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123. 리림. 넌 누구냐?
* * *
나와 샤를은 두려움에 떨며 정원을 나아갔다. 이상하게도 정원부터 현관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커다란 집이라면 가정부만 다섯은 필요할 텐데.
인기척이 없는 현관 문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저절로 열렸다. 샤를이 두려워하며 말했다.
“오빠...”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샤를의 손을 꼭 잡고 용기를 주며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아무도 샤를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오빠, 고마워요...’
강민은 뒤에서 샤를이 어떤 얼굴로 그를 보는지 몰랐다.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감사, 고마움, 사랑, 간절함으로 가득한 눈
샤를은 강민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랑 같이 있다면, 어떤 일을 겪어도 괜찮을 것 같아'
집 안의 벽을 따라 노란색 백열등이 빛났다. 집 안 대부분은 어둠에 잠겨 있고, 2층 복도만 빛이 있었다.
공포에 떨며 집 안을 살피는데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갑네. 박상연일세.”
우린 펄쩍 뛰며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자, 우웅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2층으로 시선을 돌리자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위아래로 움직임 없이, 귀신이 떠다니는 것처럼 평행으로 움직인다.
“뭐, 뭐예요 오빠...?”
샤를을 내 등 뒤로 숨기고 2층을 노려봤다. 층계참 끝에 선 사람은 계단을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뭐, 뭐야?’
1.5층에 있는 평지를 돌아 내려오자 그제서야 머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남자가 리프트 위에 있었다.
정체를 확인한 우리는 맥이 빠졌다. 외양은 초라했다. 걷지 못해 왜소한 발목, 통이 맞지 않는 바지.
다만 상체는 통나무처럼 억셌고, 눈은 형형히 빛났다.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입을 열자 중후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갑네. 박상연일세. 오느라 고생 많았네. 구글! 1층 불좀 켜주게나!”
흰색 형광등이 불을 일제히 밝혔다. 불이 켜지고 나니 무섭게 보이던 1층은 그냥 화려한 집으로 변했다. 박상연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멋쩍은 듯 웃었다.
“미안하네. 집에 손님이 온 것은 오랜만이라서. 불을 꺼 두고 있었더니. 쓸데없이 무섭게 만들었군.”
나는 한참 얼타고 있다가 겨우 질문할 수 있었다.
“그... 성당 기사단 사람인, 가? 아니, 기사단 사람이십니까?”
폰허브 메시지로는 반말을 했지만, 지금 얼굴을 대면하니 도저히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의 반을 뒤덮은 수염(다행히 관리는 잘 했는지 휴 잭맨같은 느낌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 얼굴의 주름. 쉰은 넘어보이는 외모.
남자는 대답을 피하며 리프트를 작동시켰다.
“흠.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좀 그렇군. 따라오겠나?”
우린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해치지 않겠다는 계약서도 썼고, 휠체어를 탄 걸 보니 우리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긴장을 풀진 않았다.
층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샤를이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2층을 끝없이 채우고 있는 책장, 그 안에 가득한 책. 컴퓨터. 누가 봐도 서재같이 생겼다. 휠체어가 방 가운데에 있는 탁자로 향했다. 우리도 그 주변에 앉았다.
박상연이 손뼉을 치고 소리쳤다.
“주전자야. 차를 따라 주겠니?”
주전자가 걸어왔다.
초현실적인 광경에 눈을 비비고 봤지만 여전히 주전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다리 여덟 개 달린 잔, 다리 여덟 개 달린 주전자가 거미처럼 따각따각 다가왔다. 컵이 다리를 접고 얌전히 앉자 주전자가 그 위로 내용물을 채웠다.
...도저히 마실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런 광경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이 자는, 아마도 마법사?
샤를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마법사신가요...?”
“맞네.”
박상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마법사와 교회는 적대하는 사이겠지? 샤를은 마음을 좀 놓으며 물었다.
“...왜 저흴 여기까지 부르셨나요?”
