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6. 영선 누나...? 당신 누구야?
* * *
"그렇다고 예림이 얼굴까지 모자이크하면 덜 꼴리는데. 어떻게 하지?"
그러자 예림이가 내 팔뚝을 껴안고 달라붙었다. 살짝 삐져있는 듯 하지만 눈은 반짝거린다. 폰허브에서 돈과 마력을 벌 생각에 신난 것 같다.
"오빠, 저 타투같은거 할까요?"
"타투?"
그러자 예림이가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쇄골쪽을 가리켰다.
"여기에 제 진짜 생일이랑, 태어난 날짜. 이렇게 새겨놓고. 손목이나 손등같은 곳에 타투 하고. 오빠가 좋아하는 타투도 하나 둘쯤 새기고. 생일 다르면 일단 의심 덜 할 것 같은데."
오, 좋은 생각인데? 그러면 진짜 예림이를 봐도 타투가 없으니까 닮은 사람이다 하겠지. 그보다 내가 타투 좋아하는 건 어떻게... 하긴. 예림이가 맨날 읽는 게 내 생각인데.
"예림이 너 똑똑하다?"
"힛, 솔직히 저도 영상이 기대되서 그래요."
우리는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다음 계획을 짰다. 여러가지 아이디어와 제한상황을 극복할 방법이 봇물처럼 튀어나왔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 둘은 엄청 신나서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 이런 거 찍었다가 잡혀갈 수도 있는데. 혹시 예림이 너 국적도 변경 가능할까?"
"아카식 레코드에서는 뭐든 되죠. 안 된다면 마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 뿐."
일단 국적은 바꿔놓고 포르노 배우 신청을 해야겠다. 일본? 아니면 캐나다 교포?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소개 영상 찍어서 메인에 거는 것도 좋겠네."
나는 예림이가 자기 소개 영상 찍는 걸 설명했다. 캐나다나, 일본 여권을 들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야동을 찍어서 올린다? 법망도 피하고, 사람들이 더 흥분할거야. 교포가 나오는 영상 좋아하더라. 자기소개 멘트는 뭐가 좋을까?
"강민 오빠가 절 능욕하는 걸 다른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네요. 잘 부탁드려요! 이런 건 어때요?"
잘 하는데. 예림은 신나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완전히 다른 인격이 하나 생기는 기분이에요! 신기하다!"
"뭐, 영화 동아리에서 말하길 영상 안에서의 나는 다른 인격체라고 하더라. 포르노에도 적용되는 거지. 예림이 너도 폰허브에서 새로운 페르소나를 하나 갖게 되는 거야."
"아, 페르소나? 가면? 그거 라틴어 아니예요?"
"엥? 네가 라틴어를 어떻게 알아?"
의외로 박학다식한데? 게이트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주나?
"옛날에 악마 소환할 때는 다 라틴어 썼어요."
이야기를 하며 예림은 가슴 앞에서 손을 꽉 쥐고, 뮤지컬 배우처럼 하늘을 바라봤다.
"아, 왜 이렇게 기대되지? 사람들이 내 영상 많이 봐 줬으면 좋겠다!"
"화장법도 좀 바꾸자. 그러면 진짜 예림이한테 피해는 안 갈거야."
내 입에서 진짜 예림이란 단어가 나오는 게 싫은지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음, 가급적 자제해야겠군.
그 단어는 말하지 않고, 진짜 예림이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막을 장치들을 꼽아봤다.
"국적 변경이랑 자기소개 하는 거, 화장법, 타투... 그러고 보니 영상용 이름도 하나 만들긴 해야겠다."
"좋아요!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하죠."
그리고 카메라 문제도 해결되면 좋겠는데. 카메라 하나로는 너무 부족했다.
"아카식 스트림에, 360도 녹화되는 그런 기능은 없나? 그게 있으면 영상 만들때 진짜 영화처럼 만들 수 있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폰허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 대부분은... 조잡하다. 스토리도, 촬영도! 서큐버스의 도움이 있다면 정말 흥분되는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마력 모아서 날 잡고 찾아보죠! 아, 너무 설레요! 돈도 돈이지만, 마력! 지금도 마력이 많은데. 영상이 올라가면! 저 진짜 마계 왕 되는 거 아니예요? 게이트도 막막 열어대고! 언니도 부르고!"
아, 마력. 그건 검증을 해 봐야 하는데. 일단 마력이 올라가는지 실험하는 게 좋아 보였다. 마력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허탕이라면 억울하니까.
"다른 사람이 영상을 보고 자위했을 때, 마력이 올라가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는데. 누구한테 부탁하지?"
"그러게요..."
이야기를 하던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이거 해 줄 사람이 한 명 있지 않나?
""영선누나 언니 한테 부탁할까 요 ?""
우리 둘의 입에서 동시에 한 명의 이름이 나왔다.
...근데... 어떻게 플레이를 유도하지?
우리 둘은 머리를 감싸안고 고민을 시작했다. 그냥 대놓고 영상 보면서 자위해달라고 해? 아니면 더 흥분되는 상황을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몰아가?
"저, 영선 언니는 변태니까. 어떤 플레이를 내걸어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러다 나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결국 영선누나랑 섹스하는 건 나잖아! 중간에 초크로 사망하긴 싫다고! 재밌는 거 보여주겠다고 해놓고는, 같은 타임 알바생 3초만에 목졸라서 기절시켰다고!
우리 둘은 밤 늦게까지 토론을 계속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두 번의 격렬한 섹스 후 찾아오는 피로감은 영상을 찍는 기대감으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 둘은 슈퍼싱글 침대에 머리를 뉘였다.
