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1. 예림이 진짜 1등 신붓감 아니냐?
* * *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전등과 오리털 이불을 보고 감탄하는 애가 휴대폰을 사달라고 한다고?
"아니, 휴대폰이란 게 뭔지는 알아?"
"사실은, 너무 신기해서 아까 아카식 레코드에서 휴대폰 관련 지식을 샀거든요. 휴대폰은 그러니까...일종의 보급형 아티팩트인 거죠? 인간계 사람들은 좋겠어요!"
그래서 마나가 없어서, 아카식 레코드 접속이 팍 끊어진 거였구만! 정말 대책 없는 서큐버스일세!
하지만 처음 보면 신기한 물건이긴 했다. 번쩍거리며 빛나는 화면, 멀리 있는 사람과 통화, 문자 전송, 지식 검색 등. 휴대폰 작동법을 일일이 가르칠 순 없으니 어찌 보면 잘 샀다 싶었다. 휴대폰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쓸모있는 지식은 좀 있었고?"
"천지인 자판을 쓸 줄 알게 됐어요!"
거 참 쓸데있는 지식이구만!
세탁기에서 건조 종료의 알림이 울렸다. 바싹 마른 속옷을 예림이한테 주자 옷을 벗고 속옷을 입는다.
언제 봐도 참 예쁜 가슴이다. 아까 미동조차 없던 아랫도리에 서서히 피가 올라올 것 같다. 안돼! 여기서 서면 한번 더 해야할 지도 모른다고!
다행히 내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예림이는 내가 사온 속옷과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들고 고민하다 레이스 끈 속옷을 택했다. 하긴, 위아래 속옷이 안 맞는 건 좀 그렇지. 솜씨 좋게 끈을 여미고 청바지와 검정 민소매 터틀넥까지 입은 예림이 싱긋 웃었다.
와, 진짜 연예인 같다...
"갈까요, 오빠?"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가야지. 휴대폰 매장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예림은 어디서 난 지 모를 하이힐을 꺼내 신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내 손을 잡는다. 어우, 떨려!
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특히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질 정도다. 커플 중 남자쪽이 예림의 가슴, 청바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정말 예림이가 내 여친이란 말이야? 나는 감동에 겨워 손깍지를 좀 더 세게 잡았다. 예림이 내 쪽을 쳐다보며 웃었다.
"오빠, 그렇게 좋아요?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그렇지 뭐. 예림이가 내 여친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네."
예림이 미소지으며 팔을 꼬아 내 팔뚝을 가슴에 붙였다. 꾸욱거리는 압력이 느껴진다. 엄청 부드러웠다. 길 가운데서 설 것 같군. 다행히 그런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대리점에 도착했다.
"어서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기종이 있을까요?"
"아이폰 12 pro 로즈골드 앤 화이트. 512gb 모델 찾고 있는데요."
예림이 거침없이 말했다. 엑, 휴대폰 관련 정보를 산 게 이것때문이었나? 나보다 더 잘 알잖아?
아이폰 12 pro면 출고가가 얼마였지? 나는 당황해 판매대의 가격표를 봤다. 200만원. 통장 잔고보다 비쌌다.
기껏해야 선불폰이나 버스폰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점장이 옳다꾸나 하고 직접 박스를 들고 나왔다. 그러면서도 눈은 예림의 가슴과 겨드랑이를 흘끔거린다. 닳겠다, 이 자식아!
"이 모델 많이 찾으시죠. 진짜 이뻐요. 한번 보시겠어요? 48개월 요금제로 쓰시면 할인도 꽤 들어가고."
예림이 날 보며 물었다.
"오빠, 이 모델로 괜찮아요?"
어, 그렇지. 내가 사 줘야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가오 상하게 갤럭시 50같은거 고르겠냐!
"오, 남자친구 분이 선물해 주시는 건가요?"
점장의 눈이 번들거리며 이쪽을 쳐다본다. 질투와 부러움이 가득 담겼다. 내가 뼛속까지 털리는 호구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럼 계약 이쪽에서 도와드릴 텐데요."
"잠깐만요. 근데 제가 알기로는 오늘 보조금 특가로 85만원까지 풀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예림이 치고 들어왔다. 예림이 손이 어느새 계산기를 켜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보조금 85만원 빼고, 약정 기간 48개월 하고. 반납 조건 걸어도 점장 권한으로 취소 가능하죠? 거기서 25만원 더 빠지고. 부가서비스 3개월 유지에 신규가입 할인까지 들어가면..."
한참 계산을 하자 예림이 사고 싶다고 했단 아이폰 프로의 가격은 내 남은 할부원금보다 내려가 있었다. 점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손님.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오빠, 한번만 해 주시면 안돼요?"
예림이 입술을 뾰로통 내밀고 점장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점장의 목울대가 꿀꺽 내려갔다 올라왔다. 아마 마음이 북극 빙하마냥 녹아내렸을 걸. 점장이 난처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아, 진짜. 어디 가서 제가 이거 해드렸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하."
"그럼 개통 부탁드려요!"
나는 예림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천지인 자판보다 훨씬 쓸모있는 정보잖아! 예림에게 감탄하며 걱정되는 점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민증은 있어?"
"여기요."
청바지 주머니에서 민증을 내민다. 깔끔하게 정리된 증명사진, 생년월일. 대한민국 국민 이예림. 하지만 생년월일은 예림이와 달랐다. 샤를은 2001년생 10월달, 예림이는 2000년생 5월달. 예림이가 한 살 많다.
