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86화 (86/358)

〈 86화 〉 83. 강민 참교육

* * *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복잡한 이유로 화가 났다. 치졸하게 회식에 안 부르는 식으로 따돌리는 것, 영선 누나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찝적거리는 점, 그리고 저번에 술자리에서 개지랄을 하고도 정신 못차린다는 점.

존나게 비꼬아주고 싶어졌다.

"저, 사장님. 눈치 없는건 제가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영선누나는 사장님 싫어하지 않습니까?"

은근히 속을 긁어봤다. 그러자 얼굴이 시뻘개진다. 바로 욕을 하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야, 씨바.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영선이 걔 말만 그렇게 하지, 나 은근히 좋아하거든? 저번에 그 뭐냐! 내가 스벅 커피 사다주니까 고맙다고 웃으면서 눈인사도 하고!"

그럼 커피 사다줬는데 욕을 하리? 절망적인 현실지각 능력이었다. 계속 영선누나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모습을 절대. 절대 보고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차리게 만들어줘야겠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 지금 영선누나랑 사귀고 있거든요. 사장님이 이러시면 불쾌합니다."

"뭐, 뭐?"

사장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해간다. 울그락불그락 했다가 이제는 새하얘진다. 제삿상 위에 올리는 돼지머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하는 모습이 아주 꼴 보기 좋구만.

"사장님이 자꾸 따로 술먹자고 연락하는 거 불쾌하다고 하는데요."

"뭐? 야, 아니. 씨발 너네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연신 물었다. 언제였더라.

"그때 사장님이 술 먹고 쓰러지셨을때. 집 데려다주다가 사귀게 됐는데요."

"허, 아니. 허... 허..."

상심이 큰지 어버버거리며 인간의 말도 잃어버린 듯 하다. 꼴 좋다!

"저,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나는 사장을 뒤로 하고 내려왔다.

'아이씨, 가불 받고 지를 걸 그랬나?'

잠깐 후회되긴 했지만 저렇게 어버버 거리는 모습을 보자 마음 속이 사이다 100병 마신 것처럼 청량해졌다.

월급 안 주면 노동부에 신고하면 되고, 생활비는 주말에 쿠팡 물류센터 알바라도 나가야지. 건강한 몸뚱이가 있는데 먹고 살수야 있겠지! 피씨방으로 내려오자 영선누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강민아, 사장이랑 무슨 이야기했어?"

"가불해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구요. 누나한테 찝적거리지 말래요. 영선 누나가 자기 좋아한다고."

"뭐?"

영선 누나의 미간이 극혐으로 찡그러들었다. 누나도 저 문신 근돼랑 엮이는 건 싫은가보다. 누나를 달랬다.

"신경쓰지 마요. 그래서 제가 영선누나랑 사귄다고 말해놨으니까 앞으로는 안 그럴거예요."

"어, 어? 어? 우리, 사귀는 거라고 말했어?"

영선누나의 눈이 똥그래졌다. 대낮에 환한 불을 본 올빼미같은 표정이었다. 귀엽네.

"아니, 뭐 실제로 사귀는 건 아니지만. 뭐. 사장 떼내려고 그렇게 말해준 거긴 한데."

머리를 긁으며 변명했다. 하지만 영선 누나는 그것마저도 행복한지 함박웃음을 하고 내 옆에 달라붙었다.

"아이구~ 우리 강민이, 누나랑 사귀는 사이라구 해 줬어요~?"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장난기 많은 모습이다. 내 허리를 껴안으며 쿡쿡 웃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야하게 만들며 물어본다.

"강민아, 퇴근하고 우리 집 갈래? 누나가 입으로 다 해줄게. 저번에 림잡 못해줬잖아. 강민이 너 림잡 받는 거 좋아하지?"

똥까시라는 단어가 부끄러운지 최대한 말을 돌린다.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오늘 저녁엔 샤를이랑 영화 볼까 했는데.

"그리고, 애널에 푹푹 박아줬으면 좋겠는데... 자지로 박히고 싶어­♥ 엉덩이 안에 든 거, 한번 더 빼내줘­♥"

누나는 내 손을 잡아서 자신의 엉덩이쪽에 올렸다. 좋긴 하지만, 약속이 있는데. 어쩔까.

"어, 누나. 저기 사장 내려왔는데."

저쪽 계단에서 사장이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이쪽을 노려본다. 누나랑 내가 하고 있는 똥까시와 후장 섹스 이야기까지 들으면 아주 볼만하겠네. 나는 일부러 착 달라붙어서 물었다.

"누나 회식은 안 가요?"

"너 가고 싶어? 갈 거면 같이 갈래."

"글쎄요... 사장이 나한테는 회식 있다고 말 안해줬는데."

"뭐?"

그러자 영선누나가 사장을 쳐다봤다. 사장의 치졸한 짓거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장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진다. 우리 둘이 붙어서 꽁냥거리는 걸 보면 속이 어지간히 뒤집히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해 할 거기도 하고.

예상대로 사장이 쿵쿵 카운터로 걸어왔다.

"야, 너네 일은 안하고 뭐하냐?"

"청소도 다 하고, 지금 음식도 다 나갔구요. 설거지 없습니다."

말대로 pc방 안은 완벽했다. 트집을 잡을 거리가 없으니 이제 억지를 쓴다.

"야, 너네는 사귄다고 하면 말을 해야지. 그래야 알바 짤때 안 겹치게 짤 거 아냐."

