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88. 마셔 마셔!
* * *
'강민이 친구라, 누구일까?'
영선은 들떠서 양꼬치집의 문을 열었다. 열기가 후욱 끼쳐왔다. 안을 훑으며 강민이를 찾았다.
'저기 있네!'
테이블이 마흔 개가 넘었지만 그 중 강민이의 얼굴을 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 순해보이는 외모. 영선은 잽싸게 달려갔다. 강민이 영선을 반겼다.
"어? 누나. 오늘은 원피스 입고 왔네요?"
영선이 강민이를 꼬시려고 처음으로 구입했었던 원피스다. 원래는 강민이 선물해준 남색 민소매 원피스(신도시 미시 패션)을 입으려고 했지만 너무 딱 달라붙었다.
단 둘이 데이트라면 모를까 강민의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입고 가기엔 너무 남사스러웠다. 하지만 테이블의 구성원을 보자 영선은 엄청나게 실망했다.
'뭐야, 보기로 한 친구란 게 샤를이랑... 여자였어?'
영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민의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인 줄 알고 두근거린 자신이 바보같았다. 친구들한테 소개시켜주려나 하고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어제 사장한테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서, 그 이후로 엄청 두근거리는데. 이 놈은 내 마음도 모르고 멍청하게 웃기만 하고
'아휴, 이 머저리. 진짜. 남의 속도 모르고.'
영선은 대충 설명한 강민을 속으로 욕한 후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근데 어째 자리 분배가 이상하다?
강민이는 보통 샤를 옆에 앉지 않나? 하지만 강민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게다가 둘의 손이 살짝 닿아 있는게 몹시 신경쓰였다.
영선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예의바른 운동부 유교걸답게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같이 강민이랑 알바하는 영선이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언니, 오랜만이예요!"
"안녕하세요. 유다예요."
강민 옆에 앉아있는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 숙였다. 이름을 말한 것 같은데 들리지가 않았다. 소심한 성격인가?
영선은 일단 샤를 옆에 앉았다.
그런데 샤를의 허벅지에 못 보던 게 생겨 있었다. 선물해준 돌핀팬츠 아래로 허벅지를 한 바퀴 두르고 있는 검은색 가터벨트 타투. 영선은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놀랍도록 야해 보였다. 같은 여자가 봐도 저게 뭐람, 하고 눈을 돌릴 정도로.
"세상에. 샤를. 이거 뭐야? 타투했어?"
"네. 강민 오빠가 하자구 해서!"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샤를의 모습에 영선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민 이자식... 샤를한테 문신을 새긴 거야? 그러고 보니 건너편의 은발머리 여자도 쇄골에 언뜻 문신이 보인다. 달, 고래.
'타투하는 게 강민이 취향이란 거야...? 어쩌지...?'
영선은 순간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도 타투를 해야 하나? 하지만 아빠가 정말 눈이 뒤집힐 텐데?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부위에다가 해야 할까?
하지만 떠오르는 부위는 속옷 안 쪽, 엉덩이. 이런 음란한 곳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다. 타투는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선택지였는데. 강민이 저놈, 내가 타투하면 좋아하려나. 그러고 보니 저번에 타투하면 처녀 보지에 사정해 주겠다, 이런 말을 했었는데...
"언니, 어디 아파요? 얼굴이 빨개요."
"어? 아냐. 아냐. 이 안이 좀 덥네."
실제로 양꼬치집 안은 숯불때문에 엄청 더웠다. 샤를은 별 의심 없이 그럴 수 있죠. 말하며 손부채를 파닥파닥 부쳐 줬다. 영선은 고맙다고 웃어주며 건너편에 앉은 유다를 스캔했다.
'가슴은... D컵 정도 되어 보이고.'
가슴에 비해서 엉덩이는 별로 없어 보이니 운동한 여자는 아니고. 영선은 정보를 수집하며 물었다.
"이 분은 누구셔?"
"아, 저 타투해 주신 샵 언니예요! 유다 언니라고!"
아하, 허벅지의 타투를 해준 사람이란 말이지.
"안녕하세요. 유다예요."
유다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영선은 유다와 강민을 번갈아 쳐다봤다. 심기 불편한 호랑이가 쏘아보는 듯한 느낌에 강민과 유다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영선 누나.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어?"
"글쎄, 들어오기 전까진 기분 좋았는데. 그리고 나 지금도 기분 좋아. 왜 그래?"
글쎄요. 기분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아서요. 강민은 일단 앉아 있는 자세를 바로 했다. 유다도 슬쩍 자세를 고쳐앉았다.
"뭐, 일단 왔으니까 한 잔 마실까?"
영선은 탁자 위에 놓인 연태고량을 맥주잔에 조금씩 깔고, 그 위에 칭따오를 부어 풀업(pull up, 바텐딩에서 거품이 날 정도로 세게 다른 액체를 붓는 것)으로 올렸다. 그리고 각자 앞에 잔을 놔 줬다. 불편하던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 영선은 자신이 만든 폭탄주를 자랑헸다.
"냄새 한번 맡아볼래?"
셋 모두 잔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어? 이게 무슨 냄새지? 아씨, 맡아본 것 같은데."
"전 모르겠어요. 뭐지?"
"배꽃 향이 나네요."
