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160. 찐예림에게 전화하자
* * *
“야! 니가 물어보면 어떻게 해! 이런, 답해주지 마세요!”
아나이스는 천칭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지만, 천칭에서 꺼져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음물 속에 들어간 것 같이 차가워 지는 음색이었다.
“이예림.”
뭐? 예림이?
등골이 서늘했다.
예림이한테 실수한 게 있나? 예림이의 얼굴로 야동을 찍은 게 잘못? 아니면 데이트를 한 것?
그게 정확히 무슨 죄인지를 말해주지 않아 답답했다.
천칭에 귀를 더 기울였다. 천칭은 점점 더 작아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샤를을 믿지?
박성현이 한 말을 ... 기억해라.
악마는항상”
무언가 더 이야기할게 있는지, 천칭이 끼익끼익 움직인다.
“악마는 항상, 뭐요?”
물어보는 순간 내 손목의 룬 문자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퍼져나왔다.
천칭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빛의 범위가 점점 커진다. 모닥불 정도의 크기까지 퍼지고, 빛도 강해진다.
아나이스와 나는 둘 다 당황해서 소리질렀다.
“어, 어? 이거 왜 이래?”
“당신!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안 멈춰?”
“나, 나도 어떻게 멈추는지 모르겠어!”
나는 갑자기 발광하는 룬문자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멈춰, 멈추라고! 손목을 손으로 가려서 빛을 못 나오게 해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는 듯 했다. 계속 빛났다.
어지러이 춤추듯 내 주변을 돈다.
‘젠장, 이게 대체 뭔’
“기다려 봐!”
아나이스가 뭔가 중얼거리며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난다.
“젠장, 반항하겠다 이거지! 어림도 없어! 아조트 세크라 아르멘티”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아나이스가 주문을 외우는 중간에 빛이 바로 뚝 꺼졌다.
천칭도 끼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침묵했다.
아나이스는 내 손목을 잡은 채 차갑게 바라봤다.
“당신...이게 뭐하는 짓이지...?”
아나이스는 화를 내려는 듯 이마를 찡그렸다. 아냐. 나도 억울해!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고!
다행히도 아나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깊이 생각에 빠진 표정.
아나이스가 조용해 지자 나에게도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천칭이 뭐랬더라?’
천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곱씹어 봤다.
‘예림이 이름을 불렀지? 걔가 내 죄와 관련이 있나?’
그리고 천칭이 한 말. 박성연이 한 말을 명심하라고 했었는데.
박성연이 뭐라고 했었지? 기억이 안 나는데?
희미한 강원도 저택의 기억을 떠올리려 해 봤지만 물을 움켜쥐는 것처럼 소용이 없었다.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한 아나이스의 탓도 있다.
“아 젠장! 김강민 당신, 당장 데려오라고 했는데! 천칭 다시 쓰려면 일주일은 걸린단 말야! 당신의 멍청한 질문 때문에 이게 뭐야!”
아나이스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하지만 나로써는 해 줄 말이 없다.
그녀는 제 풀에 지처 씨근대며 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직접 조사해서 성당기사단으로 압송해 주지.
천칭은 네가 아는 죄가 없다고 했지? 분명히 잘못이 있다는 거야.
네가 모르는 뭔가 있겠지. 조금만 기다려. 후회하게 해주마. 이예림이라고 했지?
걔랑 무슨 사이야?”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는데?”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예림이를 만나서 먼저 사정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다행히도 옳은 선택인 것 같았다. 아나이스가 화를 내는 걸 보니.
“끝까지 말 안 하겠다 이거지? 좋아. 시간만 좀 더 끌릴 뿐이야. 오늘은 이만 보내주지. 하지만 네 귀여운 서큐버스에게 작별인사를 미리 하는 게 좋을걸.
앞으로 평생 못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다 그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아니다. 어쩌면 너희 둘 모두 성당기사단 지하에서 보게 될 수도.
그게 싫으면 알아서 협조하던가.”
그러고 나선 일어서서,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간다.
