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161. 예림이는 처녀가 XX었습니다!!!!!!
* * *
통화 연결음이 멈추는 순간 침이 마르고 심장이 팽팽히 조여들었다.
화면이 00:00으로 통화 시작을 알렸다.
예림이가 말하기 직전의 빈 순간이 영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강민 오빠?"
가슴 속에서 찌르르한 아픔이 느껴졌다.
옛날에 날 거부했던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데 예림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소의 밝고 쾌활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어둡고 깊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
불길함이 느껴졌다.
마른 입을 떼고 용건을 숨겼다.
"잘 지내나 전화해 봤어. 어떻게 지내?"
천칭에서 예림의 이름이 나온 게 실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별 일 없어요. 무슨 일이세요? 란 말을 듣고 싶었다.
예림이는 평소대로 잘 지내고 있겠지.
하지만 기대는 언제나 나를 배반하는 법.
내가 묻자마자 전화 너머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정신이 아찔해졌다. 예림이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게 전해졌다.
한참 동안 예림은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전화로는 이야기가 불가능해서, 예림이에게 지금 어딘지 물어보고 근처의 카페로 나오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즉시 움직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뭐지?'
택시를 타고 가며, 문자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지만 예림은 묵묵부답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천칭이 한 말, 그리고 박성연이 한 말이 계속 메아리쳤다.
[ 악마를 믿지 마라. 그들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 ]
등에서 자꾸 땀이 흘렀다.
만약 샤를이 지금까지 했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면?
샤를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조차 거짓말이라면?
'아냐... 그럴 리 없어...'
애써 부정하며 카페에 도착해 미리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플랫화이트요. 휘핑 올려서요."
주문한 걸 받고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속이 탄다. 옆의 유리를 보며 겉모습을 다듬었다.
머리는 뜬 데 없고 옷도... 이상 없음.
최소한 초라하게 보이진 말아야 하는데
그때 출입문에서 차임벨이 딸랑거리고 문이 열렸다.
긴 생머리, 간소한 옷차림이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몸매.
예림이었다.
하지만 많이 지쳐 보인다. 눈 밑의 다크서클. 파리해진 얼굴. 얇아진 턱선.
'그래도 여전히...예쁘네.'
심장이 꽈악 조여들었다.
예림이가 왜 저렇게 피폐해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묻기 너무 두려웠다.
하지만 들어야 한다. 간신히 입을 열어 불렀다.
"여기야."
예림이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녀의 눈은 엄청 울었는지 아직도 엉망으로 부어 있다.
화장기조차 없는 파리한 얼굴.
"..."
음료를 앞으로 밀어줬지만 손도 대지 않는다.
나도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입만 다물고 있기를 한참.
그녀가 폰 잠금을 풀고 내 앞에 던졌다.
"해명해요."
예림의 얼굴을 한 샤를이 나오는 폰허브 썸네일이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예림이가 이걸 어쩌다 본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예림이 인지저해를 뚫고 모든 걸 봤다는 거다.
일단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첫째 가능성. 예림이 본인이 봐서 인지저해가 안 걸린건가?
둘째 가능성. 샤를이 맨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건가?
인지저해따위 없이 나에게만 통하는 마법을 걸은 걸수도 있다.
침이 말라왔다. 저 영상에 대해 어떻게든 해명해야했다.
일단 여자가 누구인지부터 말하기로 했다.
"예림아. 솔직히 안 믿길 수도 있는데. 너랑 진짜 쌍둥이처럼 닮은 여자가 있어. 걔랑 찍은 거야."
하지만 예림이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영상의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럼 여기 나오는 남자는, 오빠 맞단 이야기네요?
진짜예요? 오빠가 이 야동 찍은 거예요?"
나는 더 당황했다.
인식저해가 있는데, 어떻게 나란 걸 알아본거지?
두번째 가정이 맞은 건가? 설마 샤를이 제대로 된 마법을 안 걸어준 거야?
혼란에 빠진 머릿속은 변명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예림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자신과 닮은 여자와 찍었단 말을 믿지 않고 내게 소리쳤다.
"오빠. 저랑 똑같이 닮은 사람이 있단 걸 믿으라구요?
