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124. 박성연의 충격적인 요청
* * *
5년 전 그날.
박성연은 긴장 중이었다.
10년간 모았던 자금은 촉매와 땅을 사는 데 모조리 썼고, 산에서 내려오는 영맥을 사용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실패할 리 없었다.
시약을 아낌없이 뿌리고, 망자의 입 안에 있던 고대 금화를 촉매삼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타난 어두컴컴한 문. 박성연은 떨리는 마음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가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몇 번을 불러봐도 문 안에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내는 진짜로 가 버린 것인가? 다시 볼 수는 없나?
10년간의 연구가 모조리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박성연은 게이트 앞에서 엎드려 처절하게 울었다.
‘자기야’
박성연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잊을까.
문 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자기야. 여기 너무 추워. 무서워. 보고 싶어 꺼내 줘.’
믿을 수 없어 게이트 너머를 바라봤다.
어느 새 아내가 서 있었다. 가장 좋아하던 민트색 드레스를 입은 채 꺼내 달라고 말했다.
박성연은 홀린 듯 게이트에 대가를 지불했다. 허리 아래로 모조리 쓸 수 없게 된다고?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내가 없는 세상에선 뭐가 있든 다 부질없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아내가 나왔다. 생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자동차 사고가 나기 전,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웃던 때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성연은 감격에 차 펑펑 울었다.
“보고 싶었어 자기야.”
“나도, 보고 싶었어”
둘은 포옹했다.
그 뒤로 꿈같은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신혼이 다시 시작된 것 같은 기쁨. 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요리를 해 주고 그리고.
아내가 돌아오고 한 달쯤 지나서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아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회를 거절한다. 대신 양식을 고집했다. 음식 취향이 바뀌었다.
박성연은 순간 불길함을 느꼈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그러나 달라진 건 음식 취향뿐만이 아니었다. 성적 취향도 바뀌었다. 박성연의 제안을 질색을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건 자신이 알던 아내가 아니었다.
이상한 행동은 더욱 늘어났다.
한 밤중에 성지현이 조용히, 저택을 나선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딜 갔다 왔냐고 추궁하자, 자신의 다리를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밤마다 나갔다 오는데, 왜 자길 의심하냐고 되려 화를 냈다.
“...이번은 믿겠어.”
께름칙했다. 강원뉴스에서 최근 의식불명으로 실려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했다. 그 뉴스가 나올 때마다 아내는 채널을 돌렸다.
심증은 늘어갔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박성연은 증거를 무시한 채 아내를 믿었다.
죽었다 살아돌아왔으니까 입맛이 변할 수도 있지. 밤마다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정말로 날 위해서라면 믿어줄게.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내 곁에 있어주면 돼.
그러나 성당기사단이 집 안에 들이닥쳤다.
케블라 방탄 정장, 축성한 은탄환을 겨누고 박성연의 아내를 끌어냈다. 박성연은 발광하며 반항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자네의 죄를 모른단 말인가?”
“대체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이러십니까!”
서릿발 같은 추궁이 이어졌다.
“마법사 박성연.
너는 멋대로 마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리림을 소환해 사람들을 습격하게 만들었다!
지금 중태에 빠진 자가 스물 셋!
리림은 정기를 흡수해 너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을 습격했다!
이의가 있다면 말하라!”
성당 기사단의 입에서 나온 죄목은 믿을 수 없는 것 뿐이었다. 박성연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리림이라구요? 그럴리가요! 이 여자는 제 아내입니다. 마법사 성지현이라구요.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닙니까?”
은제 수갑에 묶여 성당기사단에 끌려나온 아내를 보며 미칠 것 같았다. 내 아내가 리림이라니 그럴 리가 없어 빌어먹을
성당 기사단이 증거를 내밀었다.
리림의 특징은, 서큐버스계 일족이면서 인간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에게 손을 대 에너지를 빨아들인다.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는 뱀프릭 터치.
강원병원에 입원한 스물 세명의 환자에게, 모두 에너지 드레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박성연은 그 사실에 절망했다. 내 아내가 아니라 리림이었다니.
성당기사단이 마지막으로 항변할 게 있냐고 물었다.
성지현 아니, 성지현의 모습을 한 리림은 소리쳤다.
“남편 다리 고쳐줘야 해서, 사람들한테서 정기를 모았을 뿐이야! 죽이진 않았잖아! 빌어먹을 너네가 대체 뭔데 나한테 이러는데!”
성당기사단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릴 뿐.
그들은 판결용 천칭을 들고 처벌을 물었다. 천칭이 내린 답은 간단했다.
