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 166. 어딘가 수상쩍은 자들
* * *
손 안에서 계약서가 녹아 공기중으로 흩어진다.
샤를이 떠났다.
인정하기 싫지만 샤를은 내게 거짓말을 했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고 들키니까 도망쳐 버렸다.
날 보며 웃던 얼굴도 좋아한다는 말도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가슴 속이 불에 데인 것보다 아팠다.
"젠장, 젠자앙"
깨진 타일에 베였는지 손에서 핏물이 화장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손의 상처는 아프지 않았다. 휴지를 뜯어 핏물을 대강 닦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머릿속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지만 샤를이 준 상처를 끌어안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박성연에게 전화해서 전세금 관련 이야기를 해야 하고.
보험처리에 대해 잘 알만한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해야 했다.
나는 내가 별 능력이 없다는 걸 안다.
내가 괜히 혼자 해결해 보려다가 일을 더 키울수도 있다.
이럴 땐 누군가를 알고 도움을 청하는 것도 능력이다.
주변에 보험 일하는 사람이 있나?
'내 근처엔 없어.'
하지만 영선 누나라면 인맥이 있을 거다.
영선 누나의 복싱 도장은 다니는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그 중에 보험 쪽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
일단 연락하려 했는데, 화장실의 조그만 창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일단 돈부터 받아요?"
아까 사고난 람보르기니 운전자다.
합의에 도움 될 만한 사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변기 위로 올라가 운전자가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관찰했다.
불편한 사람과 통화를 하는지 공손하게 팔다리를 모으고 통화하는 중이었다.
하나라도 놓칠까봐 귀를 기울였다.
"예. 남자 나이요? 군대는 갔다온 것 같은데. 스물 다섯 안 넘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이 이상했다.
"일단 합의금 받지 말고 뻐팅기라구요?
합의금은 받지 말고 수리비만요. 알겠습니다.
계좌는 제걸로 받아요? 아니면 형님 거?"
뭐지? 순간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자기 차가 아닌가? 왜 물어보지?
게다가 다른 사람 계좌로 줘야 한다고?
괜히 이상한 데로 엮이는 거 아냐?
그때 남자의 말이 뚝 그쳤다.
"형님. 잠시만요."
그러며 주변에 누가 없는지 목을 쭉 빼고 이리저리 둘러본다.
뭔가 켕키는 게 많은 듯한 태도였다.
'젠장, 뭐야?'
이 쪽을 볼 것 같아 목을 쑥 내렸다.
다행히 날 눈치채지 못하고 통화로 돌아갔다.
"예. 예. 알겠습니다. 남자 인적사항 따서 드릴게요.
동주 형님도 오신다고요? 아이고, 제가 다 알아서 잘 할려고 했는데.
예. 잘 모시겠습니다, 형님."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우는지 지독한 냄새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금연 표지가 떡하니 있어도 대놓고 무시한다. 그러며 누군가에게 통화를 건다.
신난 듯한 목소리였다.
"어. 야. 이따가 남자 휴대폰 번호랑 이름 줄 테니까 인적사항이랑 주변사람 싹 따봐.
근데 너 딸내미 사진 봤냐?
그치, 존나 예쁘지?
근데 나 오늘 실물 봤다? 사진보다 더 이쁘던데?
형님이 왜 환장하는지 알겠더라.
하 씨바. 빨리 벗겨보고 싶네."
마치 수확물을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아마 예림이에 대한 말일 터.
이 새끼. 뭐하는 새끼지?
일단 멀쩡한 놈은 아닌 듯 했다.
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좀 더 몸을 숙였다.
행여 소리가 날까봐 조용조용
그 때, 내가 주먹으로 내리쳤던 부서진 타일 벽 중 하나가 뚝 떨어졌다.
'이런, 씨발'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떨어지며, 빠각 소리가 크게 울렸다.
"뭐야?"
운전자 놈이 의심스레 말했다.
창문 너머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갈을 밟으며 저벅저벅 가까워진다.
앞으로 한 걸음이면 창문으로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때, 화장실 옆 칸에서 누가 창문으로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 금연 구역입니다!"
깜짝 놀라 몸이 뻣뻣이 굳었다.
다행히 운전자는 그 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카악퉷,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이 씨발아, 담배피우는 사람 처음 봐?
연기가 들어오면 창을 닫고 똥을 싸세요. 씨발놈아."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틈을 타 잽싸게 화장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며 영선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새끼 하는 짓으로 봐서는 양아치나 조폭일 터.
저놈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나 혼자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내 수준을 파악하고 적절한 때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능력이다.
'누나... 빨리...'
다행히 영선 누나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강민아! 왜 전화했어어~ 왜? 놀자구? ]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용건만 바로 전했다.
"아냐. 지금 급해. 친구 부모님이 술 마시고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냈어.
지금 여기 연세 세브란스 병원인데 혹시 도와줄만한 사람 있어?"
[ 뭐? 너는 어디 안 다쳤어? ]
순식간에 영선 누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황 가득한 목소리.
걱정이 듬뿍 묻어있었다. 고마움에 가슴이 울컥했다.
"난 괜찮아. 근데, 운전자가 좀 이상해. 깡패 같아.
혹시 보험이라던가, 그런 거 잘 아는 사람 있어?"
[ 잠깐만 기다려봐. 도와줄 사람 데리고 갈게! 난 10분이면 도착할거야! ]
그러며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전화를 끊고, 응급실 문 너머를 슬쩍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아직도 운전자와 다투고 있는지 시끄러웠다.
"아, 좆같네. 아저씨. 얼굴 봐 놨어. 밤길 조심해!"
"이봐, 당신! 젊은 사람이 버릇없게 그게 뭔가!"
내가 여기서 통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예림이 옆으로 돌아왔다.