솔직히 말해요. 이거 딥페이크죠?
그냥 아무 여자랑 자고 제 얼굴 합성해서 뿌린 거죠?"
딥페이크라니. 그건 정말 아니었다.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진짜 아니야! 내가 사진 보여줄 수도 있어! 봐봐!"
샤를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예림이 얼굴을 하고 있을 시절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예림에겐 불신만 더 깊어진 모양이다. 그녀의 눈에 그늘이 졌다.
"...오빠. 저 믿게 만드려고 이런 것까지 만들었어요?
알았어요. 그럼 이 여자랑 영상통화 해봐요. 한번 보게요."
등 뒤에 땀이 흘렀다. 지금 샤를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샤를에게 카톡을 날렸다.
[ 예림이 모습으로 바꾸고 통화좀 받아줘 ]
그리고 바로 전화했다.
만약 샤를 모습으로 받는다면 최대한 빨리 형상변환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샤를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젠장... 안 받는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 받네."
"그러시겠죠."
내 말을 아예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예림아. 진짜로. 이거 딥페이크, 합성, 그런 거 아니야. 진짜 너랑 닮은 사람일 뿐이거든?"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예림이 차가운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닮은 사람이라고 쳐요. 그럼 오빠도 생각했을 거 아니예요.
'아, 이 여자 얼굴을 성인 사이트에 올리면 예림이가 곤란하겠지?'
이런 생각조차 안 했던 거예요?"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인식 저해를 걸긴 했지만, 예림이가 그걸 믿겠는가?
샤를이라는 악마를 만났다는 것부터 설명해야 하나?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예림이는 말문이 막힌 날 보며 공허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고백 안 받아줘서 딥페이크 만들어서 뿌린 거라고 해요.
그게 서로 마음 덜 다치니까."
그러다 갑자기 예림이의 어깨가 떨렸다.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흐느끼는 중이었다.
황급히 휴지를 뽑아 건네줬지만 예림은 내 손을 탁 쳐냈다.
그러며 악에 받힌 목소리로 말을 짜냈다.
"오빠도 그 소문을 믿었어요?"
무슨 소문?
"제가. 이 남자 저 남자 다 찔러보고 다니는 걸레라는 소문이요.
동아리방에서 나온 팬티 예림이 거래, 이런 것도 있었고.
제 집에 남자가 매일 바뀌어서 드나든다는 말도 들어봤고.
제가 사장님한테 꼬리친다고도 했고.
설마 그걸 믿었던 거예요?
그래서 오빠한테만 안 대줬다고 화난 거예요? 내가 미웠어요?
이런 영상까지 만들 정도로?"
갑자기 샤를이 한 말이 떠올랐다.
'오빠, 예림이는 전남친이랑 질싸 후싸 다 해본 걸레라니까요?'
왜 난 샤를의 말을 믿었었을까?
예림이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건
"그런 소문... 안 믿었..."
소문을 안 믿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목에서 턱 걸렸다.
너무나 위선적이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난 샤를의 말을 믿었고, 내가 일하던 카페 안에서 돌던 소문을 믿었었다.
예림이를 한번 더 만나서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그냥 예림이를 걸레라고 생각했다. 인식저해를 걸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 샤를이 자기만 봐 달라고 할때 난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래, 걸레 예림이는 잊자' 이렇게 생각했지.
나는 예림이가 걸레라고 믿었었다. 사실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걸 보고 예림이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며 내게 소리쳤다.
"난 오빠가 그런 소문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랑 이야기도 많이 했으면서, 왜 그런 걸 믿어요?
왜 내 말은 안 믿고 소문을 믿냐구요...!"
할 말이 없다.
맞아. 예림이를 좋아하기 전에도, 예림이는 좋은 후배였고. 내게 상냥했다.
항상 말 걸어주고. 먼저 관심가져주는 그런 후배였는데. 난 왜 그랬지?
왜 샤를의 말을 믿었을까.
예림이 울며 소리쳤다.
"내가 오빠 믿은 게, 너무 후회가 돼
나한테 이런 짓거리 할 줄 알았으면, 아예 말조차 안 걸었을 텐데!"
