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142. 니모나의 이유
* * *
아침에 일어나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스크램블 에그와 샌드위치. 마실 것은 유다 누나가 밀크티를 끓였고 샤를은 옆에서 레시피를 배웠다.
“언니. 밀크티 향 진짜 좋네요! 찻잎 이만큼에 물은 이정도로요?”
“그치. 잘 하네.”
주방에서 둘이 시시콜콜하게 떠드는 걸 보며 영선 누나는 한숨을 쉬었다.
“유다 언니는 샤를이 악마라는데 놀라지도 않나봐. 난 얼굴이 바뀌어서 엄청 당황스러운데...”
“뭐, 유다 누나는 오컬트 좋아하잖아요.”
작업실에도 오컬트 관련 도안도 꽤 있고. 하지만 영선 누나는 아직 샤를이 악마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든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난 잘 모르겠다. 악마라니...”
“왜요. 얼굴만 달라진 거지, 그 동안 알던 샤를이잖아요.”
“끄응...”
영선 누나는 팔짱을 끼고 끙끙거렸다.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지나가는 듯 했다. '샤를이 악마라면 뭐가 달라지는 건가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맞는 거지?'
샤를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모르고, 밀크티 두 잔과 추가 스크램블을 우리에게 가져다줬다.
“언니도 좀 더 드세요. 운동하려면 잘 먹어야죠. 오빠도!”
그리고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간다. 내가 영선 누나에게 눈짓했다. 봐요 착한 샤를 맞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다 누나가 준 거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영선 누나는 그제서야 인정하고 샌드위치를 입에 집어넣은 채 말했다.
”그래, 복잡하게 따져 봤자 뭐하냐. 샤를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아까 말했던 성당 기사단 말인데, 샤를이랑 사이 좋을린 없겠지? 걔네 싸움 잘하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싸움 잘하냐니. 정말 영선 누나다웠다.
"왜 굳이 싸우려고 해요. 그냥 말로 해도 알아먹을 수도 있잖아요."
“됐어. 대화보다 주먹이 빨라. 하여튼, 걔네가 샤를이나 너 괴롭히면 말해.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알았어요."
누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렇게 대충 아침 식사를 마치자 다들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평일 아침엔 다들 일해야 한다고 일어섰다. 어제 섹스하지 못해서 아쉬운 듯, 둘 다 날 힐끔거렸지만 모른 척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멀리 안 나가요.”
문 앞에서 배웅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샤를의 정체 밝히기부터 섹스 못해서 아쉬워하는 사람 달래기까지... 많이 지치는 일이었다.
“여자 많은 것도 의외로 힘들구나...”
“그렇게 힘들면, 제가 영선 언니나 유다 언니로 변신하는 건 어때요? 저 혼자 다 해 줄 수 있는데.”
샤를이 접시를 씻어서 선반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뒤돌아 있어서 얼굴은 안 보였지만 의외로 진지한 어투였다. 묘하게 날 독점하고 싶어하는 듯한 분위기인데!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자 샤를이 한숨을 내쉬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릇을 정리했다.
“됐어요. 농담이예요.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요. 다 같이 친한 언니들인데. 어떻게 그래요.”
의외로 진심 같았는데...
생각을 정리하다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접시를 봤다. 1인분을 따로 덜어놓은 음식 접시였다.
“샤를. 저건 먹으려고 놔 둔 거야?”
“아뇨. 슬슬 리림이 도착할 시간일 것 같아서. 그래도... 같이 살 건데. 최소한의 노력은 해 봐야죠.”
으윽. 마음이 저려온다. 이렇게나 친절하고, 주변을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서큐버스 여친이라니. 내가 진짜 복 받은 놈이다... 칭찬해 주고 싶어서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한숨을 쉬면서도 내게 안겨왔다.
그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보자 니모나의 모습이 보였다. 목에 초커, 긴 생머리, 라이더 가죽 자켓. 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른 도발적인 복장이다.
"어, 니모나 왔어."