“리림에게, 스물 세명의 사람들을 3년간 곤경에 빠뜨렸으므로 138년간의 구속형을 명한다.”
“박성연에게, 악마를 불러들인 죄. 그러나 몰랐다는 점을 참착하여 10년간의 마력 박탈형에 처한다.”
그리고 리림은 질질 끌려나갔다.
박성연은 아내를 살려낸 것을 후회했다. 아내가 아니더라도, 아내의 모습을 한 여자가 눈물 범벅으로 울며 끌려나가는 걸 보는 건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귀를 파고들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성연오빠, 제발 부탁이야 날 버리지 말아줘”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내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아내의 차는 빗길에서 미끄러졌었다. 박성연과 통화하는 도중 일어난 사고였다. 가로수를 들이받고 즉사.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부름소리처럼 이제는 옆에서 소리지른다.
박성연은 이를 악물었다. 리림이 성당기사단 지하의 악마 감금소로 끌려간다면? 138년간 갇혀 있다가 마계로 추방당하겠지. 그 기간동안 정기는 제대로 제공이나 할까?
성당기사단은 잔인하진 않으나 무정했다. 겨우 생존할 정도로만 살려놓겠지.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을 것이고.
아내를 살려내려고 한 건 자신이었다. 그리고 리림을 데려온 것도 자신이였다. 이제 책임을 져야 했다.
박성연은 한번 더 후회할 결정을 했다.
“나는 성당기사단과 거래를 했네. 140년간의 구속이라. 그런 걸 겪게 할 순 없었어. 내 아내의 얼굴로, 나에게 살려달라 비는데 그걸 어떻게 보겠나.”
“어떤 조건을 내걸었죠?”
박성연은 10년간의 연구결과를 모두 바치겠다고 했고, 리림을 풀어달라고 했다. 피해자들의 복구에 힘쓰겠다고 했고, 다른 조건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성당 기사단은 천칭에 조건을 올려놓았다.
천칭이 말했다.
“리림이 오직 박성연에게서 에너지 드레인을 할 수 있게 하라.
박성연에게 영구히 마력의 사용을 금한다.
받아들이겠나?”
리림은 오직 박성연에게서 정기를 취하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박성연도, 하반신 마비에 마법 사용금지를 겪으며,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성연은 수락했다.
리림의 목에 마법적 처리를 마친 목걸이가 채워졌다. 그리고 박성연의 손목에도 문신이 새겨졌다.
그리고 성당 기사단이 물러갔다. 리림은 감사를 표하며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잘 해결된 듯 싶었다.
그 뒤로 1년이 흘렀다.
리림은 매번 박성연에게서 정기를 취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때마다 온 몸에 달군 쇳물이 부어지는 듯한 고통이 흘렀다.
박성연의 다리를 치료할 마력 수급따윈 꿈도 꾸지 못한다. 그냥 삶을 이어갈 정도의 마력만 근근히 뽑아낼 뿐.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박성연은 벌써 염증을 느꼈다.
안 그래도 자신을 속인 악마에게 분노를 느끼던 차. 아내의 얼굴을 했으니 용서했지만, 이젠 한계였다.
“빌어먹을, 이렇게는 못 살아! 제발! 나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면, 제발 내 말좀 들어줘!”
박성연은 리림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리림은 몇 번이고 거절했다.
그 과정을 지나며 둘의 관계는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 타협안이 뭐길래, 자꾸 거절해? 강민은 궁금증을 느끼고 물었다.
“대체 무슨 타협안을 제시했는데요?”
“...그건 자네 여자친구 없을 때 말해주겠네.”
대체 무슨 이야기길래? 뭐, 말해 준다니 알았다고 해야지. 강민이 수긍하자 이번엔 샤를이 질문했다.
“박성연 씨는 저 악마를 아직도 사랑하나요?”
그러자 박성연의 얼굴에 깊은 고통이 흘렀다.
“글쎄. 미워하는 마음 9. 사랑하는 마음 1이겠지.
아내와 똑같이 웃고, 똑같이 행동하고, 그러는데 아내가 아닌 걸 알아도 어쩔 수 없더군.
사랑하면서도 미워할 수 있다는 걸, 자네도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거야.”
샤를에게 충고를 건넸다.
“글쎄요. 리림은 미움받는 게 어울리는 존재일 것 같은데.”
강민은 머리를 긁었다. 아까 리림이 샤를한테 시비를 건 것도 그렇고. 두 종족의 사이가 엄청 나빠 보였다.
“샤를. 리림이라는 종족과 사이가 안 좋아?”
“그럼요.”
샤를이 리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마계에서 리림들은 주로 창관의 주인 역할을 한다. 서큐버스를 이용해 마력을 착취해가는 종족.