자신이 등장하는 야동을 내게 보여주며, 입술을 꽉 깨물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얼굴에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펑펑 울어서 새빨간 눈. 가늘게 떨리는 입.
예림은 마음 속의 말들이 펑펑 터져나오는 지 내 손을 꽉 붙잡고 외쳤다.
"알려 줘요? 알고 싶어요?내가 걸레인지 아닌지?"
머리가 띵해진다.
예림이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외쳤다.
"나 남자 한 번도 안 만나봤어요. 웃기죠?"
예림이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눈 안에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날 바라본다.
아, 이건 진실이구나.실감이 났다.
그리고 무릎 밑으로, 뼈가 모조리 녹아 사라지는 것 같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내가 반석처럼 믿고 있던 단단한 사실이라는 게, 사실은 거짓말로 이루어진 모래더미였다니.
눈을 잠시 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예림이가 계속 말했다.
"근데 오빠한테 이런 취급 받을 거였으면, 정말로 다 만나고 다니는 게 나았을까봐.
유일하게 나한테 사심 없이 친절했던... 오빠도 날 안 믿고... 고백 거절했다고... 이런 거나 만드는데...
내가. 왜. 사람을... 믿어야 해..."
예림은 나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정말로 슬퍼하는 중이었다.
엉엉 울며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나는 죄책감에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었을까.
게다가 예림이는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제 연락은 왜 다 무시했어요?"
"뭐...? 연락한 적이... 없는데?"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그러자 예림이 폰을 뺏어간다. 나에게 폰을 열라고 했다.
열어주자 폰을 뒤지며 통화 목록, 카카오톡 목록을 훑어내려간다.
"하, 이것 봐."
예림의 목소리가 한 겨울 꽁꽁 언 강물처럼 차가웠다.
예림이가 내 카톡을 들이밀었다.
차단 목록에 이예림, 세 글자가 똑똑히 보였다.
"잠깐만. 나 차단한 적 없어."
"웃기시네. 오빠 진짜 뻔뻔하다. 내 얼굴로 딥페이크 만들고 차단한 거잖아요."
그리고 통화목록으로 넘어간다.
통화 목록에도 예림이가 차단되어있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나 아냐. 진짜로."
패닉에 빠져 손이 벌벌 떨렸다. 난... 차단한 적이 없다.
그럼 누가 내 폰에서 예림이를 차단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건 한 사람뿐이다.
샤를.
내 휴대폰에, 지문을 등록해 놓고. 언제든지 휴대폰을 열 수 있게 해놨던 샤를.
샤를. 설마.
네가 그런거니?
나는 혼란에 빠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독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나에게 한 거짓말들이 얼마나 많은 거지?
날 사랑한다고 했던 말은 사실일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들이 나를 덮쳤다.
혼란에 빠진 나를 보고 예림이 차갑게 말했다.
"오빠. 진짜로 최악이예요."
하지만 오늘 최악의 일은 남아있었다.
예림이 폰으로 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전화번호.
예림이는 일어서서 등을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네. 맞아요.
어디시라구요? 예?
잠깐... 잠깐만요..."
가슴을 움켜쥔 채 얼굴이 창백해진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손이 벌벌 떨린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잘 안 가"
그러며 옆의 의자를 짚고 기대 숨을 몰아쉬었다.
과호흡 증상. 몸이 흔들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예림아! 무슨 일이야!"
간신히 받아냈다. 그런데 손 아래로 전해지는 몸이 너무나 가볍다.
등의 뼈가 만져질 정도.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일까? 설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예림이를 의자에 눕히고 전화를 대신 받았다.
아아, 이 전화에선예림이가 마른 것 따윈 희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절망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 여기 연세세브란스 병원인데요. 이하문씨 따님, 이예림 양 맞으시죠?
지금 예림 양 아버님, 어머님이 교통사고로 실려와 있어요
이예림 양. 수술 동의서 써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와 주세요.
저, 그리고. 이게... 말씀하기 좀 그런데.
두 분 다 술을 드신 상태로 운전을 하셨어요.
경찰도 와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상대방 운전자도 많이 다쳐서 ]
전화를 끊은 나는 얼이 빠졌다.
아아.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절망에 빠진 채, 예림이를 택시에 싣고 같이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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