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103. 샤를의 마음
* * *
집으로 돌아와 샤를과 같이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오늘 일정은 오전 열시부터 시작! 샤를이 빨리 데이트하고 싶어해서 11시 영화를 골랐다.
"오빠, 그럼 열 시에 나갈 거예요?"
"아니, 지금 나가자."
벌써요? 아침 아홉시부터? 샤를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샤를이랑 데이트가 기대되서 그래."
"정말요?"
샤를이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정말이고 말고! 고개를 끄덕여 주자 신나서 나갈 준비를 했다.
샤를은 맨 처음 나와 만났을 때 입고 있던 검은색 민소매 터틀넥, 그리고 청바지를 차려입었다. 다른 옷은 너무 노출이 많긴 하지.
기본적으로 허벅지 혹은 도끼자국이 보이는 옷들뿐. 윗옷은 배꼽과 윗가슴을 다 보여주고. 이렇게 보니 새삼 영선누나의 옷 취향을 알 수 있었다.
노출 이빠이 넣은 옷들. 물론 같이 PC방 알바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영선 누나는 자기 맨살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운동할 때 편하기만 하면 뭐든...
'그것 말고도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남자들의 시선을 즐긴다던가.'
영선 누나도 야외노출 시키면 좋아서 몸을 배배 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옷을 차려입었다. 깔끔한 치노팬츠, 차이나카라 반팔티. 그리고 샤를의 말대로 왁스를 발라 머리를 깔끔하게 넘겼다.
"역시, 오빠는 머리 올린 게 더 잘생겼어요."
"그래?"
나는 거울에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잘 생긴 건가. 뭐, 샤를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 우리는 영화관이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을 본 샤를은 내 예상대로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강, 강민 오빠? 여긴 뭐예요?"
크고. 넓고. 조명으로 반짝거린다. 바닥의 대리석을 보며 샤를은 자기 하이힐이 여길 밟아도 되는지 고심했다.
"왕궁도 이렇게 화려하진 않겠다..."
샤를은 불안해하며 안을 살폈다. 다행히 내가 손을 잡고 이곳저곳 구경시켜주자 긴장이 좀 풀어졌다. 특히 점원들이 상냥하게 인사해주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예쁘다아..."
벌써 백화점에 적응했는지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다 샤를의 눈이 귀금속 매장에 못박혔다. 반짝거리는 목걸이, 귀걸이가 샤를을 유혹했다. 샤를은 홀린 듯 매대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민소매 검정 터틀넥을 입었으면 샤넬 귀걸이가 어울릴 텐데.
샤넬 귀걸이 가격은 얼마지? 76만원?
패스.
'하지만 귀걸이는 하나쯤 사 주고 싶은데.'
"샤를, 귀는 뚫었어?"
내가 살피자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귀를 보여줬다. 작은 구멍이 귓불에 앙증맞게 위치한다. 그리고 귀 근처의 잔머리, 새하얀 목덜미, 손목 안쪽까지 훤히 드러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빨개질 것 같은 얼굴을 애써 억누르며, 직원에게 제품 하나를 꺼내달라고 했다.
"이건 어때?"
13만원짜리 제품. 로즈골드와 반짝이는 큐빅. 유다 누나에게 받은 알바비에서 생활비를 빼고, 한번 더 알바를 한다고 하면 이번 달은 어떻게든 살아질 것 같았다. 원피스에 7만원 정도를 쓴다고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예산 내!
샤를의 귀에 귀걸이를 대 주자, 싱긋 웃으며 검은 머리카락을 더 들어올렸다.
"어때요? 오빠 보기엔 이뻐요?"
시선이 귓불과 목덜미로 확 집중되서 엄청 예뻤다.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걸로!"
거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샤를이 말했다. 내가 예쁘다고 해 주면 뭐든 괜찮은 듯 했다.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직원이 샤를에게 물었다.
"착용하고 가실 건가요?"
"네!"
손을 내밀어 귀걸이를 받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귀를 드러내 귀걸이를 꽂았다. 침이 귀를 파고 들어가는 동안 샤를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놀랍도록 섹시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며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계산했다. 영수증은 버려 주시구요.
"오빠, 어때요?"
양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샤를이 활짝 웃었다. 천 개의 태양이 반짝이는 듯한 미소.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선물 좀 해줄걸. 나는 더듬거리며 샤를을 칭찬했다.
"진짜 잘 어울린다. 샤를. 예뻐."
"헤헷. 고마워요 오빠! 맨날 하고 다녀야지."
마음이 붕붕 떠올랐다. 엄청 좋아하네. 이번엔 여성복 매장이다. DP된 옷 중에 눈에 띄는 옷이 있었다.
흰 원피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제품이고, 어깨는 안 드러나고 가슴 쪽만 적당히 V자로 파여있다.
몸의 문신은 하나도 안 드러날만한 원피스였다. 굳이 문신을 시켜 놓고, 왜 이런 옷을 사냐고?
샤를이 저번에... 뭔가 문신을 남한테 보여주는 게 좀 거부감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이런 옷은 어떨까 싶었는데.
"어때, 샤를?"