원래는 동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대역병이 퍼졌을 때 그들은 문을 걸어잠그고 폐쇄적인 커뮤니티를 유지했다. 그리고 살아남아 번성했고, 약해진 서큐버스에게 빚을 지워 부렸다.
리림들은 성관계를 혐오하고, 서큐버스를 낮잡아본다. 그러면서 서큐버스가 벌어 오는 마력으로 생활하고, 생명력을 빼앗고
샤를에겐 그 누구보다 혐오스러운 종족이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종족이에요. 오늘도 보자마자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거 보셨죠? 더러운 사람 취급하면서...”
샤를이 옛날 생각이 나는지 눈가를 훔쳤다. 박성연이 한번 더 사과했다.
“미안하네.”
샤를은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저희를 부른 이유가 뭔데요?”
박성연이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요샌 리림에게 정기를 빼앗기는 내 몸도, 정신도 한계라네. 그러니 자네들이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네.”
흠. 오고가는 게 있어야 할 텐데.
“무슨 대가를 지불할 건데요?”
“성당기사단에게 잡혀가지 않게 해주지.”
샤를과 나는 서로 바라봤다. 성당기사단에게 잡히지 않게 해주겠다고?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무슨 수로?
“어떻게 해 주실 겁니까?”
“글쎄. 그것까지 말해주면 내 밑천이 털리는 거라.”
그러며 식탁 위에 계약서 한 장을 올린다. 성당 기사단에게서 자유롭게 해 주는 대가로 강민은 박성연의 부탁을 들어준다.
“억지 부리는 건 아니시겠죠? 뭐, 샤를을 달라던가.”
그러자 샤를이 기겁하며 나에게 달라붙었다. 박성연도 질색하며 손을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걸세! 계약서를 잘 보게나. 애초에 다른 사람을 계약서에 끌여들일 수는 없어! 이 여자가 네 소유물도 아니고!”
우리 둘은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했다. 이상은 없었다. 우리 셋이 도장을 찍자, 계약서가 세 장으로 늘어난다.
각자 한 장씩. 보관하자 박성연이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일단 내가 먼저 성당기사단에게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알려줘야겠군.”
박성연은 뜸을 들이며 말하는 것을 미뤘다. 안달난 나는 채근했다. 그러자 어이없는 답을 내놓았다.
“직접 성당 기사단을 부르게.”
“예?”
직접 부르라고? 그 놈들을?
그러자 박성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리림에게 처음 내려진 벌을 보면 모르겠나? 성당기사단은 죄목에 따라 심판하지만, 악마라고 해서 무조건 죽이지는 않아.
사람 스물 셋을 중태에 빠트린 악마에게도 140년의 감옥형 뿐이지.
샤를이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른 게 있나?”
잠시 생각해보다 고개를 저었다. 샤를은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은 없지.
“폰허브의 계약서를 보고 눈치챘네. 저 서큐버스는 상당히 올바르다고 해야 할까. 고지식하다고 해야할까. 피해를 주지 않고, 이득도 거의 챙기지 않아.”
나는 저녁 노을을 보며 샤를과 이야기하던 걸 생각했다.
‘저는 인간들을 속이지 않겠어요. 꼭 정당한 대가를 주고 거래할 거예요.’
마계에서 고생한 터일까. 그런 점에선 깐깐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다. 맞는 말이었다. 박성연이 계속 설명했다.
“성당기사단이 악마를 싫어하긴 해도, 죄를 저지른만큼의 벌만 준다네. 죄를 짓지 않았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생각보다 맥빠지는 해결책이었지만, 의외로 맞는 말이었다. 내가 수긍하자 박성연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방법을 알려준 것 같은데. 이제 내 부탁을 받아주겠나?”
“...그래야겠죠. 말씀하시죠.”
그러자 박성연이 불편한 기색을 비추며 샤를을 쳐다봤다.
“큼. 샤를 양. 잠시 나가 줄 수 있겠나? 말하기가 조금 부끄럽군.”
샤를은 살짝 무서워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날 믿고 문 밖으로 나섰다.
좋아. 이제 이야기를 들어볼까. 침을 삼키며 물었다.
“뭘 원하시는 지 말씀해 보시죠.”
그러자 박성연은, 한참 동안 주저주저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내가 한번 더 채근하기 직전. 박성연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 저 리림을 데려가서, 성인 동영상을 찍어줬으면 하네.”
“예?????”
나는 기겁해서 소리질렀다. 아니, 이 양반 자기 아내때문에 죽고 못 살았다고 했으면서 뭐? 뭐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