아무래도 나를 추궁해 봤자 나올 건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마지막 순간을 즐겨.”
그렇게 말하며, 조그맣게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부른다.
아멘.
“어 어?”
세상이 깜깜해졌다. 소리가 늘어났다 줄어들고, 빛은 새까맣게 타올랐으며 반고리관이 핑핑 돈다.
중력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 누가 날 통 세탁기 안에 돌고 빙빙 돌리는 듯 하다. 360도를 넘어 2040도까지 빙빙 회전하고 구토기가 확 올라왔다.
아찔한 감각에 눈을 감고 손을 꽉 쥐었다. 제발, 누가, 좀 구해줘.
그때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저 어디 안 가요. 손을 왜 이렇게 꽉 잡아.”
어라?
샤를의 목소리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샤를의 얼굴이 시선을 가득 메웠다.
뭐지? 방금까지 수녀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혼란에 빠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아직도 조개 모양 튜브 위였다.
물 아래에선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며 물을 끼얹는 중.
아무래도 아나이스와 이야기한 시간은 아주 순간이었나 보다. 체감상으로는 20분은 넘게 이야기한 것 같은데.
성당기사단의 무시무시한 능력에 몸이 덜덜 떨렸다.
잘못했으면 그대로 잡혀갔을 수도 있는데.
두려움에 풀사이드를 훑어봤지만 아까 보였던 외국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한지, 샤를이 걱정스레 물으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디 아파요?”
따뜻한 감각이 이마를 간지럽힌다.
“열은 없는데...”
정신을 차리자 샤를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손을 잡고 온도를 재는 중이었다.
하지만 난 정신이 없었다. 결계 속의 생생한 환상을 되짚어보느라 모든 뇌세포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아까 천칭이 뭐라고 했지?’
박성연이 했던 말을 기억하라고 했어. 기억해 내. 박성연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샤를이 걱정하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 투명하고 티 없어보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박성연이 남긴 말이 천둥처럼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 악마는 항상 거짓말을 하는 존재야. ]
샤를이 날 바라본다.
보라색 눈으로, 상냥하게 날 바라본다.
하지만 상냥함 아래에 뭔가 있는 듯 하다. 샤를이 입을 연다.
“오빠, 근데 아까 마법 발동하지 않았어요? 잠깐 마력이 움직인 것 같았는데... 무슨 일 없었어요?”
“어? 어... 아까...”
갑자기, 아까의 상황이 생각난다.
천칭이 말을 하려는 순간 샤를이 건 마법이 빛났지.
‘마치 그건 말을 못 듣게 하려는 것처럼’
갑자기 목이 탔다.
천칭도, 박성연도 내게 경고했어. 샤를을 믿지 말라고.
대체 왜 그랬을까?
이 말을 듣자... 샤를의 미소가, 날 걱정하는 얼굴이 두렵게 느껴진다.
왜 옛날 사람들은 악마를 조심하라고 했을까?
파우스트는 어째서 영혼을 빼앗겼을까?
악마와 얽힌 자들은 왜 자신의 몸이 묻힐만한 땅만 가진 채 죽었을까?
순간 샤를이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져서 슬쩍 손을 뺐다.
샤를은 눈치채지 못하고 내 몸 여기저길 더듬었다. 아프지 않은지 걱정하며.
하지만 난 알 수 없는 소름을 느꼈다.
아무래도 예림이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
아나이스는 둘의 모습을 보며 손톱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아까 팔목에서 빛나는 거 봤어요? 서큐버스가 한 짓이예요.
천칭이 말하는 걸 끊어냈죠? 마력을 퍼부어서 신성력을 지워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호위기사는 서큐버스가 쓴 마법보다, 아나이스의 언동에 더 주의를 뒀다.
아나이스의 말은 너무 과했다. 마치 성당 기사단이 그들을 가두고 겁박하려는 것처럼 들린다.