알바 시프트를 짜는 건 호준형, 그리고 영선 누나가 꽉 잡고있다. 다들 영선 누나랑 같이 일하고 싶어하니까 당연한 거지. 누구와 알바할 지는 영선 누나가 선택하는 거고.

"알바 시프트 짜는건 저랑 호준오빠 권한 아니예요? 저 강민이랑 같이 알바하고 싶은데."

영선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말한다. 사장의 이마에 힘줄이 생기는 게 눈에 보였다. 입을 벌려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일은 안하고 놀기만 하고 자빠져 있잖아. 내가 너네 연애하라고 돈 주는 줄 아냐?"

일을 안 하긴 개뿔이. 솔직히 우리 둘이 알바하면 매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음식도 제일 맛있게 내온다. 우리 둘이 꽁냥거리는 게 꼴보기 싫어서 억지를 부린다.

우리가 한심하게 쳐다보자 더 속이 뒤틀리는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친다.

"야, 때려쳐! 나가, 나가라고! 아니면 지금 여기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던가!"

때려치라면 못 때려칠 줄 알고? 나는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사장이 움찔했다.

"에이, 씨발. 병신같아서 못해먹겠네. 저기요. 그 나이 먹고 띠동갑인 사람한테 찝적거리기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뭐? 너 씨발, 말 다 했어?"

영선 누나는 내가 강단있게 사장한테 대드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 라는 표정이었다.

사장이 큰 소리를 지르자 피시방 안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일어났다. 이쪽을 쳐다본다. 사장도 사장 나름대로 기세등등했다. 누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 했다. 아니면 낭떠러지에서 등을 떠밀고 있던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는 휘둘렀다.

"이 새끼가, 어른이 말하는데 건방지게."

퍼억, 사장의 주먹이 내 팔뚝에 꽂혔다. 안 막았으면 머리에 맞을 뻔 했다. 미리 보고 팔을 들어 막긴 했지만 지방 낀 근육이라도 무게가 상당하다.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영선 누나의 눈이 훼까닥 돌았다.

"이 새끼가, 어디다 손을 올려­"

냅다 스텝을 밟으며 사장의 몸에 바디블로를 꽂으러 들어간다. 호랑이처럼 흉폭한 기세였다.

'저거 꽂히면 쌍방폭행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 영선누나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내가 일방적으로 폭행당했으면 당했지, 쌍방폭행으로 입건은 사절이다. 주먹의 진로를 가로막고 이를 악물고 충격에 대비했다.

뻐어어어어억­

'이런­ 미친­'

사장이 날린 주먹과는 비교도 안 될 충격이 몸을 관통했다.

영선누나한테 등 뒤로 키드니블로를 맞은 셈이니 어련할까. 제대로 서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자 영선누나가 놀라 달라붙었다.

"강민아, 괜찮아? 아니, 그러니까 왜 앞에 끼어들어서­ 저 사장새끼, 죽여버릴거야­!"

아니, 사장 탓이 아니라 누나 때문인데... 누가... 영선 누나좀 말려줘...! 숨이, 숨이 안 쉬어진다아아악­­!

"사장님, 왜 그러세요!"

다행히 싸움을 보고 있던 사람 중 오전 타임 우리 알바생들이 있었다. 퇴근 안하고 배그를 하며 회식을 기다리던 알바생들. 싸우는 우리를 뜯어말렸다. 둘은 사장한테, 하나는 영선누나한테. 다행히 영선 누나는 사장을 두들겨 팰 생각 대신 날 돌봤다.

"강민아, 일어나!"

나는 클레멘타인의 한 장면처럼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말을 짜냈다. 아악, 이건 정말로 아프다!!!

"누, 나... 경찰좀... 불러줘..."

***

"아하.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사장이 갑자기 머리를 때렸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 매장으로 온 경찰은 친절했다. 피씨방 사장을 다른 차로 실어가 진술서 받는 중이다. 열두살 어린 알바생한테 찝적거리다 남친한테 욕먹고 빡쳐서 주먹 휘둘렀다고 말하려나. 멍청하긴.

"뭐. CCTV도 있고. 목격자들도 많아서 폭행죄로 고소가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구요. 나중에 합의하자고 연락 오거나 그럴 수 있습니다. 오늘은 들어가시면 될 것 같네요."

"넵. 감사합니다."

조사실 밖으로 나오자 영선 누나가 우물쭈물하며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강민아, 괜찮아?"

"다행히... 피는 안나오네요."

누나는 자신한테 콩팥 부분을 잘못 맞은 선수가 피오줌을 쌌다는 무서운 소리를 했다. 정말... 무시무시했다. 아까 화장실 가서 확인해봤지만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알바도 그만둔 것 같네."

"괜찮아요. 어짜피 사장도 마음에 안 들고, 언젠가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생활비는 좀 걱정이다. 사장이 순순히 돈을 줄 지 모르겠네.

"혹시 진짜 돈 부족하면 말해. 나 돈 많아."

"뭐. 진짜 힘들면 말할게요."

그래도 기댈 대가 있다는 게 어디야.

"여튼 오늘 저녁은 샤를이랑 요양좀 해야겠어요. 대신 주말에 봐요."

"...알았어. 주말엔 기대하고 있을게."

영선누나는 금세 얼굴을 붉혔다. 둘이 같이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는 경찰이 태워줘서 집까지 갈 테니까. 오늘 밤은 샤를이랑 편안한 저녁을 보낼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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