“원래 중요한 이야기는 얼굴 보고 해야지. 성당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폰허브 메시지로 해 주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맞는 말이긴 하다. 눈 앞의 마법사는 차를 홀짝거리며 중얼거렸다.
“일단. 자네들. 너무 눈에 띄게 활동하고 있어. 무슨 빽이라도 있나? 샤를 자네, 혹시 서큐버스 로드라도 되나?”
샤를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그냥, 마계에서 게이트 넘어온 평범한 서큐버스일 뿐인데...”
“흠. 그렇단 말이지. 이대로면 성당 기사단이 찾아오는 건 시간 문제인데.”
성당 기사단이 온다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성당 기사단이요? 진짜로 실존하는 건가요?”
내 물음에 박성연은 쓰게 웃었다. 그러더니 손에 낀 하얀 장갑을 벗었다.
“맙소사.”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양 손등에 거대한 철 십자가 문신이 박혀 있다. 그리고 손가락에 사슬이 얽혀 있고, 팔꿈치 쪽에 매인 족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보겠나?”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쥔다. 그러자 손등의 문신이 붉게 빛나며 달아올랐다. 김이 피어오른다. 얼굴에는 힘줄이 솟는 게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보였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왜"
박성연은 땀을 줄줄 흘리다가, 몸에 힘을 탁 놓았다. 그러자 손등의 문신이 다시 빛을 잃고 평범하게 돌아왔다. 박성연이 숨을 몰아쉬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마법은 모조리 금지당했어. 성당 기사단에게 받은 벌이라네. 기껏해야 도자기 사역마를 다룰 정도의 마법만 남았지.”
그러며 주전자를 책상에서 내려가게 만들었다. 샤를은 성당기사단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두려워서 물었다.
“성당 기사단에게 벌을 받으셨어요? 대체 무슨 일을 하셨길래요? 다리도 성당 기사단 때문에 그렇게 된 거예요?”
하지만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짧은 이야기는 아니네.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우리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연은 천천히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일의 시작은 내 아내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내의 이름은 성지현이었어. 같은 마법사였고. 맨 처음에 만난 건 뒷골목 경매장에서였지.
자꾸 내 달맞이풀을 입찰해가길래, 빡쳐서 그녀가 사려던 축성한 황철광을 모조리 사 버렸지. 그 때 다짜고짜 나에게 다가와 주먹을 날리던데 얼마나 매웠는지.
결국 낙찰받은 물품을 서로 나눠서 쓰기로 했지. 그 이후로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지. 아직도 그녀 공방의 냄새가 기억나. 포도 냄새가 진했어.
그리고 거기에서 내 입술을 스쳐가던 그녀의 손가락. 몸. 모든 게 생생하군.”
마법사가 차를 마시며 내 쪽을 힐끗 봤다.
“김강민이라고 했나? 자네는 진짜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나?”
진짜 사랑이라. 잘 모르겠어서 얼떨떨하게 있자 박성연이 피식 웃었다.
“이 서큐버스가 자넬 어떻게 쳐다보는지 봤으면 알 텐데.”
무슨 소릴 하는거야?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고 박성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르나 보군. 됐네. 내 아내 이야기로 돌아가지.
난 그녈 내 자신보다 더욱 사랑했지. 그래서 그녀가 죽었을 때 내 일부분도 죽어버렸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
그대로는 살 수가 없었어. 십 년이 넘도록 그녀의 그림자를 쫓으며 살았어. 그리고 결국 성공했지. 나는 명계로 가는 문을 열었네.“
“예?”
명계로 가는 문? 그게 가능한 거야? 그러자 박성연이 내 빈약한 상상력을 타박했다.
“흔한 이야기 아닌가? 오르페우스가 스틱스 강을 건너 하데스에게 가, 자신의 약혼녀를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나. 자네 신화는 안 봤나?”