"강민 오빠아... 잘 자요오..."
그러며 내 품에 안겨온다. 응, 예림이 너도, 잘 자...
***
누가 오전의 영선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선은 강민이 갔던 에메필 매장 앞을 서성거렸다. 이곳이 목적지가 아닌 듯 저 너머의 김밥집까지 갔다, 다시 되돌아와 편의점 앞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매장 앞을 지나가길 수 차례.
'아니, 그냥 들어가서 사면 되잖아! 겨우 속옷인데! 뭘 그렇게 망설여!'
영선은 너무나 떨렸다. 어제부터 계속.
사실 마음같아서는 강민에게 어제 저녁에 연락해서, 예비군 나오자마자 만나려고 했다. 직전에 포기했다. 도저히 집으로 오라고 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알바할 때 얼굴 볼 텐데. 그때 말하고 집에 데려가지.
하지만 오늘 아침이 되자, 자신의 속옷에 신경이 쓰였다. 예림이랑 섹파 사이인데, 예림이 속옷은 엄청 야했지... 내 밋밋한 속옷 보고 깨는 거 아냐?
매장 앞에 서고서야 자각했다. 연하 남자애 집에 데려오면서 속옷까지 고민하고 사는 거... 이거 완전 변태같은 사람 아닐까?
'에에잇, 모르겠다!'
영선은 이성과 본능 사이에 고민하다 머리를 털었다. 본능이 이성을 이겼다. 망설이면 아무것도 안 돼! 주먹부터 뻗어야 한다고!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게 있으실까요?"
"어, 그러니까... 좀. 그. 남자친구 보여줄만한 속옷을."
말해놓고는 귀까지 빨개진다. 아니, 좀 돌려서 말해도 됐는데. 너무 긴장하다 보니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알바생은 웃음을 참으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75,C컵이요."
"그 정도면 디자인 예쁜 건 다 있어요! 한번 보실래요?"
영선은 프릴, 레이스, 꽃무늬, 새턴, 실크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둘러봤다. 매일 스포츠브라, 운동용, 면 사이에서 골랐던 자신은 모르는 세계였다.
페미닌 리본? 가터벨트? 듣도보도 못한 것이 영선의 눈을 잡아끌었다. 이건 어디서 본 기억이 있었다. 오빠의 야동중에, 팬티는 없이 가터벨트와 흰색 스타킹만 입고... 영선은 침을 꿀꺽 삼키며 속옷을 집어들었다. 다행히 팬티까진 있다.
"저, 원래 이거 막, 레이스 사이에 천같은게 없이 피부가 보이나요? 디자인 잘못 나온 거 아니예요?"
그러자 점원이 웃었다. 손님, 원래 이런 거예요. 남자친구분들이 좋아하시거든요.
"아, 이거. 후기 보면 남자친구분들이 되게 좋아하셨다고. 피부가 매력적으로 까무잡잡하신데. 흰색으로 입으시면 좋아하실 걸요?"
최근에 50km 로드웤 때문에 좀 더 탔다. 영선은 고민하며 속옷을 집어들었다. 어떻게 하지... 진짜 이거 사도 괜찮은 걸까?
***
"예림아, 나 갔다올게. 저녁 챙겨먹구."
"네에~ 오빠, 다녀오세요!"
"이따 영선누나 집에 가서 연락할 테니까. 마력 느는지 보고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보니 같이 데리고 나가는 게 좋을지도. 무슨 상황이 있을 지 모르니까...
"아니다. 같이 가서 근처 카페에서 기다릴래?"
그러자 예림이는 기뻐 보였다. 후다닥 집 안으로 달려가 배꼽이 보이는 딱 붙는 티셔츠, 돌핀팬츠를 입고 나왔다.
"영선 언니가 준 옷, 다 좋은데... 가슴이 너무 부각되네요. 이러고 나가면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흰색 티셔츠 아래로 민트색 브래지어가 전부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네! 아무래도 영선 언니에 비해서 예림이 가슴이 많이 크니까, 어쩔 수 없지. 남들이 쳐다본다고 뭐 어때. 어짜피 내 서큐버스인걸.
그리고 현관에서 입술에 가볍게 뽀뽀. 음, 이러고 있으니 동거하는 커플같다. 웃음이 났다.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동안 예림이 한숨을 쉬었다.
"근데 이렇게 따라가 봐도,결국엔오빠랑 영선 언니가 섹스하는거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니, 꼭 섹스한다고 단정할 순 없잖아..."
"거짓말, 할 생각 만만이면서. 애초에 영선 언니한테 영상 보면서 자위 부탁하고 섹스는 안 하면 맞아 죽을걸요."
그건 맞지...
"어떻게 부탁할지는 생각해 봤어요?"
"그것도 아직...뭐 어떻게든 되겠지."
예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요. 다치지 말고. 전 스벅 가있을게요."
벌써 피씨방 앞이다. 올라가면 누나가 있겠지.
"강, 강민이 왔어?"
영선 누나다. 근데 영선누나가 아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영선 누나는 저런 옷 절대 안 입는데?
위로는 어깨를 살짝 덮고, 아래로는 무릎 위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골지 원피스. 그 아래로 뻗어나온 흰색 스타킹. 검정색 단화. 나는 그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항상 크롭티, 스포츠브라에 레깅스만 입고 오던 운동부 영선누나가. 이런 여성스러운 옷이라니.
특히 허리 라인이 장난이 아니다. 어깨가 넓으니 허리가 잘록해 보이고, 운동으로 단련된 엉덩이까지 가세하며 길쭉길쭉한 몸매를 드러냈다.
이 누나, 진짜 오늘 나 잡아먹으려고 날 잡았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