칭따오와 연태고량을 9:1 비율로 섞으면 향도 좋고, 맛도 좋은 폭탄주가 된다.
유다가 정확하게 맞췄다. 영선은 유다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코가 예민하네? 좀 더 정보를 캐봐? 영선은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그래서, 타투 해 준 누나랑 같이 한 잔 하러 온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강민이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은 속으로 욕을 했다.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순진하게 웃는 거야. 꼴리게. 저러다가 돌변하는 게 진짜 흥분되는데.
'아이 씨, 남들 다 있는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영선은 머릿속의 마구니를 쫓아내며 턱으로 유다와 강민 사이를 가리켰다.
"근데 둘이 손은 왜 잡고 있어?"
"제가 남자를. 좀 무서워하거든요."
남자를 무서워해서 옆에 꼭 붙들고 있다고? 조금만 더 무서워하면 아예 껴안고 있을 기세인데. 영선은 의심스럽게 유다를 쳐다봤다. 샤를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설명했다.
"언니. 음, 예전에 유다 누나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남자한테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근데 강민 오빠는 그나마 괜찮아서 남자에게 익숙해 질 겸 빌려 드렸어요."
빌려 줬다고? 흐으음 영선은 유다를 찬찬히 관찰하며 앞의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빌려 줬다고? 뭐, 샤를 너랑 강민이가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나도 강민이 여친은 아니니까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지만, 괜히 꼴받네... 저새끼는 여자 옆에 앉혀 놓으니까 좋다고 헤실헤실 웃는거 봐.'
벌써 잔이 다 비었다. 영선은 폭탄주를 한 잔 더 만들며 속으로 강민을 욕했다.
'이새끼. 이 여자 저 여자 다 건드리고 다니고... 치마만 두르면 다 쑤시고 보는 거 아냐? 강민이 이 놈, 얌전한 고양인 줄 알았는데 세상 부뚜막이란 부뚜막은 다 올라가고...'
자신도 모르게 술이 콸콸 쏟아진다. 샤를이 영선을 말리며 외쳤다.
"언니! 맥주랑 섞었는데 왜 이렇게 투명해요!"
영선은 깜짝 놀라 자기 앞의 잔을 봤다. 연태고량이 거의 90%가 넘고 맥주가 10%인 지옥의 폭탄주가 완성됐다. 뭐, 상관 없지. 영선은 잔을 들어 한번에 비워버리며 유다에게 질문했다.
"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 스물 다섯이요."
독한 화주를 물처럼 마셔대는 영선의 모습에 유다는 쫄아버렸다. 덜덜 떨며 나이를 말하자 영선이 편하게 하시라고 웃었다.
"그럼 저보다 한 살 언니네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하지만 유다는 쉽사리 말을 놓을 수 없었다. 뭐랄까, 영선에게서 독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미, 미안해요. 제가 말을 잘 못 놔서..."
'어쩐다, 나도 그러면 불편한데.'
영선도 뼛속까지 운동부 체질이라서, 언니가 말을 못 놓는다고 하니 좀 불편하다. 그럼 좀 취하게 만들어서 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지.
"자, 자. 다들 드세요."
영선이 솜씨 좋게 익은 양꼬치를 빼내 각자 접시 앞에 덜어준다. 강민도 꼬치를 붙들고 앞에 쓱쓱 빼주며 양꼬치를 뜯었다. 순식간에 4인분이 사라지고 맥주도 세 병째.
"꿔바로우?"
"아, 누나. 당연한 거 아냐? 먹어야지."
"전 동파육이란 걸 먹어보고 싶어요."
베이컨과 닮았는지 샤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유다도 술이 좀 들어갔는지 용기를 내어 말한다.
"저는...온면..."
"오케이. 사장님! 여기 양갈비 4인분이랑 꿔바로우, 동파육, 온면, 그리고 칭따오 세 병 더!"
곧이어 요리가 쏟아져 나왔다. 열심히 먹고 있는데, 사장이 뭔가를 더 가져왔다.
"아이구, 예쁜 처자들이 잘 먹네. 이것도 먹어봐요."
건두부 청경채 볶음과 토마토 계란볶음이다. 보기 드문 미녀가 셋이나 모여있으니 서비스 안주도 더블로 나온다. 셋은 활짝 웃으며 열심히 안주를 들이마셨고, 유다도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와 비례해서 폭탄주도 열심히 들어간다. 연태고량을 한 병 더 시키자 모두의 눈이 몽롱하게 변해갔다. 영선은 물 대신 맥주를 마시며 강민을 빤히 바라봤다. 슬슬 이쯤이면 어떤 관계인지 더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옆의 유다 언니랑. 잤냐?"
쿨럭, 쿨럭. 돌직구에 강민이 맥주를 뱉어냈다. 샤를이 깜짝 놀라 휴지를 뭉텅이로 뽑아 강민에게 넘겼다. 그리고 주변의 테이블도 모조리 조용해졌다. 이 가게 안 남자 손님들의 귀는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아이돌같은 외모의 왕가슴 타투녀, 병약해 보이는 피어싱 안경 미녀, 건강한 태닝 금발 양아치 미녀. 이렇게 셋이 모여 있고, 남자 하나가 거기에 섞여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리가 없다.
모두들 강민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