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122. 대저택의 주인
* * *
“아니... 돈은 대체 언제 주는 건데...”
폰허브를 들락날락거리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도 자기인증은 Pending(진행중)으로 떠 있다. 폰허브의 지긋지긋한 대기에 지쳐가는 중.
한국 기업이었다면 본사에 불이라도 질렀을 텐데 외국에 있는 기업이니 답도 없다. 한 달에 칠천만원을 벌었는데, 돈을 눈 앞에 두고 출금을 못하니 죽을 맛이다.
“아오! 답답해!”
“오빠, 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불 아래에서 상냥하게, 쪼옥쪼옥 똥까시를 해 주던 샤를이 위로 올라왔다. 내 팔베개를 하고 볼에다 쪽쪽 키스해주며 날 달랬다.
“그래도 유다 누나한테 알바비 받잖아요. 생활비는 충분한데?”
요새 유다 누나가 거의 월 300만원 수준으로 우리에게 돈을 주고 있다. 타투로 돈 잘 버니까 부담은 없겠지만, 돈 받는 게 싫은 거라고!
돈 받으면서 섹스한다는게, 유다누나와 우리의 관계를 메마르게 한다고 해야 할까. 그냥 좋아서 3P하면 되는데! 돈 안 받고 섹스하고 싶어! 내가 창놈이야? 어?
안타깝게도 폰허브는 우리의 계획을 자꾸 틀어놨다. 출금을 차일피일 미뤄서 자립하기란 꿈은 사라지는 중. 폰허브에게 따지는 메일을 보내며 중얼거렸다.
“이번 달 안으로 안 들어오면 진짜 내가 미국 가고 만다.”
투덜거리며 폰을 끄려는데, 갑자기 폰허브 메시지 하나가 삑 도착했다. DM창이 깜빡거렸다.
‘뭐야. 또 구독자가 특이 컨셉 섹스를 원하는 건가?’
저번의 겨드랑이 섹스는 너무 마이너한 취향이라서 댓글이 개판이었다. 어떤 정신나간 새끼가 이런 걸 신청했냐고 들끓었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 다음 영상은 하드코어한 걸로 결정.
아직 컨셉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하드코어한 영상일 것이라고 달자 비난 대신 추측 댓글이 창을 채웠다. 관심 돌리기 성공!
무슨 영상이냐면 야외 관장 후 애널 처녀상실 영상을 기획중이다. 그래서 다음 영상은 정해졌는데, DM은 뭘 요청하려는 걸까?
괜찮은 소재라면 제작해 줘야지라고 생각하며 메시지를 열었다.
[ 서큐버스인 걸 너무 대놓고 티내는 거 아냐? 성당 기사단이 두렵지 않나보지? ]
뭐?
눈을 비비며 다시 봐도 내용은 변한 게 없다. 갑자기 가슴이 두쿵두쿵 뛰었다.
성당 기사단이라고? 샤를이 서큐버스인 건 어떻게 알고?
등에서 땀이 쭉 흘렀다. 내 이상을 눈치채고 샤를이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손을 덜덜 떨며 폰을 내밀었다.
“샤를, 이거 봐봐...”
성당기사단. 이 단어를 본 샤를의 얼굴도 새햐얘졌다.
“자, 잠깐만요. 성당기사단요? 아직도 그들이 남아있는 건가요?”
처음에 샤를이 성당 기사단을 언급했을 때 난 믿지 않았다. 마녀사냥이라던가, 성당 기사단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
‘샤를. 그건 다 사라진 지 오래야.’
‘못 믿겠어요!’
샤를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십자군 전쟁, 마녀, 퇴마, 오컬트 영역의 책을 읽어 보고, 관련 자료를 다 보고 나서야 간신히 인정했다.
‘진짜 없네요. 오빠 말대로 사라진 것 같아요. 하긴. 요새는 사람들이 마녀 분장하고 놀기도 하고! 신비나 악마에 관해 영화도 나오는 마당에! 성당기사단이 어떻게 남아 있겠어요!’
그래서 샤를도 안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폰허브 계정이 성당기사단 이야기를 꺼내다니? 이 놈 누구지?
일단 답장을 했다.
