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102. 봄날의 농담곰과 말레이곰을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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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새벽 다섯시 반. 영선 누나랑 운동할 시간이다! 운동 코스는 전날과 똑같았다.
뚝섬 천변을 5km 러닝. 똑같이 힘들었다. 이틀만에 체력이 늘 리가 없지.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반환점을 돌기 직전 영선 누나가 허리를 감싸쥐고 몸을 숙였다. 세상에, 무슨 일이야? 겨우 2.5km 뛰었을 뿐인데?
"누나, 어디 아파요?"
걱정스레 다가가자 영선 누나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처음 봐서 마음이 쓰였다.
"오늘 좀 아픈 것 같은데, 괜찮아요?"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시스루 바람막이도 입고 있었다(예전에 몸에 낙서플하다 입었던 거 말야). 평소엔 덥다고 그냥 스포츠브라에 레깅스 차림으로 다녔는데.
"누나, 말을 해야 알죠. 몸살이에요?"
"아, 그날이라고!"
영선 누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날 꼬집었다. 아, 음, 그런 거였군. 아팠지만 부끄러워서 비명도 못 지르겠다. 다시 출발했다. 영선 누나는 내 옆에서 뛰며 말했다.
"그래도 나 정도면 별로 안 아픈 편이야. 지금 이틀째니까. 목요일이면 멈출걸?"
아. 금요일까지 섹스를 미룬 게 그것 때문이었나! 생리하는 동안 섹스하기 싫어서!
하지만 컨디션 안 좋은 상태에서도 운동을 나오다니. 염려되서 물어봤다.
"누나, 그래도 아프면 쉬는 게 좋지 않아요?"
영선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태도였다.
"언제든 준비해야 해. 만약 중요한 복싱 시합 잡혔는데 생리중이면, 그땐 뭐라고 말할건데? 못하겠어요 이래? 한번 미뤄달라고 징징거릴까? 전국체전을 미룰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입을 다물자 계속 말했다.
"그럴 수는 없어. 언제나 만전인 상태로 링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지. 극복할 순 없어도 익숙해질거야!"
당차게 외치는 영선 누나의 눈은 다이아처럼 반짝거렸다.
뭐랄까, 이런 면에선 존경스럽다. 파도를 헤쳐나가는 배의 선장처럼,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다룰 지 각오가 선 사람이라고 할까. 키를 단단히 붙든 사람이라고 할까.
영선 누나는 감상에 빠진 날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몸 안 좋은 나보다 뒤쳐지면 부끄러운 거 알지? 나보다 느리면 2km 추가야."
젠장! 속도 더 올려! 2km 더 뛰기 싫으면!
하지만 불행히도 몸이 안좋은 영선누나마저 이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헉헉거리며 2km를 더 뛰었다.
"물, 물좀. 물좀 사게 해주세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거리를 맞추려고 영선 누나가 오픈하는 복싱장 앞까지 뛰어버렸다. 겨우 2km 더 뛰었다고 심장이 터질 지경이다!
하지만 누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땀도 이마에 희미하게만 난다. 얼마나 체력이 센 거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물이랑, 어이것도 같이 주세요."
계산 후 숨이 진정될 때까지 잠시 서 있다가, 나와서 물은 내가 마시고 유리병을 누나 주머니에 넣어줬다. 누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깜짝이야. 이거 뭐야? 뜨거운데?"
꿀물이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 아플 때 배에다 온찜찔하면 좋대요. 너무 얇게 입고 돌아다니진 말고."
영선 누나가 흠, 흠 기침하며 먼 곳을 바라봤다. 귀까지 빨갰다. 그러며 더듬더듬 고맙다고 말했다.
"어, 어. 고맙다. 야. 이런 것도 다 받아보고. 별일이네. 이런 거 챙겨주는 사람 한번도 없었는데."
엥? 나는 의문에 이마를 찌푸렸다. 영선 누나가 피시방 시재 못 맞춰도 안짤리는 이유가, 이 동네에서 운동하는 사람 대부분이 영선 누나 오빠같은 존재라서 아니었나?
그래서 피시방 손님도 많았었는데. 궁금증을 참지 말고 물었다.
"누나, 운동 하면서 아는 사람 많지 않아요? 그 동안 아무도 안 챙겨줬어요?"
그러자 영선 누나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티를 안 냈거든. 굳이 몸 안 좋다고 징징거리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냥 묻어버리고 넘겼는데. 너한테 처음 말해보는 것 같네..."
말하고 나니 쑥쓰러운 듯 먼 곳을 쳐다봤다. 나한테만 말했었다라. 상당히... 귀엽잖아!
참지 못하고 영선 누나의 허리를 껴안았다. 누나는 깜짝 놀란듯 몸을 움츠렸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있는지 주변을 얼른 살피더니 눈을 감고 고개를 15도 각도로 기울였다. 키스 하기 편한 자세. 입술에 살짝 키스해줬다.
그리고 포옹을 풀고 말해줬다.
"누나. 우리 가깝고 친한 사이잖아요. 힘들거나 아프면 말해줘요. 혼자 앓지 말고."
그러자 영선 누나의 눈이 별이 떨어진 우물처럼 반짝거렸다. 마음 한구석이 찡한 듯, 뒷짐을 지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나를 다시 꽈악 껴안았다.
"나쁜 자식.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기 있어?