샤를에게 알리고, 올라오라고 문을 열어 줬다.
현관문도 열어 주자, 가죽 워커를 휙 벗어던지고 중문에 서 집안을 노려봤다. 우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풀풀 풍겨나왔다.
나는 생각보다 살벌한 태도에 당황하며 일단 안내했다.
“방은 저쪽 쓰면 되구요.”
박성연 씨가 미리 보내놓은 집기들로 가득한 방. 니모나가 한숨을 쉬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샤를이 그녀를 불렀다.
“저, 식사 하고 들어가실”
“됐어. 생각 없어.”
대찬 반말에다가, 거절하는 태도도 무례하다. 샤를의 권유가 정말 싫다는 듯, 이마를 찡그리고 노려본다. 샤를이 당황해 머뭇거리자 더 쏘아붙였다.
“왜? 계약서에 나와 있잖아. 촬영 안 할 땐 니네 말 안 들어도 된다고. 안 먹어.”
니모나가 차갑게 말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문간에 멈춰서 날 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너 차 없더라? 일단 관리사무소에 내 오토바이 등록해 놨으니까. 나중에 추가하던가. 일단 주차장 내가 먼저 좀 쓴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나와 샤를은 황망히 밖에 서 있었다.
“...뭐야?”
따뜻하게 데워놨던 밀크티만 쓸쓸히 식어가는 중.
샤를은 입술을 깨물고, 유다 누나가 사 준 새 냉장고에 첫 음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밀크티는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식탁에 머리를 감싸고 앉았다. 나는 옆에서 어깨에 손을 둘러주고 달랬다.
“아니, 샤를. 네 잘못 아냐. 괜찮아.”
그러며 샤를의 얼굴을 살폈다. 모욕당했다고 느꼈는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흘낏 방문을 살폈다.
니모나 저거, 대체 왜 저래?
***
니모나는 방의 침대에 쳐박혀서 다리로 쾅쾅 찍어댔다. 여기 와 있는 사실 자체가 기분좋지 않았다. 성연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선택.
‘아냐. 계속 성연의 정기를 빨았으면 진짜로 죽었을거야.’
스스로 다독거려 봤지만 역시 별로였다. 성연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성관계라니.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린다. 마계에 있을 때도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리림은 극히 희귀했는데.
게다가, 마계에선 마력을 바치는 존재인 서큐버스와 같은 집에서 동거라니. 대체 성연은 무슨 생각인지.
‘이상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니모나는 성연과 보냈던 1년을 생각했다.
맨 처음엔 박성연의 아내 성지현인 척 하고 3개월을 같이 살았다. 왜 그랬냐고? 재밌었으니까.
처음엔 박성연이, 게이트 너머에서 간절하게 자길 쳐다보는 게 너무 웃겼다. 그래서 속여주고 싶었다. 악마의 본분이 무엇인가. 인간을 속여서 수많은 이득을 취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아내인 척 하고, 인간계로 건너왔다.
건너오자마자 극진한 대접이 이어졌다. 먹고 싶다는 것은 다 가져오고, 아픈 척을 해 보자 극진하게 자신을 간호해주고. 어디서 구했는지 마력 회복에 좋다는 포션, 영약들을 줄줄히 먹이고.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도 사용인들이 온갖 편의를 다 봐주고. 니모나도 마계에 있을 땐 풍족하게 산 편이었지만 인간계의 삶에 비교하면 천민의 삶에 가까웠다.
‘뭐야, 엄청 좋잖아? 이렇게 박박 긁어내서 마계로 돌아가 줘야지 인간 놈, 그 때가 오면 어떤 얼굴을 할 지 궁금한데?’
그럴 속셈이었다.
밤에 기도를 올리는 박성연을 보기 전까진 그러려고 했었다.
그 날 저녁. 유달리 달이 밝았던 날 니모나는 정원을 산책하다 그를 봤다. 박성연은 휠체어에 기대, 달빛에 열심히 감사를 표하는 중이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박성연은 보름달 빛 아래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신들에게 모두. 그 동안 성지현을 돌아오게 해준다면 감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던 모든 신들에게.