[ 당신 누구야? ]
읽음 표시만 뜨고 1분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초조함에 한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 누구냐고! 뭔데? ]
그러자 망설이는 듯한 답장이 왔다.
[ ...인터넷으로 알려주긴 좀 그렇군. 여기로 올 수 있나? ]
주소가 하나 떴다. 강원도의 산골짜기. 170km가 넘는 먼 곳이었다.
[ 왜 여기까지 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그냥 메시지로 이야기해. ]
하지만 돌아온 답장은 더욱 무시무시했다.
[ 성당 기사단이 인터넷 패킷 뜯어보는 건 모르나? 나도 목숨 걸고 이야기해 주는 일이네. 와서 듣게. ]
등에서 땀이 더욱 흘렀다. 성당기사단이 패킷을 까본다고? 이 대화를 훔쳐볼 수 있다는 거야? 누가 두 달 전에 그런 말을 했다면 음모론에 미친 정신병자 취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큐버스를 만나고 내 상식은 꽤 뒤틀렸다. 그리고 이제 서큐버스의 정체를 맞춘 자가 성당 기사단이 메시지를 훔쳐본다고 말해주자 소름이 몰려왔다.
이 메시지도 읽고 있다고? 어떻게 하지? 가서 이야기를 듣겠다고 해야 하나? 내가 망설이자 샤를이 두려움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요. 오빠. 함정일 수도 있어요.”
맞다. 싸늘한 공포가 흐른다. 내가 무턱대고 나갔다가, 진짜로 교황청 지하같은 곳에 끌려가게 된다면? 믿을 만한 약속이 필요했다.
[ 내가 뭘 믿고 거기에 가는데? ]
[ 의심이 많군. 기다리게. ]
창가에서 톡, 톡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나.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이 자에게서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하는데.
톡, 톡 소리가 좀 더 커졌다. 그리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 창문 열어. ]
우린 깜짝 놀라 창문을 바라봤다.
거대한 검정 까마귀가 집 안쪽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불길한 검은 깃털과 검은 눈. 그런데 몸통에 이상한 게 있다.
까마귀가 등 쪽에 가죽끈으로 매어진 가방을 메고 있었다. 전서구처럼 보였다. 나는 멍하니 창가로 다가가 살폈다.
창문 밖엔 갈가마귀밖에 없고, 누가 우리 집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망설이다 창문을 열자 까마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죽 가방을 내밀었다.
“이, 이게 무슨...?”
“사역마인가 봐요. 오빠. 가방 열어봐요.”
가방 안에는 돌돌 말린 양피지가 들어 있었다. 샤를이 집어들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거... 계약서인데요? 마력이 느껴져요!”
우린 양피지를 펴서 안의 내용을 읽었다. 유려한 한국어로 써있었다.
[ 나 박상연은 이 계약서에 서명한 자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오히려 이득을 가지고 돌아가게 해 줄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
그리고 아래에 나와 샤를을 위한 두 칸의 서명란.
박상연이라. 한국인인가? 여러 가지를 의심하며 계약서의 내용을 살폈다. 솔직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 가짜 아닌가 의심하며 샤를에게 물었다.
“어때? 샤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말장난도 없고. 간단해요.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정식 계약 맞구요.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
샤를의 말대로라면 여기에 서명한 후, 저 자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타자를 쳐 물었다.
[ 엄지로 도장 찍어서, 까마귀 편으로 보내주면 되나? ]
[ 까마귀가 아니고 갈가마귀다만. 뭐. 그렇게 하면 되네. 언제쯤 올 텐가? ]
가급적 빠르면 좋을 것 같았다. 성당기사단 이야기를 듣자 턱 끝까지 숨이 막히는 기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싶었다. 샤를에게 물었다.
“샤를. 약속 있어?”
“아뇨. 유다 언닌 일 미뤄둔 게 많아서 바쁜가봐요.”
유다 누나는 휴가 가려고 일을 미룬 대가를 치르는 중. 영선 누나도 주2회 섹스니까 주말에 보면 된다. 그럼 지금 당장 가는게 맞을 것 같았다. 한시가 급했다.