흰 원피스를 내밀자 샤를은 당황한 듯 나와 원피스를 연신 쳐다봤다. 손에 옷을 들려주고 피팅룸을 가리켰다.
"저기로 들어가서, 한번 입어봐."
"어, 입어봐도 돼요?"
피팅이란 게 생소한 듯 움찔거렸지만, 일단 들어갔다. 피팅룸 옆에서 기다리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어, 음... 어때요?"
피팅룸에서 나온 샤를을 보고 나는 말을 잃었다. 점원도 감탄을 내뱉었다.
"손님,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아까까지 입고 있던 검정 민소매 터틀넥은 문신을 다 가렸다고는 해도 묘하게 음란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입은 원피스는 샤를을 완전히 청초한 아가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순백의 드레스처럼 나풀거리며 방울꽃처럼 청초한 분위기를 뽐낸다.
막상 샤를은 이런 옷은 처음 입어보는지 연신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엄청 부끄러워하는 중이지만, 정말 귀엽고. 예쁘다. 샤를은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내게 물어봤다.
"오, 오빠. 어때요? 이상하진 않아요?"
"엄청 잘 어울려! "
물론 커다란 가슴 덕분에 V자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입었던 옷들보다는 훨씬 덜 야했다.
음, 이런 것도 좋네. 다른 남자들 눈도 덜 탈 거고.
"이것도 한 번 입어볼래?"
샤를이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을 동안 고른 옷도 한벌 내밀었다.
이건 내 취향의 옷이긴 하다. 두번째로 준 건 회색 H라인 원피스. 영선 누나가 입은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신도시 미시녀가 입을법한 건데...
"우으으..."
옷을 갈아입고 나온 샤를은 조금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샤를의 키가 꽤 있다 보니 허벅지가 훤히 보여서 가터벨트 타투를 만천하에 공개했고, 가슴은 압도적으로 튀어나와서 브래지어 라인이 전부 보인다.
가슴에서 골반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미려한 곡선을 그렸지만, 몸매가 너무 폭력적이다 보니 옷이 거의 홀복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점원도 "잘 어울리...셔요..." 라며 말을 삼켰다. 너무 야해보인다.
"오빠는, 이런 옷이 좋아요?"
뭐, 나한테 람보르기니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거랑 마찬가지 아니겠어? 하지만 이걸 입고 가긴 좀 그렇네.
"샤를, 원피스로 다시 갈아입고 나올래?"
그러자 샤를이 고개를 팍팍 끄덕였다. 샤를이 피팅룸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점원에게 말했다.
"원피스 두개 다 결제할 거거든요. 흰색 원피스는 입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택 떼드릴게요. 교환 환불 안 되는 거 아시죠?"
"아, 네."
어느 새 샤를이 피팅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내 곁으로 총총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이 흰색 원피스는 샤를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비단같은 머리는 흰색과 대조되서 엄청 예쁘다.
"샤를. 진짜 잘 어울려."
칭찬을 들은 샤를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선물이 엄청나게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시계를 봤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아, 오빠. 시간 거의 다 됐어요!"
"어? 그렇네?"
쇼핑백을 받아들고 9층의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그 동안 샤를은 거울 비슷한 게 보일때마다 걸음을 늦추며 몸을 비춰봤다.
"샤를. 그렇게 좋아?"
샤를이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고 하니 정말 좋네.
강민이 그렇게 생각할 동안, 샤를의 마음 속은 분홍빛으로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강민 오빠...의외로 센스가 있네.'
샤를은 마음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많은 연인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상대방이 말하지 않은 소망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소망들.
연락 잘 해 주면 좋겠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면 좋겠어. 나는 꽃을 좋아한다고 스무 번은 말했는데. 고기보다 회가 좋은데. 섹스보다 그냥 오래도록 껴안고 있고 싶은데.
분명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티를 냈는데, 분명히 말을 했는데, 상대방은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는 것 같다.
그게 쌓여갈수록 관계는 서서히 삐걱거린다. 그렇다고 직접 말하기는 싫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날 사랑한다면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당연한 걸 꼭 말해줘야 아는 사이라니. 슬프잖아.
샤를의 마음 속도 그랬다.
강민이 짧은 옷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가슴도, 허벅지도, 배꼽도 다 드러나는 옷을 입히고,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샤를은 그게 싫거나,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단 둘이 있는 공간이라면 기쁘게 입어줬겠지만.
길을 걷다 보면 느껴진다. 길에서 남자들이 스쳐간 후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쳐다본다. 버스를 타는 동안 자신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다른 자리가 많은데도 굳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도 있었고. 그래서 강민한테 말하고 싶었다.
'이런 옷 말고, 다른 옷 입으면 안돼요? 아예 안 입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데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이런 옷을 선물해 준 걸까?
강민의 손을 잡고 영화관으로 향하는 샤를의 가슴은 쿵쿵 두근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강민에게 걸어간다. 섹스할 때 험하게 하긴 해도, 평소에는 나 잘 봐주고 있었구나 음, 그랬구나
섹스하는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강민이 뒤돌아보지 않길 바라며 총총 걸어갔다.
오늘은 왠지, 정말 즐거운 데이트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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