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6. 암수를 겨뤄보자!
* * *
"영선 언니, 안녕하세요!"
"응, 어, 안녕."
영선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토요일 꿈에서 쟤가 나한테 뽀뽀를... 되게 잘 하던데... 여자끼리 뽀뽀하는 게 익숙한가. 아니야, 그건 꿈에서였잖아!
"옷 받으러 온 거 맞지?"
꿈에서 한 키스란 걸 알아도 얼굴이 붉어진다. 자신에게 고백하던 여자애의 마음을 전혀 몰랐는데 예림 정도의 여자라면 키스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생각하다간 이상한 문이 열릴 것 같아서 눈을 내리깔고 쇼핑백에 예쁘게 정리해놓은 속옷을 건네줬다.
강민이 이놈... 월요일에 받으러 온다는 게 예림이라면 말을 할 것이지.
옷을 건네주고 절망에 빠져 멍하니 서 있는데, 예림이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망설였다.
"저, 영선언니. 말씀드릴 게 있는데."
뭐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지?
"그래? 알았어. 호준오빠. 잠깐 카운터좀 봐줘요. 이야기좀 하고 올게요."
".....어? 응!"
눈을 가자미처럼 돌려 예림의 가슴을 훔쳐보던 호준은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한심하긴... 좀 다른 사람들이 눈치나 못 채게 보던가.
영선과 예림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영선은 전자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이마를 찌푸렸다. 운동 시즌에는 끊었었는데, 최근 강민과 얽히고 나서는 니코틴이 너무 땡겼다. 도움 안 되는 놈 같으니.
"그래서, 무슨 일 있어? 언니가 도와줄 일이라도?"
그러자 예림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저, 언니. 강민오빠가 저 사촌동생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때 영선의 마음속에 묻어둔 질문이 생각났다.
"아, 맞아. 나도 물어볼 거 있어. 너 우리집에서 잘 때 속옷은 왜 벗은 거야? 강민이는 네가 잘 때 속옷까지 벗고 잔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레깅스를 입었다는 게 말이 안 되거든."
예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영선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역시 여기선 둘러댈 수가 없다. 솔직하게 말하고, 바라는 바를 밝히는 수밖에.
"사실은 사촌동생이 아니고, 여자친구 비슷한 거거든요."
여자친구면 여자친구지. 여자친구 비슷한 건 뭐야? 영선은 혼란스러워하며 예림을 바라봤다.
"말하자면... 섹스 파트너라고 해야 할까..."
뭐? 섹스 파트너? 강민이 이놈 자식, 섹파를 친척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 생각보다 과감한 놈이었다. 돌아오면 두고보자, 다짐하며 이유나 물어봤다.
"왜 친척동생이라고 거짓말했대?"
"저한테 주신 옷... 안 주실까봐."
아이고, 한심하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맞았다. 섹파한테 줄 옷이라고 하면 누가 주겠어.
"가출한 건 맞고?"
"그건 맞아요."
정확히는 가출보다는 밀입국에 가깝지만 그게 그거였다. 영선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이것까지 거짓말이었으면 섹파로 지내자는 제안을 고려해 봤겠지만 가출이라니 뭐. 이해해 주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자친구도 아니라니 잘 됐다. 나도 하고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예림아, 하고싶은 말은 그게 다야?"
"...네..."
영선이 강민에게 정이 떨어졌길 바라며 대답했지만, 영선은 강민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할게. 네가 섹스 파트너든 뭐든 신경 안 써. 나도 강민이랑 섹스하고 싶어. 걔 예비군 간거 돌아오면 집으로 끌어들여서 잘 거야. 너한테 미안해지지 않게 미리 말하는 거거든?"
영선은 살아 움직이는 불도저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건 주먹으로 다 꿰뚫고 지나갈 사람이다.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죽이고, 부처가 있으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이 있으면 아라한을 죽여라! 예림이 진짜 여자친구라면 좀 더 생각해 봤겠지만. 그냥 섹스 파트너라는 걸 안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예림은 발을 동동 굴렀다. 영선의 눈은 진심이다... 강민 오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미 영선은 마음을 굳힌 듯 했다.
"그리고, 강민이가 예림이 너보고 사촌동생이라고 했는데, 거짓말 한 거 보면 나한테 마음이 아예 없진 않은 것 같은데. 맞아?"
예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언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최대한 강민의 단점을 부각해 봤다.
"강민 오빠, 언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변태인데..."
"괜찮아. 나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변태야."
영선은 싱긋 웃으며 인정했다. 최근 두번의 꿈으로 인해 브레이크는 이미 부서졌다. 지금은 강민이 제안하는 어떤 변태적인 플레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마음속은 색(色)의 불길로 타오르는 중이었다.
'아, 그냥 꿈 연결해주지 말걸. 괜히 공짜 마력 벌어보려다 이게 무슨 덤터기야...'
예림은 울상을 지었다. 이제 자기가 쓸 수 있는 패가 거의 없었다. 강민오빠와 영선이 섹스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목욕탕 안에선 받아들여 보려고 했지만, 나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만 너무 손해보는 이야기였다.이건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림은 폰을 꺼냈다.
"강민 오빠가, 동영상도 찍고 그러거든요. 나중에 인터넷에 올릴 거라고 그러면서..."