[ 오늘 저녁까지 갈 테니까. 기다려. ]
[ 알겠네. 기다리지. 차는 있나? 여기가 꽤 깊어서 차가 다니진 않네만. ]
[ 차는 없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
[ 그러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들에게 절대 손해보는 이야기는 아니야. 오늘 저녁에 봄세. ]
그리고 오프라인. 말투는 친절했지만 믿음이 가진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샤를에게 말했다.
“샤를. 짐 챙겨. 강원도 갔다와야겠는데?”
“알았어요.”
샤를은 후다닥 짐을 싸 내 가방에 담았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빠르게 준비한다. 나도 금방 준비해 5분만에 집을 나섰다.
“...괜찮아?”
샤를이 누군가 자길 쫓아오진 않는지 확인하려는 듯, 집 밖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손을 꼭 잡아줬다.
“걱정하지마, 샤를. 괜찮을거야.”
솔직히 나도 불안하긴 하다. 하지만 샤를이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내가 옆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불안해하는 떨림이 느껴진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샤를이 옆에 착 달라붙었다. 어떻게 하죠? 묻는 수심에 찬 목소리. 괜찮을 거라고 계속 달래주며 터미널에 내렸다.
버스 출발까지 10분. 하지만 샤를은 영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우울할 땐 단 게 최고지. 손에 델리만쥬 한 봉지를 쥐어주자 걱정스레 날 올려다봤다.
원래대로라면 엄청 좋아할 텐데. 반응이 이렇다니. 아무래도 시름이 깊은가보다. 샤를의 옆에 앉아 천천히 달랬다.
“샤를. 너무 걱정하진 마. 일단 계약서를 썼으니까 우리한테 해를 끼치진 못할 거고. 만남이 이득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잖아? 그리고 성당기사단이 아직 우리에게 찾아온 것도 아니잖아. 걱정 마.”
그러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개 안겼다.
“오빠... 저 진짜 무서워요.”
샤를은 기껏해야 어린 스무살의 서큐버스일 뿐. 이런 음모론 속에서 튀어나온 놈들을 상대하기엔 어렵다. 샤를을 토닥거리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다 막아줄게. 혼자 불안해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내 여자친구. 샤를. 성당 기사단이 멋대로 해치게 두진 않겠어. 게다가 샤를이 나쁜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속에서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걸 원하는 서큐버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진 모르겠지만, 샤를을 해치려면 내 시체를 넘고 가야 할 거다!
각오를 다지며 버스를 탔다. 강원도 터미널로 향할 동안 샤를은 기껏해야 델리만쥬 두 개쯤 집어먹고 멈췄다.
‘젠장... 진짜 심란한가본데.’
버스 터미널까지 별 일은 없었다. 도착해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우리가 내민 주소를 받은 택시기사는 이마를 찡그렸다.
“여길 ? 완전 산골짝인데. 나올 때 손님도 못 태울 것 같은디.”
“안 갈 거예요? 안 갈거면 다른 택시 탈게요.”
“아니, 그건 아니고...”
택시 기사는 입을 쩝쩝 다시다가 그냥 우리를 태웠다. 거의 8만원은 나올 거리니 포기하긴 아쉽겠지.
우린 굽이굽이 산길을 달렸다. 거의 40km를 달렸을까? 도로의 끝에 다다르자 택시가 차를 세우고 내려줬다. 8만원을 내밀자 명함 하나를 건넨다.
“거, 여기서 나올 때 불러요!”
택시가 떠나고 우린 도로의 끝을 살폈다.
“이게... 뭐야?”
솔직히 말하면, 강원도 촌구석에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큰 저택이었다.
거대한 창살 문. 창살 안 쪽으로 보이는 관리 잘 된 잔디밭. 건물 세 채. 가운데를 따라 깔린 돌길.
위대한 개츠비에 나올 것 같은 저택을 얼빠져 쳐다보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인터폰이 딸깍 열렀다.
[ 왔으면 들어오게. ]
그리고 철문이 끼익 열렸다.
“...어쩌죠?”
“계약서를 믿고 갈 수밖에.”
우린 두려움에 서로의 손을 잡고 안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집의 주인은 누구고 뭘 하는 놈이길래 강원도에 대저택을 짓고 쳐박혀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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