통화를 하는지 공손하게 팔다리를 모으고 통화하는 중이었다.

하나라도 놓칠까봐 귀를 기울였다.

"예. 남자 나이요? 군대는 갔다온 것 같은데. 스물 다섯 안 넘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이 이상했다.

"일단 합의금 받지 말고 뻐팅기라구요?

합의금은 받지 말고 수리비만요. 알겠습니다.

계좌는 제걸로 받아요? 아니면 형님 거?"

뭐지? 순간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자기 차가 아닌가? 왜 물어보지?

게다가 다른 사람 계좌로 줘야 한다고?

괜히 이상한 데로 엮이는 거 아냐?

그때 남자의 말이 뚝 그쳤다.

"형님. 잠시만요."

그러며 주변에 누가 없는지 목을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뭔가 켕키는 게 많은 듯한 태도였다.

'젠장, 뭐야?'

이 쪽을 볼 것 같아 목을 쑥 내렸다.

다행히 날 눈치채지 못하고 통화로 돌아갔다.

"예. 예. 알겠습니다. 남자 인적사항 따서 드릴게요.

동주 형님도 오신다고요? 아이고, 제가 다 알아서 잘 할려고 했는데.

예. 잘 모시겠습니다, 형님."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우는지 지독한 냄새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금연 표지가 떡하니 있어도 대놓고 무시한다. 그러며 누군가에게 통화를 건다.

신난 듯한 목소리였다.

"어. 야. 이따가 남자 휴대폰 번호랑 이름 줄 테니까 인적사항이랑 주변사람 싹 따봐.

근데 너 딸내미 사진 봤냐?

그치, 존나 예쁘지?

근데 나 오늘 실물 봤다? 사진보다 더 이쁘던데?

형님이 왜 환장하는지 알겠더라.

하­ 씨바. 빨리 벗겨보고 싶네."

마치 수확물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아마 예림이에 대한 말일 터.

이 새끼. 뭐하는 새끼지?

일단 멀쩡한 놈은 아닌 듯 했다.

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좀 더 몸을 숙였다.

행여 소리가 날까봐­ 조용조용­

그 때, 내가 주먹으로 내리쳤던 부서진 타일 벽 중 하나가 뚝 떨어졌다.

'이런, 씨발­'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떨어지며, 빠각­ 소리가 크게 울렸다.

"뭐야?"

운전자 놈이 의심스레 말했다.

창문 너머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갈을 밟으며 저벅저벅 가까워진다.

앞으로 한 걸음이면 창문으로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화장실 옆 칸에서 누가 창문으로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 금연 구역입니다!"

깜짝 놀라 몸이 뻣뻣이 굳었다.

다행히 운전자는 그 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카악­퉷,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씨발아, 담배피우는 사람 처음 봐?

연기가 들어오면 창을 닫고 똥을 싸세요. 씨발놈아."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틈을 타 잽싸게 화장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며 영선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새끼 하는 짓으로 봐서는 양아치나 조폭일 터.

저놈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내 수준을 파악하고 적절한 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능력이다.

'누나... 빨리...'

다행히 영선 누나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강민아! 왜 전화했어어~ 왜? 놀자구? ]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용건만 바로 전했다.

"아냐. 지금 급해. 친구 부모님이 술 마시고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냈어.

지금 여기 연세 세브란스 병원인데 혹시 도와줄만한 사람 있어?"

[ 뭐? 너는 어디 안 다쳤어? ]

순식간에 영선 누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황 가득한 목소리.

걱정이 듬뿍 묻어있었다. 고마움에 가슴이 울컥했다.

"난 괜찮아. 근데, 운전자가 좀 이상해. 깡패 같아.

혹시 보험이라던가, 그런 거 잘 아는 사람 있어?"

[ 잠깐만 기다려봐. 도와줄 사람 데리고 갈게! 난 10분이면 도착할거야! ]

그러며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전화를 끊고, 응급실 문 너머를 슬쩍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아직도 운전자와 다투고 있는지 시끄러웠다.

"아, 좆같네. 아저씨. 얼굴 봐 놨어. 밤길 조심해!"

"이봐, 당신! 젊은 사람이 버릇없게 그게 뭔가!"

내가 여기서 통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예림이 옆으로 돌아왔다.

응급실 의자로 돌아오고, 30초도 안 돼서 운전자도 들어왔다.

성큼성큼 나와 예림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와서 섰다.

건들거리며 내게 턱짓했다.

"그럼 일단 수리비 합의 먼저 합시다. 내 차 얼만지는 아시나?"

일단 이 놈을 묶어놔야 했다. 최대한 대화를 질질 끌어야지.

"얼만데요?"

"차 값만 삼억 오천이니까. 전세금 언제까지 뺄 거요?

일단 합의서 먼저 씁시다."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합의서를 쓴다. 차량 가격을 삼억 오천으로 보상하겠다는 내용.

