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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54화 (54/358)

〈 54화 〉 53. 꿈 속의 카운셀러

* * *

예림이를 달래주느라 시간이 많이 가 버렸다.

밥을 마저 먹고, 이 닦고 씻고. TV에 예능을 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예림이는 예능이 신경쓰이는지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베개를 정리했다. 오늘은 일찍 잘 모양인데?

"왜 이렇게 빨리 누워?"

음, 예림이랑 한 번 더 뒹굴까 했는데. 아쉬워라.

"유다씨 꿈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마음이 상당히 불안정해 보이던데."

흠, 나도 궁금하긴 하네. 유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다. 어떤 이야기는 섹스보다 흥미로운 주제다.

"오늘 꿈에서 그럼, 셋이 이야기하는 걸로 시작할 거야?"

"아마도요?"

나와 예림이가 베개를 베고 누웠다. 잠이 들기 직전 예림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오빠, 오늘 영선 언니랑 어디서 뭐 한 거예요?"

아차. 마력이 올랐으니 다 들켰겠구나.

"아니, 뭐. 그냥 창고에서."

"창고요...? 오빠 야외에서 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건 야외가 아니지 않나?"

창고랑 야외는 엄연히 별개지! 애초에 문이 닫히는 곳에서 섹스하는 건... 야외섹스인가?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하자 예림이가 웃었다.

"야외에서도 오빠가 좋다면야, 다 해 줄게요.

아, 근데. 제가 흉내낸 유다씨 말고, 진짜 유다씨랑 섹스는 못 할 수도 있어요."

엥? 그래? 그건 좀 아쉽네.

"유다 씨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잘못했다가 꿈 속에 갇힐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일단은 친구 대하듯 해줘요."

"알았어. 그리고 섹스 못 해도 괜찮아. 네가 꿈에서 해 주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예림이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얹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그리고, 어두운 꿈 속으로, 굽이굽이. 그 다음엔­ 꿈인 걸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타투가 끝난 뒤, 유다와 같이 밤거리를 걷는다.

"유다 언니,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되게 힘들어 보이던데?"

"별일 없어."

유다의 복층 오피스텔에 모인 셋은 술을 꺼냈다.

독한 게 마시고 싶다고 해서 사 온 발렌타인 피아니스트 200ml * 8개. 총 1.6L.소주로 따지면 열 병 정도?

셋은 탁자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강민과 예림은 유다와 오랜 친구였다(꿈 속에서 그랬단 이야기다).

타투를 받을 겸, 오랜만에 유다의 샵에 들렀는데 시술 도중 갑자기 울어서 당황했다.

걱정도 되고. 그래서 저녁에 유다의 집에서 모인 것이다. 강민이 위스키를 비우며 걱정스레 물었다.

"누나, 오늘 많이 울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예림도 거들었다.

"언니, 저희 친구잖아요. 힘든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도 괜찮은데!"

유다는 별 일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강간당할뻔 했다고 말하기 싫었다.

걱정만 끼칠 텐데. 하지만 시술 중에 왜 울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그냥, 곧 생리라서 기분이 불안정하네."

"아, 그런 거예요?"

강민은 쑥스러운 주제인지, 시선을 돌리며 TV를 켰다. 하지만 나오는 뉴스가 좋지 않았다.

[ 네일 샵 사장, 남자 손님에게 살해당해... ]

"어우 씨, 세상이 왜 이렇게 흉흉하냐."

강민이 황급히 껐다. 하지만 유다는 충격을 받았다. 뉴스가 가슴에 집채만한 돌덩이를 던진다. 예림이 수심에 가득 차 물었다.

"언니도 타투샵에 남자랑 같이 있으면 무섭지 않아?"

"그래서, 비상벨을, 설치하긴 했는데..."

예림이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빤히 보는 중이었다.

저 눈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어진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받아줄 것 같은 눈빛.

아무도 다치지 않는 꿈처럼. 평온하게.

유다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나도 저런 일이 있었어."

예림의 눈빛을 보면 다 털어놓게 된다.

근데 강간당할 뻔한 일이 언제였지?

유다가 기억을 더듬자, 예림이 보충 설명했다.

"언니. 두 달 전에 가게 닫았던 거랑 관련 있어?"

아, 맞아. 두 달 전이었지.

"맞아. 가게 닫은 거. 사실 그거 입원한 거였거든."

"뭐? 언니, 무슨 일이었어?!"

"누나, 왜 말 안 했어! 병문안이라도 갔을 텐데!"

강민과 예림은 격하게 화를 냈다.

둘은 자신이 부모님과 반 의절 상태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격렬하게 화를 내는 거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혼자 입원해서 힘들지 않았어? 하며 나름 걱정해주는 것이다.

'그래도 걱정해 주는 사람은 너희들밖에 없네.'

유다는 어렸을 때부터 수인(?人)의 삶을 살았다. 친구랑 노는 것도 금지, 주말에 외출도 도서관으로, 집에 TV도 없었다. 꾹꾹 눌려 살던 유다는 결국 수능이 끝나고 터져버렸다.

수능을 보고 나와, 국영수 합쳐 하나 틀린 시험지를 내던지고는 원서를 쓰지도 않고 집안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반항을 위해 피어싱을, 타투를 했다. 엄마가 말했지. 저런 건 마귀 들린 년들이나 하는 거라고.