샤를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에우리디케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잖아요. 죽은 자를 데려오려는 신화는 항상 실패하지 않나요?”
박성연은 쓰게 웃었다.
“망자를 되살리려는 이야기들이 항상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좀 보고 배우라는 뜻이지만. 난 젊었고 용감했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네.”
“실패했군요?"
“아니. 그 땐 성공했어.”
샤를은 입을 막고 눈을 크게 떴다.
“불가능해요.”
박성연은 샤를을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내 아내가 명계의 문에서 나왔지.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네.”
박성연이 자신의 바지를 올렸다. 우리 둘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종아리 중간부터 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아내가 문 너머에서 말했지. 자신이 인간계로 나가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난 뭐든 바치겠다고 대답했고, 게이트는 대가로 내 다리를 가져갔어. 게이트가 마지막으로 말하길, 내 아내가 다리를 고쳐줄 수 있을 거라더군.”
샤를은 부정했다.
“아냐... 죽은 자를 살리는 건 불가능해요. 거짓말일 거에요.”
그제서야 박성연은 슬프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인정했다.
“맞아. 나는 크나큰 착각을 했어. 나는 명계의 문을 연 게 아니었어. 마계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었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마력이 들었고, 다리를 바쳐서 아내를 꺼냈어.
그러나 아내였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았겠지.
나는 아내인 척 하는 악마를 꺼내고 말았네.”
악마를 꺼냈다고? 나는 새하얗게 질려 박성연을 봤다. 박성연은 그늘이 진 얼굴로 창문을 쳐다봤다. 두려워하는 중이다.
부릉, 부르르릉 창 밖에서 희미한 오토바이 소리가 다가왔다.
“날 이렇게 만든 악마, 리림이 오는군.”
리림이란 말을 듣자 샤를이 질색하며 물었다.
“리림이요? Lillim? 리리스의 딸들?”
“잘 아는군.”
나는 혼란스러웠다. 리림이 누구길래? 샤를이 아는 사람인가? 물어봤다.
“누구야? 리림? 아는 사람?”
“아뇨, 아는 사람은 아니고”
샤를이 말을 하는데 쾅, 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굳어 문을 쳐다보자, 벌컥 열렸다.
온 몸을 쫙 감싸는 가죽 오토바이 자켓. 얼굴은 순진하게 생긴 미녀였지만 입을 열자마자 그녀의 속에 든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샤를을 쳐다보고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뭐야? 집에서 지저분한 좆물냄새가 난다 싶더니. 서큐버스가 들어왔네?”
샤를의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변했다. 박성연도 불쾌감을 느끼며 제지했다.
“리림, 내 손님이다. 무례하게 굴지 마.”
하지만 들어온 여자는 콧방귀를 뀌며 박성연을 노려봤다.
“지랄. 그리고 내가 리림이라고 하지 말랬지. 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 안 부르고, 개새끼라고 부르는 거랑 뭐가 달라? 몇 번을 말해, 난 성지현이라고”
말하며 성큼성큼 휠체어로 다가갔다. 불길함을 느끼고는 잽싸게 가운데를 가로막았다.
“잠깐, 진정하세요”
“진정하긴 씨팔!”
그러며 날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막아냈다. 아무래도 영선 누나랑 같이 간이 스파링 해본 게 도움이 되네. 손목을 잡고 멈춰세우자 리림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망할, 인간 남자새끼가 나한테 손을”
파바박! 리림의 손에서 검은 색 전기가 튀었다. 그러자 뒤에서 박성연이 유리창에 금이 갈 정도로 큰 고함을 질렀다.
“리림!!!! 그만하라고 했어!!”
그러자 리림이 입술을 깨물고 내 손을 뿌리쳤다. 뒤로 돌아 성큼성큼 방을 나가고 문이 부서져라 닫았다.
남은 나는 황망하게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굽니까? 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예요?”
“...다 설명하겠네. 미안하네.”
그리고 박성연은, 모든 걸 우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