강민을 뺏길까봐 걱정되서 울먹거렸지만, 울먹거림을 잘못 이해한 영선이 거칠게 담배를 씹었다. 눈 안쪽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호랑이같은 으르렁거림이었다.
"강민이가 억지로 그랬어? 동영상 찍는 거, 너도 동의한 거야?"
어라, 동의한 적 없다고 하면 강민 오빠가 찢겨져서 죽을 것 같은데. 그만큼 영선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예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도 이런 거 좋아해서. 의외로 흥분되거든요."
"그럼 됐어."
영선이 꽁초를 휙 던져버렸다. 아까같은 격렬한 분노는 온데간데 없었다. 자기끼리 좋아서 한다는데. 뭐 어때.
그리고 영선은 생각에 빠졌다. 영상 촬영이라. 생각해 본 적 없는 건데. 내가 헐떡거리는 걸 다른 사람이 본다라.
흥분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나쁜 것 같기도 하고. 이건 잘 모르겠네. 영선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민이 섹스장면을 찍고 싶어한다고? 생각보다 변태적이네? 페티시 없다고 해 놓고선.
'오, 이건 좀 효과가 있었을 지도!'
예림은 속으로 환호했다. 강민이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그런 말을 한 적도, 위협도 없지만)은 영선을 주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예림이 읽은 영선의 기억엔 하드코어한 욕망은 있었지만 인터넷에 전시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저, 혹시 좀 꺼려지시나요?"
"아, 너 내 생각해주는 게 아니라 독점욕이 강한 거구나? 강민이 포기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흠 잡는 거지?"
정곡을 푹 찔린 예림이 고개를 숙였다. 영선이 웃으며 예림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 요 녀석. 귀여운 구석이 있네. 하긴, 강민은 영상을 멋대로 올릴 녀석같진 않았다. 갈수록 강민이 마음에 들었다. 예림이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 독점하고 싶을 정도면 꽤 괜찮은 매물일 터였다. 대물이고, 성실하기도 하고.
"영상 촬영이라. 내가 찍기 싫다고 하면 강민이가 찍을 수 있을 것 같니?"
예림은 영선의 삼각근을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억 속의 영선은 건장한 성인 남성도 마늘 다지듯 박살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민도 아마 3초 안에 정리될 것이다.
"난 내가 하고 싶으면 할 거고, 싫으면 안 할 거야. 그리고 너도 영상 찍거나, 올라가는 거 싫으면 싫다고 말해. 괜히 신세 망치지 말고. 이건 강민이랑 제대로 이야기해야겠네."
영선은 이마를 찌푸렸다. 영상 촬영이라. 자기 친구들 중에서도 이 문제때문에 다투고 헤어진 애도 있고, 같이 이불 덮고 있는 사진을 남친이 뿌려서 학교를 휴학한 케이스도 있다.
사진만으로도 이 모양인데 영상이라면... 그리고 자기가 유출하지 않는다고 해도 디지털 클라우드가 털리거나, 핸드폰 수리기사가 빼돌리는 케이스도 있다. 너무 위험하다.
"괜찮아요. 전 좋아서..."
"그래?"
'위험할 것 같은데... 하지만, 캠코더라던가. 인터넷 안 쓸 단말이라면... 한번쯤 찍어볼지도...'
같이 섹스하는 영상을 남겨놓은 다음, 다음 번 섹스때 그걸 감상하면서 강민과 뒹구는 거라면. 위험성만 없다면 의외로 괜찮을 것 같았다. 만약 인터넷에 올린다고 해도 알아볼 수 없게만 한다면... 그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어디 있겠어.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스릴이라. 갑자기 입 안에서 짜릿한 감각이 흘렀다. 침이 꿀꺽 삼켜진다.
영선이 상상하는 동안 예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완패였다. 아무래도 영선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볼에 부드러운 감각이 닿았다.
예림이 깜짝 놀라 볼을 감싸고 영선을 봤다. 영선의 얼굴은 빨갰다.
"음... 이게 예지몽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어, 그, 뭐냐. 침대에서 같이 볼 일도 있을 것 같거든. 여튼, 너랑은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영선은 자신과 연거푸 키스하던 예림이를 떠올렸다. 강민이랑 같이 한 꿈 속에서의 플레이는 정말 흥분됐으니까. 만약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할 수 있다면... 남자가 둘 있는 3P가 아니라 여자가 둘 있는 3P는 굉장히 흥분됐었다. 달아오르는 볼에 손을 대고, 황급히 카운터로 내려왔다.
'여튼, 강민이 이놈, 돌아오기만 해... 아니, 섹파까지 두고, 촬영까지 하면서. 나한테는 페티시가 없다고? 두고 봐. 이번엔 내가 온갖 거 다 해줄테니까...'
꿈에 나왔던 플레이들도 해주면, 좋아할까? 막 싫다고 몸부림치면서도. 그리고... 엉덩이로 하다가, 정말 내 보지를 티슈 쓰듯 써 준다면...
"아..."
내려오던 영선은 떨려오는 아랫도리에 손을 대며 몸을 숙였다. 너무나 흥분됐다. 제발, 빨리 강민이가 돌아오도록 해줘... 미쳐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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