"게이트에서 주민등록까지 같이 해 주더라고요."
나는 홀린 듯 민증을 들고 카운터로 가 내밀었다. 홀로그램도, 직인도 완벽했다. 마법이란 건 정말 오묘하군...
"네, 개통 끝났습니다. 해피콜 오늘 내로 갈 거구요. 전화번호는 010xxxxxxxx입니다."
점장이 내민 폰에는 액정보호필름까지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제기랄, 내가 옛날에 가입했을 땐 액정보호필름도 추가금 받으려고 했던 덴데,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
나는 투덜거리며 예림의 손을 붙잡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예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엉? 왜?"
"폰 줘봐요."
폰을 넘겨받더니,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누른다. 이예림♥란 이름으로 저장해 돌려준다. 폰에 예림의 이름 두 개가 나란히 떴다.
그 중 하나에는 하트가 붙어있다. 하트. 꽉 찬 하트다. 흠. 음. 오. 호오.
"오빠도 번호 불러주세요."
어, 그렇지. 번호를 말해주자 예림도 자판을 톡톡 두드린다. 예림이같은 미녀가 아이폰을 들고 있으니 그림이 사는구만. 저장을 마친 예림이 폰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 김강민♥ ]
"제 폰에 오빠 번호밖에 없네요? 히힛."
예림이 자랑스레 폰을 흔들며 미소지었다. 하하. 하트다. 음, 그래. 예림이가 내 이름에 하트를 붙여서 저장했네. 허허.
나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폰도 싸게 잘 사고, 웃는 것도 예쁘고. 내가 휴대폰 요금 좀 내주는 게 뭐 대수냐? 내 이름에 하트가 붙어서 폰에 저장되어 있다고! 그것도 유일한 남자로!
펄쩍펄쩍 뛰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예림이 내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휴대폰 배경 사진으로 하게 사진 하나만 같이 찍어요!"
거절할 틈도 없이, 예림이 셀카를 키고 팔짱을 꼈다.
"자, 셋, 둘, 하나!"
엉거주춤 미소를 짓는데, 예림의 입술이 내 볼에 살짝 닿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찍힌다.
"아, 오빠 잘 나왔다. 사진이란 거, 진짜 신기하네요!"
나는 얼떨떨하게 볼에 손을 올렸다. 방금 이거 실환가? 우릴 구경하던 사람 몇 명은 혀를 끌끌 차며 '말세다, 말세야...'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갔지만 난 상관없었다. 오늘 세상이 끝난다고 해도 좋아! 예림이랑 밖에서 꽁냥거리면서 볼에 키스까지 했다고!!! 암 얼라이브! 암 뻐킹 얼라이브!!
"오빠, 화장품 사야 하는데 안내좀 해줘요. 오빠 취향은 마스카라 올린 거랑 립스틱 색깔 짙은 거잖아요."
예림은 어느 새 내 손을 붙잡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에뛰드로 예림을 안내했다. 화장품 가게 안의 물건을 본 예림의 눈이 활짝 열렸다.
"우와! 이게 다 화장품인 거예요?"
세상에. 마계의 공녀도 이런 화장품은 한 번도 못 써봤을 거예요. 세상에. 테스터? 이게 그러니까... 직접 시험해 봐도 돈 내라는 소리 안해요? 세상에.
그 짧은 말 사이에 세상에가 세 번이나 들어갔다. 엄청나게 놀란 듯 했다. 열심히 화장품을 뒤적거리던 예림은 파운데이션을 들어올리며 흐린 눈을 뜨고 쳐다봤다.
"여기도 납을 쓰려나..."
"납이라니. 그런 건 40년 전에 사용이 금지된지 오래란다."
1600년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있담! 납, 비소, 중금속같은 건 미백 효과가 있긴 하지만 피부 괴사, 중금속 중독을 야기한다. 옛날 사람들이 그걸로 많이 죽었지.
"마력이 없어서 미백 마법을 못 쓰는 날엔, 최후의 방법으로 납이 들어간 화장품을 쓰거든요.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 어쩌겠어요. 손님이 없으면 굶어 죽는 게 더 빠른데."
정말 마계란 곳은 최악이구나! 나는 몸서리를 쳤다. 예림이가 게이트에 뛰어든 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오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어느 새 예림은 자신의 차양처럼 드리운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올렸다. 살짝 펄이 들어가 있는 제품인지 예림의 눈썹 주위에서 별처럼 반짝거린다. 안 그래도 긴 속눈썹이 더욱더 짙고 예뻐보였다. 그리고 빨강색 립 테스터를 집어 발라보며 입술을 거울에 비춰본다.
음, 역시 화장하는 편이 훨씬 더 섹시하고 예쁘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예림이 옆으로 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따 오빠 일 끝나고 들어오자마자... 현관에서 마스카라 번져서 흘러내릴 때까지 딥쓰롯 해드릴게요. 립스틱도 다 뭉개질 때까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사달라는 화장품은 다 사줘야겠군.
"음, 그럼 오빠 알바 갔다올게."
예림에게 화장품 한 아름과 소고기 부리또, 그리고 체크카드까지 넘겨준 다음 손을 흔들었다. 예림도 인사했다.
"오빠, 그럼 집에 와서 봐요! 기대하고 있어도 괜찮으니까!"
집에 가면 예림이가 현관에서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는건가? 내 자지에 바로 봉사하기 위해서?
상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흘렀다. 좋아, 빨리 출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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