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159. 천칭의 시험
* * *
“아, 안녕하십니까.”
“닥치세요. 지저분한 냄새가 나네요.”
“예?”
“귀도 안 좋은 건가요? 나 참.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성당 기사단의 상층부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악마랑 붙어먹는 자들은 당장이라도 불에 태워야 하는데.
이렇게나 느슨한 태도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불경한 것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악마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니까 화형하면 안된다고 하고.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정말이지, 그런 논리로 따지지면 모기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잖아요.
모기는 거리낌없이 죽이는 주제에. 악마들에게 관대한 건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아나이스는 자신의 손가락을 씹으며 순식간에 중얼거렸다. 거의 속사포 랩 수준.
휙휙 지나가는 말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있는 사실은, 이 여자는 나와 악마를 몹시 증오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얼빠져 쳐다보는 동안 계속 중얼거렸다.
"그래요. 물론 마녀들은 화형대에서도 살아남았고 애먼 여자만 사냥당했었죠.
그러니까 상층부도 화형에 부정적인 거고.
게다가 악마들의 마법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느니 뭐라느니."
말을 쏟아낸 아나이스는 나름의 답을 냈는지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했다. 나와 얼굴이 확 가까워진다.
어두운 눈동자와 금발 머리, 연하게 탄 피부가 도드라졌다.
매끈한 콧날, 연초록빛 눈동자.
하지만 어예쁜 외모에 비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살벌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 실험체가 되주셔야겠어요.
특히 손목의 그 룬 문자들. 저도 관심이 가거든요.
악마들이 쓰는 마법에 크라바트 효과가 들어가다니, 웃기지 않아요?
그리고 원격으로 마력을 전송하는 실험도 효율이 안 나와서 폐기한 건데.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모조리 파헤쳐봐야겠아요.
아, 제가 실험체라고 했나요? 죄송해요. 협력자라고 말해야 했는데.
그럼. 설명은 충분히 됐겠죠? 가실까요?"
아나이스가 웃으며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뺐다.
설명이라니, 무슨 소리야? 내가 알아먹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지만 그녀가 내 행동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반항하는 건가요?
당신이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여기 있는 프랑스의 정예 성당기사단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요?"
젠장. 평범한 대학생 하나 잡겠다고 프랑스에서 사람을 데려왔다고?
무슨 해괴한 소리야?
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보고 아나이스는 눈쌀을 찌푸렸다.
"당신 최근까지 박성현이랑 연락했으면서.
왜 이렇게 어리숙한 척 굴어요? 당신 상급 마법사잖아?
아하. 지금 도망치려고 밑밥 까는거지?
어떻게 하나. 우리가 진작 결계까지 다 쳐놨는데."
아나이스는 다 안다는 얼굴으로 내 가슴을 쿡 찔렀다.
하지만 나는 어이가 없어서 더듬더듬 말했다.
"저, 죄송한데. 저는 진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도망칠 생각도 없고. 마법사라뇨.
제가, 뭐, 잘못을 했나요?"
아나이스는 내가 진심인 걸 알아챈 듯 했다.
"아니, 그럼 뭐 당신이 일반인이란 거야? 마력량으로 봐서는 상급 마법사인데?"
안타깝게도 난 마법사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일 뿐이다.
마력이 있다는 건 샤를이 새겨준 룬 문자 덕분이겠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란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자 아나이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악마를 소환해서 계약까지 맺었길래 뭘 좀 아나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좋아요. 멍청한 당신을 위해 잠깐만 설명해 주죠."
그리고 아나이스는 나를 물에 넣어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온수풀이라 그래서 물은 따뜻했지만, 수업을 듣기에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은...
첫째. 성당기사단이 마법사에게 출석을 요구하면 대부분 출두한다.
마법사들은 워낙 뒤가 구린 놈들이 많아서, 죄인 취급 받고 갇히느니 마법 연구를 복사해 넘기고 안전을 보장받는 쪽을 택한다고.
당연히 나도 악마를 소환해 꺼림칙한 짓을 많이 저질렀을 테니 출두해야 한다는 논리다.
둘째. 눈 앞의 아나이스라는 여자는 성당기사단에서 꽤나 유명한가보다.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나의 말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자기가 나타나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마법사들이 얌전히 출두했다고 해서 나도 그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김강민. 마법사가 아니라면 심각성을 모르고 있을 텐데. 당신 때문에 성당 기사단이 지금 얼마나 난리났는지 모르죠?"
“모, 모르겠습니다만.”
고압적인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말을 높이게 된다.
"지금 한국으로 향하는 마력이 보일 지경이에요.
나도 비행기 타고 오면서 깜짝 놀랐다니까.
전 세계에서 한국을 향해 마력이 스물스물 몰려들고 있더군요.
삼월의 봄날에 발정난 개새끼들같으니."
방금 뭔가 걸쭉한 욕설이 들린 것 같은데 최대한 모른 척 했다.
"하여튼, 자기장이나 제트 기류처럼 뚜렷한 마력선이 생길 지경이예요.
이 정도면 마왕 부활 의식이라던가. 서큐버스 퀸이 넘어온 수준이라구요.
당신이 성당 기사단을 얼마나 놀라게 했을지 짐작이나 가요?"
...전세계에서 샤를을 보고 딸딸이를 쳤다 그 말이로군.
성당 기사단은 그 결과로 모여드는 마력을 보고 깜짝 놀랐고.
이 미친 놈들. 자위좀 적당히 하지.
'내가 너무 야하게 찍긴 했어...'
샤를과 내가 찍은 영상은 최근엔 폰허브 상단에 거의 고정된 수준이었다.