“저, 아나이스 자매. 괜히 저들을 협박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서로 얼굴 붉히면 좋을 일 없지 않습니까. 주교님도 빨리 데려오라고만 하셨지, 이런 방식까진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주교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아나이스의 이마에 힘줄이 팍 솟았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젠장! 내가 그 늙은이들 비위까지 맞춰야 해? 여기 한국까지 와서?
애초에 체포허가도 안 내줬으면서! 악마 추종자들에겐 물렁하게 굴고, 나한텐 빨리 일을 하라고 닥달하고!”
호위기사에 대한 존칭도 잊은 채 무례하게 소리를 질러댄다.
엄밀하게 따지면, 천칭을 잘 이용했으면 샤를이나 김강민 중 하나는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천칭이 내린 판결은 체포허가와 다를 바 없으니까.
이건 천칭의 질문 중 두 번을 이상하게 써 버린 건 아나이스의 탓이다.
‘실력은 있다지만... 정말 제멋대로군.’
호위임무를 맡은 기사는 이마를 찌푸렸다.
독선적이고 제멋대로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막 나가는 자매일 줄은.
게다가 주교의 정책에 대한 폭언, 험담은 위험 수위였다.
마법사, 악마 협력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대하는 건 그들이 위험하지 않아서다.
진짜 위험한 자들은 수면 아래서 살인 서클, 인신공양 제단등을 만드는 미친놈들.
협력자들을 잘 구슬려 놓으면 그들도 미친 놈에 대한 정보를 알아서 가져다준다.
이슬람 신도들이 이슬람 과격분자를 FBI에 신고하는 것처럼. 그들도 선을 넘는 자들을 꺼려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협력하는 관계인데, 아나이스처럼 화형시키자고 날뛰는 건 곤란하다. 호위기사가 그녀를 말렸다.
“아나이스 자매. 진정하세요. 다 주교께서도 뜻이 있어서 그런”
“됐어요! 듣고싶지 않아요. 이예림과 샤를! 둘 다 조사해서 가지고 와! 추후 계획은 내가 정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호위기사는 피곤한 듯 말했다. 그리고 아나이스는 몸을 홱 돌려 풀파티 장을 떠나려 했다.
“저, 그래도 이왕 오신 김에 좀 즐기다 가시는 건...”
호위기사가 권유해 봤다.
아나이스도 세상에 한참 관심 많을 이십대.
수도원 안에서 마법과 신앙만 공부하다 보니 악마 추종자는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는 과격 신앙에 빠진 것이다.
조금이나마 교정할 수 있을까 싶어 권유해 봤지만
“됐어요. 이런 음심으로 가득한 자리는 별로 있고 싶지 않네요.”
벌써부터 사람들은 수녀복을 입은 아나이스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아나이스는 수녀복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풍만한 몸매를 팔로 감싸며 질색했다.
“정말이지... 무례하긴...”
그러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종자는 그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저, 아나이스 수녀님, 저래도 괜찮습니까? 주교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종자가 호위기사에게 묻자 호위기사는 손가락을 들어 쉿. 표시를 했다.
“주제넘는 질문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성당기사단에 보고하는 것 뿐.”
“죄, 죄송합니다!”
종자가 쩔쩔맨다. 하지만 답답한 건 호위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이스 수녀. 정말 그렇게 행동하다 곤란해 질 수도 있어요.’
호위기사는 사라진 아나이스 쪽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
반얀트리 스위트 룸. 솔직히 좋긴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온갖 생각이 떠도느라 섹스도 그렇게 많이 하진 못했다(겨우 여섯 번 정도).
샤를은 내 상태가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평소보다 훨씬 정성스레 봉사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엔 엄청난 폭음으로 끝나버렸고, 그렇게 레이트 체크아웃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를은 내 옆에 계속 기웃거리며 화난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손을 저었다.
박성연이랑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를 대고, 외출하며 유다 누나랑 좀 놀고 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밖에 나와 한숨을 쉰다.
이예림. 이 이름에 전화를 걸기 두렵지만.
결국은 통화를 해 봐야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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