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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163화 (163/358)

〈 163화 〉 160. 찐예림에게 전화하자

* * *

“야! 니가 물어보면 어떻게 해! 이런, 답해주지 마세요!”

아나이스는 천칭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지만, 천칭에서 꺼져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음물 속에 들어간 것 같이 차가워 지는 음색이었다.

“이­예­림.”

뭐? 예림이?

등골이 서늘했다.

예림이한테 실수한 게 있나? 예림이의 얼굴로 야동을 찍은 게 잘못? 아니면 데이트를 한 것?

그게 정확히 무슨 죄인지를 말해주지 않아 답답했다.

천칭에 귀를 더 기울였다. 천칭은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샤를을 믿지?

박성현이 한 말을 ... 기억해라.

악마는­항상­”

무언가 더 이야기할게 있는지, 천칭이 끼익끼익 움직인다.

“악마는 항상, 뭐요?”

물어보는 순간 내 손목의 룬 문자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퍼져나왔다.

천칭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빛의 범위가 점점 커진다. 모닥불 정도의 크기까지 퍼지고, 빛도 강해진다.

아나이스와 나는 둘 다 당황해서 소리질렀다.

“어, 어? 이거 왜 이래?”

“당신!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안 멈춰?”

“나, 나도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겠어!”

나는 갑자기 발광하는 룬문자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멈춰, 멈추라고! 손목을 손으로 가려서 빛을 못 나오게 해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는 듯 했다. 계속 빛났다.

어지러이 춤추듯 내 주변을 돈다.

‘젠장, 이게 대체 뭔­’

“기다려 봐!”

아나이스가 뭔가 중얼거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젠장, 반항하겠다 이거지! 어림도 없어! 아조트­ 세크라­ 아르멘티­”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아나이스가 주문을 외우는 중간에 빛이 바로 뚝 꺼졌다.

천칭도 끼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침묵했다.

아나이스는 내 손목을 잡은 채 차갑게 바라봤다.

“당신...이게 뭐하는 짓이지...?”

아나이스는 화를 내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아냐. 나도 억울해!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고!

다행히도 아나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깊이 생각에 빠진 표정.

아나이스가 조용해 지자 나에게도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천칭이 뭐랬더라?’

천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곱씹어 봤다.

‘예림이 이름을 불렀지? 걔가 내 죄와 관련이 있나?’

그리고 천칭이 한 말. 박성연이 한 말을 명심하라고 했었는데.

박성연이 뭐라고 했었지? 기억이 안 나는데?

희미한 강원도 저택의 기억을 떠올리려 해 봤지만 물을 움켜쥐는 것처럼 소용이 없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한 아나이스의 탓도 있다.

“아­ 젠장! 김강민 당신, 당장 데려오라고 했는데! 천칭 다시 쓰려면 일주일은 걸린단 말야! 당신의 멍청한 질문 때문에 이게 뭐야!”

아나이스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하지만 나로써는 해 줄 말이 없다.

그녀는 제 풀에 지처 씨근대며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직접 조사해서 성당기사단으로 압송해 주지.

천칭은 네가 아는 죄가 없다고 했지? 분명히 잘못이 있다는 거야.

네가 모르는 뭔가 있겠지. 조금만 기다려. 후회하게 해주마. 이예림이라고 했지?

걔랑 무슨 사이야?”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는데?”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예림이를 만나서 먼저 사정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다행히도 옳은 선택인 것 같았다. 아나이스가 화를 내는 걸 보니.

“끝까지 말 안 하겠다 이거지? 좋아. 시간만 좀 더 끌릴 뿐이야.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 하지만 네 귀여운 서큐버스에게 작별인사를 미리 하는 게 좋을걸.

앞으로 평생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다. 어쩌면 너희 둘 모두 성당기사단 지하에서 보게 될 수도.

그게 싫으면 알아서 협조하던가.”

그러고 나선 일어서서,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아무래도 나를 추궁해 봤자 나올 건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마지막 순간을 즐겨.”

그렇게 말하며, 조그맣게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부른다.

아멘.

“어­ 어?”

세상이 깜깜해졌다. 소리가 늘어났다 줄어들고, 빛은 새까맣게 타올랐으며 반고리관이 핑핑 돈다.

중력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 누가 날 통 세탁기 안에 돌고 빙빙 돌리는 듯 하다. 360도를 넘어 2040도까지 빙빙 회전하고 구토기가 확 올라왔다.

아찔한 감각에 눈을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제발, 누가, 좀 구해줘.

그때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저 어디 안 가요. 손을 왜 이렇게 꽉 잡아.”

어라?

샤를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샤를의 얼굴이 시선을 가득 메웠다.

뭐지? 방금까지 수녀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혼란에 빠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직도 조개 모양 튜브 위였다.

물 아래에선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물을 끼얹는 중.

아무래도 아나이스와 이야기한 시간은 아주 순간이었나 보다. 체감상으로는 20분은 넘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성당기사단의 무시무시한 능력에 몸이 덜덜 떨렸다.

잘못했으면 그대로 잡혀갔을 수도 있는데.

두려움에 풀사이드를 훑어봤지만 아까 보였던 외국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한지, 샤를이 걱정스레 물으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파요?”

따뜻한 감각이 이마를 간지럽힌다.

“열은 없는데...”

정신을 차리자 샤를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손을 잡고 온도를 재는 중이었다.

하지만 난 정신이 없었다. 결계 속의 생생한 환상을 되짚어보느라 모든 뇌세포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까 천칭이 뭐라고 했지?’

박성연이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했어. 기억해 내. 박성연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샤를이 걱정하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 투명하고 티 없어보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박성연이 남긴 말이 천둥처럼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 악마는 항상 거짓말을 하는 존재야. ]

샤를이 날 바라본다.