하늘을 바라보며 울고, 정말 감사하다고 기도를 올리는 박성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이 가슴에 콱 와서 박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아내를 돌아오게 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니모나는 그 때, 가슴에 불에 덴 듯한 통증을 느끼고 후다닥 몸을 숨겼다. 박성연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침실로 돌아갔다.
그 날 이후 뭔가가 달라졌다.
남자와 몸을 섞는 건 불결하다고 하는 리림의 전통을 지켰지만 이상하게도 박성연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저렸다.
얼굴이 붉어지고, 박성연과 대화하는 동안 정신없이 그를 쳐다보게 됐다.
왜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을까? 왜? 이 남자는 대체 왜 그랬지? 대체 둘은 어떤 사이였을까?
그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동안, 박성연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 지 이야기해 줬다. 지현이 널 살리기 위해서, 기운이 모이는 산을 매입하느라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어떤 문중의 산을 매입하느라 문중 사람들과 얼마나 싸웠고, 양아치 25대 독자를 잘 구슬려 산을 어떻게 샀는지.
또 아내를 살리기 위해 구했던 비약들과, 의식을 준비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해외로 나가 그리스에서 카론의 금화를 구할 때의 이야기. 굉장한 유물이었지만 재정난을 겪고 있던 그리스 박물관에서 매매를 결정한 이야기.
그 이야기들. 끝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들.
니모나는 성연에게 퐁당, 빠져들었다.
마계에서 그녀의 삶은 지루해 죽을 것 같았다. 매일 서큐버스에게서 정기를 착취하고, 하급 악마들의 정기를 착취하고,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쳇바퀴같은 하루.
박성연과 있게 된 이후로 모든 게 즐거웠다.
너무나 즐거웠지만, 후회가 됐다. 만약 내가 아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면.
성지현인 척 한 게 잘못이었다. 아내가 살아 돌아왔다고 믿는 그에게 물었다.
“나 살리느라, 다리를 잃은 걸 후회하지 않아?”
“괜찮아. 지현이 너만 있으면 돼.”
망설임 없는 즉답.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아, 저 눈빛이 봐 주는 게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니모나는 애가 탔다.
‘물론. 나한테 다른 남자와 자 달라고 할 땐, 진짜로 깼지만...
하. 반하지 않았으면 그 때 마계로 돌아갔었을 텐데.’
다른 남자와 자 주는 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대신 그의 다리를 치료해 주기 위해 인간들을 습격했다.
박성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나중에 아내인 척 하는 악마라고 정체를 밝혔을 때 용서받기 위해서.
‘그리고, 속인 건 미안하지만 혹시라도. 나에게 반해서, 날 봐 주진 않을까 3개월간 같이 살면서 정도 쌓였을 텐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녀는 성지연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간들을 습격한 결과로 박성연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 결과로 니모나를 증오하면서도, 아내의 얼굴을 한 그녀를 완벽하게 미워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그래서.
결국 강민에게 보낸 것이다.
그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지금도 틱틱거리고, 싸웠지만.
‘그래. 니모나. 겨우, 1년이야. 1년동안 강민이라는 남자와 몸을 섞고 나면. 그 다음엔. 남편과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야.’
니모나는 자신의 반지를 바라봤다. 울적한 마음은 반지를 보자 조금 해소됐다. 그래. 결혼까지 했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사이 좋게 지내긴 싫어...'
그렇게 생각하며 니모나는 문을 노려봤다.
안타깝게도 최악의 결정인 셈이다.
사람을 만나 본 경험도 적고, 항상 서큐버스를 하대하고 착취하고, 버릇없고, 마음에 안 들면 깽판을 쳐야 직성이 풀리는 니모나는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모르니 잠깐 방 안에 있도록 하고.
강민과 샤를의 반응은 어땠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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