응급실 의자로 돌아오고, 30초도 안 돼서 운전자도 들어왔다.
성큼성큼 나와 예림이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와서 섰다.
건들거리며 내게 턱짓했다.
"그럼 일단 수리비 합의 먼저 합시다. 내 차 얼만지는 아시나?"
일단 이 놈을 묶어놔야 했다. 최대한 대화를 질질 끌어야지.
"얼만데요?"
"차 값만 삼억 오천이니까. 전세금 언제까지 뺄 거요?
일단 합의서 먼저 씁시다."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합의서를 쓴다. 차량 가격을 삼억 오천으로 보상하겠다는 내용.
빨리 도장찍게 만들고 떠날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일부러 계약서를 다 쓸때까지 기다렸다 트집을 잡았다.
"잠깐만요. 근데 삼억 오천은 신차 값이잖아요.
감가상각 안 해요?"
그러자 양아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럼 이야기를 진작 하던가.
하. 나 참. 이럴 줄 알았어.
결국 돈 다 주겠다고 해놓고는 이렇게 트집잡아서 깎겠다?
람보르기니 한정판이야. 됐어. 우리 그냥 법대로 하자고."
펜을 휙 던지며 강짜를 부렸다. 하지만 내 목표는 시간을 끄는 것.
지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다 하고 있다.
"알았어요. 진정해요. 일단 보험쪽 일하는 사람 불렀으니까. 오면 차근차근 이야기해보죠."
그러자 양아치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뭐요? 아, 이 씨발... 무슨 음주운전 사고에 보험을 불러?
이거 순 배째라는 거 아냐?"
그러더니 예림이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야. 너 이 남자애 말 들을거야? 좆도 모르는데 깝치는 거라니까?
나 합의 안해준다? 너 아빠 구속되는 거 보고 싶어?"
옆의 예림이 몸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아까 통화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놈들은 멀쩡한 놈이 아니다.
지금도 예림이를 건드리는 걸로 봐서 상당히 똥줄이 타고 있는 상태.
보험사라던가, 경찰이 자꾸 얽히면 곤란해 질 게 분명할 부류의 인간이다.
내가 개처럼 쳐맞는 한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그리고, 씨발놈아. 왜 반말이야?
나도 놈의 신경을 살살 긁었다.
"어차피 경찰 왔다면서. 그냥 보험 쪽 끼고 이야기하는 게 편하잖아.
왜? 보험 부르면 곤란해? "
그 말을 들은 예림이 얼굴에 의문을 띄우고 양아치를 올려다봤다.
'그러네? 왜 보험 부르면 안 된다는 거야?' 라는 듯한 표정.
양아치 놈은 흘끔 보고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 걸 느꼈는지 내 멱살을 잡았다.
"씨발놈이. 너 몇살이야? 말이 짧다?"
이제는 폭력으로 날 위협할 셈.
지지 않고 멱살을 잡힌 채 양아치를 노려봤다.
샤를과의 계약이 해지되고 나니 이젠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쳐, 치라고, 이 씨발롬아!
내가 너같은 쓰레기들한테까지 뒤통수 맞을 것 같아?
여기서 죽어도 버틸 거야! 억울한 마음을 담아 소리질렀다.
"먹을 만큼 먹었어, 새끼야. 반말은 니가 먼저 했고!"
놈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래. 맞고 합의 유리하게 가져가지.
나는 충격을 대비하며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그 때 누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강민아! 당신! 뭐 하는 짓거리야!"
나와 양아치는 얼굴을 돌렸다. 영선 누나였다.
운동하다 바로 달려왔는지 운동용 레깅스, 스포츠 브라에 바람막이 하나만 걸쳤다.
"손 놔. 다치기 싫으면."
멱살을 거칠게 떼어내며 양아치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양아치는 피식 웃었다. 그러며 날 비웃었다.
"하. 이건 또 누구야. 야, 너 포주냐? 주변에 여자가 왜 이렇게 많아?"
누나의 가슴을 흘끔거리며 건들거린다. 영선 누나의 주먹이 꽉 움츠러든다.
젠장, 영선 누나, 참아요! 폭력 사태에 휘말리게 할 순 없다.
"누나. 하지 마요. 저 괜찮아요. 그보다. 보험 쪽으로 도와주실 분은?"
영선 누나는 간신히 참아낸 듯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같이 왔어."
"누군데요?"
그때 무뚝뚝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반갑습니다. 사성손보 손해사정사 정민수입니다."
정중한 인사였다.
킹스맨에 나올 만한 도수 없는 반무테 금색 안경. 큰 눈.
긴 팔다리와 스트라이프 양복.
어라. 어디서 본 분 같은데?
"누군지 몰라? 민수 오빠잖아."
엥? 그 말레이곰 닮은 형? 우리 이사도 도와줬던?
자세히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엘리트같은 모습이었다.
근데 원래 직업이 있는 분이셨구나...난 그냥 운동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강민. 자네 몹시 실례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내게 핀잔을 준 민수 형은 우리 사이에 솜씨 좋게 끼어들며 서류 가방을 올려놨다.
그러며 양아치를 보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듣고 왔습니다. 일단 수리비 산정부터 시작할 건데요. 차량번호 좀 알려주시죠."
그러자 앞의 양아치가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속으로 투지를 다졌다.
이 새끼야. 남의 돈을 날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딱 보니까 니네 이상한 놈들 같은데. 한번 해 보자고.
내가 쓸 수 있는 건 다 써서. 어떻게든 해결하고 말겠어.
돈이든, 인맥이든. 몸으로 구르든 최대한 엿을 먹여 줄게.
샤를한테 속았던 것처럼 멍청하게 또 속진, 않을 거야. 이 개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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