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98. 평온한 일상
* * *
지금을 즐기기 위해 샤를이랑 같이 침대에 누워 뒹굴거렸다. 팔베개를 해 주고 멍하니 다음 영상 컨셉을 생각해 봤다.
다음 영상 컨셉은 샤를을 오나홀처럼 대하며 섹스하는 걸로 해볼까? 애무나 키스 일절 없이 배에다가 오나홀♥ 이렇게 써 놓고 말야. 중대형 오나홀 샤를 컨셉이라면 구독자들도 좋아할 것 같고.
괜찮은 것 같은데, 생각하며 뒹굴거리다 떨어질 뻔 했다. 역시 슈퍼싱글 침대는 두 명이 있기엔 너무나 좁군.
'...집도 좀 더 넓었으면 좋겠는데.'
방 안을 둘러봤다. 각자 혼자 있을 공간이 아예 없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생활이 길어지면 불편해질 터였다. 특히 내가 알바를 그만둔 게 크리티컬하다. 24시간 원룸에서 동거하다 보면 샤를도 답답할 것이다.
최소한 내 방, 샤를 방, 거실. 이렇게는 있어야 하는데!
좋아, 결심했다. 폰허브 수익 들어오면 이 원룸에서 이사간다! 그리고 킹 사이즈 침대를 산다!
'근데, 샤를한테 아직 제대로 된 옷 못 사준 게 좀 걸리네.'
벽에 걸린 행거를 봤다. 안 그래도 적은 샤를의 옷이지만, 그 중 정상적인 옷은 청바지 하나뿐. 나머지는 전부 레깅스, 돌핀팬츠, 크롭티밖에 없다.
...유다 누나한테 알바해서 받은 돈도 있으니까. 내일은 같이 쇼핑이나 가 볼까? 데이트도 하고? 결심을 세우고 샤를에게 물어봤다.
"샤를. 내일 같이 쇼핑 갈래? 그러고 나서는 영화도 보고."
"어, 어? 쇼핑이요? 그리고 데이트?"
샤를은 깜짝 놀라 일어나다 자신의 이마에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엄청 아파하며 이마를 막 문지르면서도, 눈을 반짝거리며 날 바라봤다.
"진, 진짜요? 오빠랑 같이? 둘이서?"
아, 당연히 둘이서지.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내가 샤를 널 성욕 해결용 변기로밖에 안 보던 것도 아니고! 나도 그냥 데이트도 하고 싶어!
하지만 샤를은 내 말을 못 믿는지 이마를 찡그리고 물었다.
"데이트 하면서... 야한 짓, 할 거예요?"
"...안 해."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참았다! 물론 영화관에서 허벅지를 만진다던가, 지퍼 내리고 장난치는 걸 생각 안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데이트도 좀 해 봐야 할 거 아냐!
"그런 거 안 할 거야. 둘이서 시내 놀러 나가자. 옷 예쁜 거 사줄게."
"진짜죠?"
샤를은 신나는지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콩콩 찧었다. 내일 뭘 입고 갈 지 생각하는 듯 눈이 행거를 훑었다.얼마나 좋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중이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면 진작 좀 같이 놀러갈 걸. 거의 한 달이 다 되가도록 집에서 섹스밖에 안 했었다니.
샤를이 아무리 서큐버스라고 하지만 너무 심했네! 은근히 찔려서 변명했다.
"원래는 오늘 같이 나갈까 했는데. 오후에 유다 누나가 또 알바 도와달라고 불렀거든."
"후웅 그래요?"
샤를은 오후가 심심해 지겠네 중얼거리며 이불에 고개를 푹 묻었다. 흠. 샤를이 날 기다리는 동안 안 심심했으면 좋겠는데. 뭐가 있으려나?
"넷플릭스 보면서 기다릴래?"
그러자 넷플릭스는 싫은지 혀를 베 내밀었다.