샤를이 쌓이는 마력이 너무 많아서 어디다 쓸 지 몰라 난감하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나이스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 날 노려봤다.
"하아... 내가 당신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맨 처음에 폰허브에서 마력을 모았었죠?"
그랬었지. 샤를도 내 제안을 듣고는 기발한 생각이라고 감탄을 했었고.
"맨 처음에 폰허브에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이 저한테 보고가 들어왔을 때...그래요. 제가 무시했었어요.
원거리에서 색욕을 이용해서 마력을 수집한다? 효율도 안 나오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죠.
그건... 내 잘못도 아주 조금 있긴 해요. 서큐버스가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모르고 그냥 넘겼으니까."
그건 대부분 당신 잘못이 아닐까?
그런 말을 꾸욱 억눌렀다.
이 여자는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지금도 내가 듣든 말든 혼자 계속 떠들고 있지 않는가.
"무시한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예요.
성당 기사단의 늙은이들이 제 정강이를 차기 직전까지 갔답니다.
당장 한국으로 가서, 당신을 성당기사단으로 끌고 오라는 명령을 받은 게 며칠 전."
아나이스의 눈에 드리워진 심연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니까. 얌전히 따라와요.
거부한다면 정말로 험한 꼴을 볼 거에요."
그러며 내 팔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팔을 뺐다.
"안 갑니다."
그러자 아나이스의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간다.
"그러면... 당신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성당기사단 지하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는데?
저희가 당신에게 '천칭'을 쓰지 않는 게 얼마나 자비로운 처사인지 아시나요?"
천칭?
그 단어가 박성연이 해줬던 말을 일깨웠다.
'니모나를 붙잡고, 천칭에게 니모나의 죄를 물었다고 했다.
천칭은 그녀에게 몇백 년에 가까운 구금을 판결했고.
박성연은 자신의 하체와 모든 연구결과를 포기하고 나서 그녀를 풀어줄 수 있었다.
게다가 니모나도 엄청난 벌을 받았지.
터치를 통한 마력 흡수는 오직 박성연을 통해서만.
살아가려면 자신의 몸을 통해 남성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뿐.
남성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는 리림 종족에게는 최고의 형벌일 것이다.
아마 천칭이란 것은, 공정하지만 쓰는 사람에게 최고의 고행을 안겨주는 도구인 것 같았다.
내 생각이 맞는지, 아나이스는 품에서 천칭을 꺼내며 사악하게 웃었다.
이걸 쓰는 게 기대되는 것처럼.
내 눈 앞에 천칭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악의가 시꺼멓게 피어나는 듯한 웃음.
"이건 음주운전 측정기같은 거예요.
한 번 불면 본청으로 데이터가 넘어가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천칭이 한번 벌을 주기로 결정한다면 우린 돌이킬 수 없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근조근, 내 귓가를 간질였다.
"벌을 받기 싫다면... 동등한 대가를 제시해야 하죠.
박성연씨는 다리. 니모나는 순결.
당신이 뭘 잃게 될지 두렵지 않아요?
샤를에게 벌을 넘기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그런데도 진짜로 천칭을 쓰겠다고?"
말은 쓰지 말라고 하지만, 표정은 내가 천칭을 쓰는 걸 죽도록 보고싶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결백하다(최소한 내가 생각하기로는!).
유다 누나라던가 영선 누나. 샤를까지 모두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준 거라고!
그리고 샤를에게 넘기지도 않아! 다 내가 책임지겠어!
"할 테면 해 보던가."
아나이스를 비웃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아나이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마법사들은 모두 엄청나게 후회했거든요...
아아. 그렇지. 불에 달군 낙인 형을 받은 마법사도 있었는데.
그의 비명이 얼마나 달콤하던지.
후후... 불이란 참 좋지 않나요? 더러운 것을 정화한다는 점에서."
...갑자기 조금 후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이 여자는 미쳤어! 아까부터 계속 화형이니, 낙인이니 이런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해대고!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해 봐."
나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나이스는 날 비웃었다.
샤를보다 더욱 악마같은 웃음.
그러며 천칭에 속삭였다.
"천칭이여. 김강민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합니까?"
그러자, 갑자기 고요하던 놋쇠 천칭이 좌우로 삐걱거린다.
불길한 소음을 발하며 이곳저곳으로 흔들리던 천칭은 누군가 무엇을 올려놓은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다가...
평형을 이뤘다.
아나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죄, 죄가 없다고?"
하, 역시! 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지. 하지만 아나이스는 정말로 당황스러운지 천칭에게 다시 한번 질문했다.
"천칭이여. 정말로 강민에게 죄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천칭이 빙글. 돌아간다.
가운데 몸통에 있는 화살 모양이 나를 가리킨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성당 기사단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을 때 들었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에게... 네가 모르는 죄가 있구나."
뭐?
이번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그리고 아나이스가 웃는다.
"역시! 죄가 없을 리 없지! 악마 숭배자들은 다 그 모양이니까!
빨리 계약서 내놔요! 확인해 보면 나오겠지!
어차피 악마에게 최면술이라던가, 사랑의 묘약 제조법 같은 걸 받아서 써먹었겠죠!"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정말로 억울해서 소리쳤다. 전부 다 자기 의지로 나랑 섹스하고 싶어한 여자들이었거든?
아니, 그보다. 내가 모르는 죄라는 게 대체 뭐야?
예림이는 내가 인지저해도 걸어줬으니까 아예 몰랐을 텐데.
아니면 샤를에게 문신 시킨 것도 죄로 치는건가? 아님 성경에 쓰인 것처럼 항문 성교도 죄악 취급?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였다. 천칭에 소리쳤다.
"이봐요! 내가 모르는 죄가 대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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