평소엔 엄청 나쁘게 대하면서..."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포옹하고 허리를 탁탁 두드려 주며 속삭였다.
"금요일에 운동 끝나면, 엄청나게 괴롭혀 줄 거예요. 기대해요."
그러자 영선 누나의 허리가 요염하게 배배 꼬였다. 내가 속삭인 말과 허리를 쓰다듬는 손에 엄청 흥분한 듯 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네 손 잡고, 집으로 가고 싶거든...?"
생리중에 섹스가 땡긴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영선 누나는 애달프게 속삭였다.
"오픈만 아니었음...바로 갔을텐데..."
그러다 영선 누나가 시계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서 떨어졌다.
"슬슬 아빠 오겠다! 일단 오픈해야겠어!"
영선 누나가 후다닥 옆의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나도 따라가 계단에 대고 소리쳤다.
"금요일날 봐요. 운동 끝나고. 바로 누나 집?"
그러자 영선 누나가 계단 위에서 날 내려다보며 고개를 팍팍 끄덕거렸다. 벌써부터 금요일이 기대되는지 얼굴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럼 금요일날 봐요!"
"응! 금요일날 봐!"
나한테 손을 흔들어주고 쏙 사라졌다. 확실히 영선 누나, 좀 귀여운 면이 있단 말이지.
인사하고 계단에서 돌아서 나가는데 쿵, 하고 벽과 부딪혔다.
"아야!"
제기랄, 문이 닫혔나? 웬 벽이 있어? 이마를 문지르며 앞을 봤는데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근육 덩어리. 강철같은 복근. 곰 같은 몸뚱이. 터질듯한 승모근.
"자네는 누군가?"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나도 평균보다 큰 키인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거의 190은 되는 키에 내 허벅지보다 두꺼운 목.
나는 크기에 압도되어 올려다봤다. 짧게 깎은 머리. 단정하게 가라앉은 눈빛.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 복싱장 수강생은 아닌 것 같은데?"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턱을 만지는데, 건물 밖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관장님, 무슨 일이세요?"
곰이 뒤를 돌아보며 허허 웃는다.
"아, 우리 딸 목소리가 들려서. 관원이랑 인사하는가 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복싱장 관장? 순간 영선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아빠 복싱장인데 딸을 너무 부려먹어
"저, 영선 누나 아버님... 이신가요?"
내가 더듬더듬 말하자 나에게 흥미를 보였다.
"맞네만. 자네는 누군가?"
영선 누나의 이름을 듣자 시선이 쑤욱 내려왔다. 곰이 냄새를 맡듯 내 어깨 주변을 탐색하고, 날 훑어본다. 육식동물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자기소개를 했다.
"아, 영선 누나랑, 아는 동생 사이입니다!"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허리를 숙이자 아버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어쩐지. 영선이가 아침에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자네랑 같이 운동하는 건가?"
"넵! 그렇습니다!"
영선 누나 아버님의 눈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기분이 좋은 듯 허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곰 앞발에 채이는 기분이었다.
"음, 좋구만. 나중에 바쁘지 않으면 복싱장에도 한번 놀러 오게.
우리 복싱장엔 영 험악한 놈들밖에 없어서. 예쁜 내 딸내미가 이렇게 왈가닥으로 큰 것 같단 말이지...
자네처럼 평범하고 곱상한 관원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자 험악한 놈으로 불린 남자가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아니, 관장님. 제가 어딜 봐서 험악하다는 겁니까?"
관장님이 곰이라면 방금 들어온 사람은 말레이곰 같은 느낌이다. 팔다리도 길고, 눈에 묘하게 광기가 서려있다. 복싱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들어온 사람을 보며 아버님은 혀를 쯧쯧 찼다.
"에잉, 텄어, 텄어. 여튼 딸하고 좀 친하게 지내 주게!"
나에게 당부의 말을 한 관장님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말레이곰은 올라가지 않고 날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대뜸 말했다.
"영선이랑 사귀면 너 아마 고생좀 할걸?"
진심으로 불쌍해하는 목소리.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영선 누나랑 사귀다뇨. 무슨 소리를!"
"아냐? 아니면 말고."
말레이곰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계단을 올랐다. 대체 뭔데? 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봤다.
"근데 영선 누나랑 사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요?"
말레이곰은 내 목소리에 씨익 웃으며 뒤를 봤다.
"아이고, 영선이한테 관심이 아주 없진 않나보네. 영선이랑 사귀면, 친오빠 수준의 오빠들이 백 명은 넘을걸."
"배, 백 명이요?"
내가 기겁해서 물어보자 말레이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내게 경고했다.
"영선이 눈에 눈물나게 만들지 마라. 영선이가 조금 우울해하기라도 하면, 쟤 일곱 살 때부터 보던 관원들이 너 죽이러 갈걸?"
저절로 등에 땀이 흘렀다.
"여튼, 힘내라고!"
말레이곰은 눈의 광기에 비해 제법 착한 사람이었다. 들어가는 말레이곰의 등에 인사를 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머릿속에 불안감이 뭉게뭉게 퍼졌다.
음. 영선 누나 묶어놓고 울때까지 괴롭힌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말레이곰과 불곰이 사이좋게 내 몸을 이등분하는 불길한 상상을 떨치고, 2km를 천천히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샤를이랑 데이트하기 전에, 잡아먹힐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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