"영화 몇 편은 재밌었지만 이제 좀 질려요. 너무 어지럽구.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농담이 너무 많아요!"
하긴, 18세기 사람이 넷플릭스를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것도 많겠지. 그럼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 샤를이 처음에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어 왕, 파우스트 등의 고전 소설을 이야기하는 걸로 봐서 샤를은 책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 샤를. 도서관 갈래?"
책을 좋아한다는 짐작이 맞았는지 샤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도서관? 책 빌려주는 곳? 맞아요?"
게이트가 도서관에 관한 지식은 넣어줬나보네. 다행히 근처에 자양한강도서관이 위치해 있다. 크고 쾌적하고.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버스타고 갈 수도 있고.
"응, 맞아. 가 보자! 샤를 도서관 데려다 주고 난 유다누나 알바 가면 딱 맞겠는데?"
"좋아요!"
샤를은 신이 나서 행거 앞에 섰다. 그러다 내 쪽을 보며 살짝 웃었다.
"오빠, 저 옷 벗을 건데. 고개좀 돌려 주실래요?"
"어? 엉. 알았어."
등을 돌리자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에서 입는 빅사이즈 티셔츠 벗는 소리, 그리고 돌핀 팬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소리가 멈췄다.
"다 입었어요!"
뒤를 돌아보자 샤를은 아직도 민트색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타이트한 청바지를 들고 있다. 그러며 팔로 가슴을 받쳐 올렸다. 거유가 뭉클거리며 거대한 계곡을 만들었다.
"히힛, 속았대요"
장난기 넘치는 미소였다. 가슴을 이리저리 주물러 가며 모양 바뀌는 걸 나에게 자랑했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돌렸다. 뭐랄까, 섹스는 안 부끄러운데 이런 장난에는 너무 약해진다.
고개를 돌리고 좀 있으니 다시 샤를의 말이 들렸다.
"옷 다 입었어요! 이번엔 진짜예요."
딱 달라붙는 청바지. 배꼽이 드러나는 크롭티(어떤 옷을 입어도 가슴 탓에 야해 보인다). 티셔츠의 가슴에 써져 있는 문구는 잔뜩 부풀어서 읽기 힘들 정도였다. 정말 샤를의 가슴은 참 착하단 말이지...
"그럼 가볼까?"
"네!!"
샤를은 내 슬리퍼를 꿰어신었다. 확실히 하이힐은 좀 불편하겠지. 나도 운동화를 신었다. 나가자마자 샤를은 내 손을 잡고 바싹 달라붙었다.
"도서관이라. 음. 뭘 읽어야 하지? 도서관에 신곡 천국편이 있을까요? 지옥편은 진짜 실감나고 재밌었는데. 마계에선 천국편을 불온도서라고 안 갖다놨거든요!"
군대의 불온서적같은 건가... 그보다 단테의 신곡이라니. 읽어본 적은 없고 들어본 적만 있다. 지옥편은 지상에 지옥같은 곳이 너무 많아서 쓰기 쉬웠는데 천국편은 쓰기 어려웠다고 했었지. 미리 책 내용을 스포하진 말아야겠다.샤를은 책 이야기가 신나는지 연신 말했다.
"제 생각에, 괴테는 진짜 지옥에 와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악마랑 거래를 해서 구경하러 온 거죠!"
상당히 설득력 있네. 이야기하다 보니 큰길까지 빠르게 나왔다. 샤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버스 어디서 타면 돼요?"
앗, 맞아. 샤를한테 버스 타는 법도 가르쳐 줘야겠다.
"지도 깔아줄 테니까 기다려봐."
샤를의 폰을 열어 지도를 설치했다. 샤를도 혼자서 어딘가를 다니려면 꼭 필요할 거 아냐.
"일단 출발지 설정부터 배우자. 알아서 잡아주거나, 여기 버튼을 누르면 설정할 수 있고. 목적지 써 보자! 자양한강도서관."