자기 귀에 피어싱을, 팔에 타투를 새길 때는 세상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해방감을 느꼈다.

만약 내가 타투샵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악마의 앞잡이라고 생각할까?

아마 자신의 부모님이 지금 유다의 꼴을 보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특히 갈라진 혀를 본다면...

'혀가 갈라졌다고?'

유다는 잠깐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피어싱도, 갈라진 혀도 없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람. 스플릿 텅은 그냥 할까 생각만 했었는데.

스플릿 텅에 대한 생각은 꿈처럼 손을 빠져나갔다.

하여간 둘에게 설명해야 했다. 두 달 전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자가 DM으로 예약해놓고는, 작업실에서 갑자기 아랫도리에 타투 할 수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비상벨 누르고 기다렸는데, 경찰 오기 전에 그놈이 갑자기 내 목을 붙잡고는."

맨정신으로 말하기 힘들어 술병을 따고 꼴깍꼴깍 마시며 이야기했다.

"막, 때리고, 걷어차면서... 날 덮치려고 하는데..."

강민이 술병을 뺏었다.

"누나, 진정해요."

하지만 유다의 입에서 말이 쏟아졌다. 강간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나 서러웠다.

그리고 울어봤자 달래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절연한 부모에게 말하기 싫었고, 12년 동안 공부만 하느라 친한 친구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나, 너무 무서워서. 그 이후로 남자랑 같은 작업실에 못 있어.

막 가슴이 떨려. 남자랑 있으면 갑자기 날 때릴 것 같기도 하고, 제 아랫도리에 타투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런 말을 할 것 같아서.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피어싱이 있어서 싸 보이는 거야? 여자 혼자 타투샵을 차린 게 문제야? 내가, 나답게 살고 싶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유다는 펑펑 울며 서럽게 소리쳤다. 강민과 예림이 옆으로 와서 유다를 껴안았다.

"언니가 잘못한 거 아냐. 그 새끼가 나쁜 새끼인 거지!"

예림이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화를 내준다. 유다는 마음 속에 조그만 햇빛이 비치는 느낌이었다.

"진짜 그럴까?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말할까?"

예림은 입을 다물었다. 읽은 기억으로 보면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유다가 집을 뛰쳐나가기 전, 유다의 엄마는 이건 다 마귀 탓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남편에게 물건을 던지며 네가 행실이 바르지 못하니 애한테 귀신이 들리는 거라고 고함을 치던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좋은 부모를 갖는 건 아니다.

예림은 그냥 유다를 꼭 안아줬다. 강민도 옆에 앉아 유다의 손을 쥐며 위로했다.

"유다 누나, 누나가 겪은 건... 그냥 불행한 사고야. 누나가 잘못한 게 아니야."

강민이 겪은 가난이 강민의 잘못이 아니듯.

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잘못해서, 벌의 개념으로 닥치지 않는다.

강민은 따로 위로할 말을 찾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겪은 가난 이야기를 꺼낸다? 그것도 이상했다.

남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이 겪은 불행한 일을 말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니까.

강민은 그래서 옆에 앉아서 유다의 손을 쥐고, 이야기를 들었다.

"나, 나... 뭐든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데에... 어쩌면 이 타투샵을 차린 것부터가, 하나의 거대한 실수는 아니었을까.

그냥 다 포기하고. 사범대 가서. 엄마 말대로. 결혼이나 했어야 할까 싶었는데.

아니면 진작, 남자 손님을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생각만 했어.

근데, 내가 부주의해서 그런 게아니야? 진짜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둘 사이에서 유다는 5년동안­ 아니 17년 동안 쌓여 있던 울분을 토해냈다. 뚝뚝 끊어지는 말을 뱉으며 엉엉 울었다.

둘은 그저 달래며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거 아니예요, 누나."

"아휴. 뚝!"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유다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러자 예림이가 등을 툭툭 두드려 주며 위로했다.

"언니, 많이 힘들었지? 무서웠고?"

유다는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울고 나서야 진정이 된 듯했다.

"예림이 너, 위로 잘한다."

"언니가 나한테 많이 해 줬거든. 그리고, 나도 뭐. 옛날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서. 그냥 둘 수가 없었네."

옛날에 겪은 일? 유다는 묻고 싶었지만 엉엉 울고 난 몸은 피곤했다. 남에게 궁금증을 표할 에너지가 없었다. 그저 감사할 기운만 조금 남아있을 뿐.

"달래줘서 고마워. 너희 둘 덕분에 좀, 기운이 나네. 응어리가 풀린 느낌이야. 술은 그만 마셔야지. 울고 나니까 피곤해. 너네 나중에 이걸로 나 놀릴 생각 하지 마. 졸립다."

유다는 갑자기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와 두서없이 말을 뱉었다. 그리고 자리에 눕자 둘이 속삭였다.

"유다언니 잔다."

"많이 힘들었나봐."

강민이 구석에 있는 이불을 들어 유다의 몸을 덮었다.

"아이구. 이불은 좀 덮고 자지."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강민, 이 나쁜 자식. 예림이 남자친구면서 다른 여자한테 친절하지 말란 말이야.

예림이도, 너도 더럽게 착해 빠져선... 고마워, 너희 둘 덕분에... 나는 오늘 조금, 구원받은 것 같아­

그리고, 깜깜해지기 직전­

"근데 샤를, 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게 무슨 말이야?"

"...잊어버려요. 오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완벽한, 어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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