빨리 도장찍게 만들고 떠날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일부러 계약서를 다 쓸때까지 기다렸다 트집을 잡았다.

"잠깐만요. 근데 삼억 오천은 신차 값이잖아요.

감가상각 안 해요?"

그러자 양아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럼 이야기를 진작 하던가.

하. 나 참.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돈 다 주겠다고 해놓고는 이렇게 트집잡아서 깎겠다?

람보르기니 한정판이야. 됐어. 우리 그냥 법대로 하자고."

펜을 휙 던지며 강짜를 부렸다. 하지만 내 목표는 시간을 끄는 것.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알았어요. 진정해요. 일단 보험쪽 일하는 사람 불렀으니까. 오면 차근차근 이야기해보죠."

그러자 양아치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뭐요? 아, 이 씨발... 무슨 음주운전 사고에 보험을 불러?

이거 순 배째라는 거 아냐?"

그러더니 예림이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야. 너 이 남자애 말 들을거야? 좆도 모르는데 깝치는 거라니까?

나 합의 안해준다? 너 아빠 구속되는 거 보고 싶어?"

옆의 예림이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아까 통화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놈들은 멀쩡한 놈이 아니다.

지금도 예림이를 건드리는 걸로 봐서 상당히 똥줄이 타고 있는 상태.

보험사라던가, 경찰이 자꾸 얽히면 곤란해 질 게 분명할 부류의 인간이다.

내가 개처럼 쳐맞는 한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그리고, 씨발놈아. 왜 반말이야?

나도 놈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어차피 경찰 왔다면서. 그냥 보험 쪽 끼고 이야기하는 게 편하잖아.

왜? 보험 부르면 곤란해? "

그 말을 들은 예림이 얼굴에 의문을 띄우고 양아치를 올려다봤다.

'그러네? 왜 보험 부르면 안 된다는 거야?' 라는 듯한 표정.

양아치 놈은 흘끔 보고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걸 느꼈는지 내 멱살을 잡았다.

"씨발놈이. 너 몇살이야? 말이 짧다?"

이제는 폭력으로 날 위협할 셈.

지지 않고 멱살을 잡힌 채 양아치를 노려봤다.

샤를과의 계약이 해지되고 나니 이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쳐, 치라고, 이 씨발롬아!

내가 너같은 쓰레기들한테까지 뒤통수 맞을 것 같아?

여기서 죽어도 버틸 거야! 억울한 마음을 담아 소리질렀다.

"먹을 만큼 먹었어, 새끼야. 반말은 니가 먼저 했고!"

놈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래. 맞고 합의 유리하게 가져가지.

나는 충격을 대비하며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그 때 누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민아! 당신! 뭐 하는 짓거리야!"

나와 양아치는 얼굴을 돌렸다. 영선 누나였다.

운동하다 바로 달려왔는지 운동용 레깅스, 스포츠 브라에 바람막이 하나만 걸쳤다.

"손 놔. 다치기 싫으면."

멱살을 거칠게 떼어내며 양아치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양아치는 피식 웃었다. 그러며 날 비웃었다.

"하. 이건 또 누구야. 야, 너 포주냐? 주변에 여자가 왜 이렇게 많아?"

누나의 가슴을 흘끔거리며 건들거린다. 영선 누나의 주먹이 꽉 움츠러든다.

젠장, 영선 누나, 참아요! 폭력 사태에 휘말리게 할 순 없다.

"누나. 하지 마요. 저 괜찮아요. 그보다. 보험 쪽으로 도와주실 분은?"

영선 누나는 간신히 참아낸 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같이 왔어."

"누군데요?"

그때 무뚝뚝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반갑습니다. 사성손보 손해사정사 정민수입니다."

정중한 인사였다.

킹스맨에 나올 만한 도수 없는 반무테 금색 안경. 큰 눈.

긴 팔다리와 스트라이프 양복.

어라. 어디서 본 분 같은데?

"누군지 몰라? 민수 오빠잖아."

엥? 그 말레이곰 닮은 형? 우리 이사도 도와줬던?

자세히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엘리트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원래 직업이 있는 분이셨구나...난 그냥 운동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강민. 자네 몹시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내게 핀잔을 준 민수 형은 우리 사이에 솜씨 좋게 끼어들며 서류 가방을 올려놨다.

그러며 양아치를 보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듣고 왔습니다. 일단 수리비 산정부터 시작할 건데요. 차량번호 좀 알려주시죠."

그러자 앞의 양아치가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속으로 투지를 다졌다.

이 새끼야. 남의 돈을 날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딱 보니까 니네 이상한 놈들 같은데. 한번 해 보자고.

내가 쓸 수 있는 건 다 써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말겠어.

돈이든, 인맥이든. 몸으로 구르든­ 최대한 엿을 먹여 줄게.

샤를한테 속았던 것처럼­ 멍청하게 또 속진, 않을 거야. 이 개자식들아.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