샤를은 능숙하게 목적지를 입력했다.
"돋보기 버튼을 누르고, 그 다음은 버스 모양."
샤를은 망설이다가 클릭했다. 폰이 망가지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상당히 웃긴데? 내가 웃자 샤를이 볼을 부풀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샤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행히 폰은 정상적으로 목적지를 출력해 줬다. 하지만 샤를이 과연 버스를 잘 탈 수 있을까?
무수히 나와 있는 버스 노선들에 샤를은 겁부터 먹은 듯 했다.
"오빠, 2km밖에 안 되는데 걸어서 가면 안돼요?"
안 돼! 중세시대 사람같은 발상이다! 여기서 멈추면 영원히 걸어다녀야 한다고!
"틀리면 알려줄 테니까. 한번 해 볼래?"
샤를은 불안한 눈으로 폰을 한번 보고, 날 한봤다. 그리고는 으흠! 이라고 말한 다음 내 손을 이끌었다.
GPS에서 움직이는 빨간 점이 자신이라는 걸 용케 알았는지,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보며 방향을 맞추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생각보다 잘 하는데?
"여, 여기 맞아요...?"
정류장 도착!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불안해하며 물어본다. 미안. 틀렸어.
"안타깝게도 반대 정류장이야."
그러자 샤를이 눈에 띌 정도로 시무룩해졌다. 어,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황급히 칭찬을 해 줬다.
"아냐! 그래도 잘 한거야! 벌써 지도를 잘 보게 된 거잖아!"
"거짓말..."
"아니야. 진짜로! 벌써 지도 사용법은 다 알게 된 거니까. 반대로 탔으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서, 반대로 타면 되지!"
샤를에게 버스 노선을 눌러 주며 반대 노선, 제대로 된 노선을 설명해 줬다. 샤를은 몇 번이고 반복해 가며 배웠다.
하지만 열 번은 잘못 타고 나서야 제대로 배우겠지? 그건 시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거란다.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이동했다.
"책은 어떻게 빌려요?"
"음... 기다려 봐..."
샤를을 사서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도서관 카드까지 만들어준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샤를은 반짝반짝 빛나는 도서관 카드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진작 밖에도 좀 데리고 나올걸!
"그럼 오빠! 이따 집에서 봐요!"
샤를이 휘휘 손을 저었다. 나도 손을 저었다. 샤를은 신이 나서 손을 흔들며,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날 바라보며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샤를은 도서관 데이트같은 것도 좋아하려나? 같이 책 읽거나 책 골라주거나 하는 것도 재밌겠네. 만화카페 같은 곳도 좋고.
여자친구가 생기면 해 보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가 차는 느낌이다. 하나씩 해 봐야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올라갔다. 히죽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데이트 장소를 짜다 보니 어느새 유다 누나의 공방까지 왔다. 벨을 누르자 철문이 열렸다.
유다 누나의 오늘 패션은 깔끔한 회색 청바지, 흰색 새틴 셔츠다. 음. 뭔가 좀 바뀐 것 같은데. 고민하는 동안 누나가 음료를 물어봤다.
"강민이 왔어? 차 마실래?"
"음, 아이스 커피?"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누나가 주방에서 뭔가를 이리저리 만졌다.뭔가 바뀐 것 같은데...
아. 그거다. 가디건 한 겹이 사라졌다. 그냥 긴 화이트 셔츠 하나로 끝. 문신이 다 덮인 건 아쉽지만... 복장이 변했다는 건 마음이 열려가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려나?
'그렇게 사람 마음이 쉬우면 좋겠지만...'
아마 내 착각일 가능성이 높겠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자 누나가 커피를 금세 뽑아와 내 옆에 앉았다. 이번엔 내 손 위에 살짝 손을 얹고 정면으로 바라본다.
키스? 포옹? 유다 누나는 뭐부터 할려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