보라색 눈으로, 상냥하게 날 바라본다.

하지만 상냥함 아래에 뭔가 있는 듯 하다. 샤를이 입을 연다.

“오빠, 근데 아까 마법 발동하지 않았어요? 잠깐 마력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무슨 일 없었어요?”

“어? 어... 아까...”

갑자기, 아까의 상황이 생각난다.

천칭이 말을 하려는 순간 샤를이 건 마법이 빛났지.

‘마치­ 그건­ 말을 못 듣게 하려는 것처럼­’

갑자기 목이 탔다.

천칭도, 박성연도 내게 경고했어. 샤를을 믿지 말라고.

대체 왜 그랬을까?

이 말을 듣자... 샤를의 미소가, 날 걱정하는 얼굴이 두렵게 느껴진다.

왜 옛날 사람들은 악마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파우스트는 어째서 영혼을 빼앗겼을까?

악마와 얽힌 자들은 왜 자신의 몸이 묻힐만한 땅만 가진 채 죽었을까?

순간 샤를이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져서 슬쩍 손을 뺐다.

샤를은 눈치채지 못하고 내 몸 여기저길 더듬었다. 아프지 않은지 걱정하며.

하지만 난­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아무래도 예림이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

아나이스는 둘의 모습을 보며 손톱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아까 팔목에서 빛나는 거 봤어요? 서큐버스가 한 짓이예요.

천칭이 말하는 걸 끊어냈죠? 마력을 퍼부어서 신성력을 지워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호위기사는 서큐버스가 쓴 마법보다, 아나이스의 언동에 더 주의를 뒀다.

아나이스의 말은 너무 과했다. 마치 성당 기사단이 그들을 가두고 겁박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저, 아나이스 자매. 괜히 저들을 협박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서로 얼굴 붉히면 좋을 일 없지 않습니까. 주교님도 빨리 데려오라고만 하셨지, 이런 방식까진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교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아나이스의 이마에 힘줄이 팍 솟았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젠장! 내가 그 늙은이들 비위까지 맞춰야 해? 여기 한국까지 와서?

애초에 체포허가도 안 내줬으면서! 악마 추종자들에겐 물렁하게 굴고, 나한텐 빨리 일을 하라고 닥달하고!”

호위기사에 대한 존칭도 잊은 채 무례하게 소리를 질러댄다.

엄밀하게 따지면, 천칭을 잘 이용했으면 샤를이나 김강민 중 하나는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천칭이 내린 판결은 체포허가와 다를 바 없으니까.

이건 천칭의 질문 중 두 번을 이상하게 써 버린 건 아나이스의 탓이다.

‘실력은 있다지만... 정말 제멋대로군.’

호위임무를 맡은 기사는 이마를 찌푸렸다.

독선적이고 제멋대로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막 나가는 자매일 줄은.

게다가 주교의 정책에 대한 폭언, 험담은 위험 수위였다.

마법사, 악마 협력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대하는 건 그들이 위험하지 않아서다.

진짜 위험한 자들은 수면 아래서 살인 서클, 인신공양 제단등을 만드는 미친놈들.

협력자들을 잘 구슬려 놓으면 그들도 미친 놈에 대한 정보를 알아서 가져다준다.

이슬람 신도들이 이슬람 과격분자를 FBI에 신고하는 것처럼. 그들도 선을 넘는 자들을 꺼려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협력하는 관계인데, 아나이스처럼 화형시키자고 날뛰는 건 곤란하다. 호위기사가 그녀를 말렸다.

“아나이스 자매. 진정하세요. 다 주교께서도 뜻이 있어서 그런­”

“됐어요! 듣고싶지 않아요. 이예림과 샤를! 둘 다 조사해서 가지고 와! 추후 계획은 내가 정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호위기사는 피곤한 듯 말했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몸을 홱 돌려 풀파티 장을 떠나려 했다.

“저, 그래도 이왕 오신 김에 좀 즐기다 가시는 건...”

호위기사가 권유해 봤다.

아나이스도 세상에 한참 관심 많을 이십대.

수도원 안에서 마법과 신앙만 공부하다 보니 악마 추종자는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는 과격 신앙에 빠진 것이다.

조금이나마 교정할 수 있을까 싶어 권유해 봤지만­

“됐어요. 이런 음심으로 가득한 자리는 별로 있고 싶지 않네요.”

벌써부터 사람들은 수녀복을 입은 아나이스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아나이스는 수녀복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풍만한 몸매를 팔로 감싸며 질색했다.

“정말이지... 무례하긴...”

그러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종자는 그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저, 아나이스 수녀님, 저래도 괜찮습니까? 주교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종자가 호위기사에게 묻자 호위기사는 손가락을 들어 쉿. 표시를 했다.

“주제넘는 질문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성당기사단에 보고하는 것 뿐.”

“죄, 죄송합니다!”

종자가 쩔쩔맨다. 하지만 답답한 건 호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이스 수녀. 정말 그렇게 행동하다 곤란해 질 수도 있어요.’

호위기사는 사라진 아나이스 쪽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

반얀트리 스위트 룸. 솔직히 좋긴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온갖 생각이 떠도느라 섹스도 그렇게 많이 하진 못했다(겨우 여섯 번 정도).

샤를은 내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훨씬 정성스레 봉사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엔 엄청난 폭음으로 끝나버렸고, 그렇게 레이트 체크아웃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를은 내 옆에 계속 기웃거리며 화난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손을 저었다.

박성연이랑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외출하며 유다 누나랑 좀 놀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밖에 나와 한숨을 쉰다.

이예림. 이 이름에 전화를 걸기 두렵지만.

결국은 통화를 해 봐야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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