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8. 동거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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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아침의 정사가 끝나고 눕자 급격히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일단 통장 잔고는 180만원. 일주일 뒤가 월급날이라는 걸 생각하면 꽤 풍족한 상태지만, 갑자기 맨몸의 동거인이 나타나서 사야할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사는 사람이 두 명으로 늘어나면 전기세와 수도세도 무시할 수 없다.
마계의 집에 왔다갔다 했다면 모르겠지만 건너가는 게 불가능하다니 어쩔 수 없지. 표준계약서에 인간계에 체류할 권한만 얻는다고 했으니 집을 제공할 의무는 없겠지만, 우리 집에서 쫓아낼 순 없잖아.
알아서 살 곳을 찾으라고 한다면 뒤에 일어날 광경이 눈에 훤했다. 건대 입구 앞에서 가출 소녀마냥 앉아있다가, 누가 밥 사준다면 따라가서 모텔에서 하룻밤 지내고 그러겠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일단 같이 사는 걸로 하고. 예림이도 지금 배고프려나?
"예림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오트밀이라도 있으면 좋아요. 감자나 콩 수프같은 것도 좋고. 사실 뭐든 잘 먹어요! 마계에서는 서큐버스가 뭘 그렇게 먹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지만."
오트밀...? 예전에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어봤는데 골판지를 물에 불린 맛이었다. 게다가 뒤에 먹고 싶다는 두 가지도 완전 구황작물에 가까운 음식이다. 마계는 생각보다 척박한 곳인가?
일단 아침밥부터 좀 먹일 필요를 느꼈다. 냉장고 안에는 식빵, 계란이 좀 남아 있었다. 잼이랑 버터도 있네! 그렇다면 아침은 토스트다!
부엌에서 계란을 부치고 버터에 토스트를 굽자 예림이가 맛있는 냄새를 맡고 밖으로 나왔다.
알몸으로. 이런 젠장.
"예림아, 옷 입고 나와."
"네."
접시에 노릇노릇하게 익은 토스트를 올리고 잼을 바른다. 그 위에 계란! 코를 킁킁거리던 예림은 내가 들고온 음식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이거... 잼이에요? 계란이랑? 빵 하얀 거 봐! 이거 밀빵이죠! 오빠 진짜 어디 영주 아니에요?"
한 입을 베어문 예림은 다람쥐처럼 귀엽게 오물거렸다. 엄청 맛있는지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 한 입 크게 베어물려고 하다가도, 음식이 사라지는 게 아까운지 조금씩 갉아먹듯 밥을 먹는다. 나는 안쓰러워져서 계란 몇 개를 더 부치고 빵도 더 구웠다.
"더 먹어. 많이 해 줄게. 마계는 이런 게 없는 거야?"
"음... 사실 제가... 이런 사치품을 볼 일이 뭐가 있겠어요."
샤를이 뭔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지 주춤거렸다.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연다.
"오빠는 제가 하급 서큐버스여도 괜찮은 거에요?"
"하급이고 중급이고 그런 걸 신경쓸 사람이 어디 있어. 애초에 서큐버스라는 존재 자체가 드문데. 그리고 샤를 같은 미녀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걸."
예림이 배시시 웃었다. 카페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짓는 웃음처럼 상큼하다.
"인간계에서 만난 사람이 강민 오빠처럼 친절한 사람이라 얼마나 좋은 지 몰라요! 게다가 벌써 마력도 4에테나 모았고! 물론 인간의 몸이라 효율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4에테가 얼마나 되는 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사정을 4번 정도 했으니까 한 번당 1 에테가 모이는 건가?
"그...1에테가 어느 정도야? 그걸로 뭘 할 수 있어?"
그러자 샤를이 신이 났는지 신나게 설명을 시작했다.
"1 에테면 대략... 저 같은 하급 서큐버스가 한 달 정도 일하면 버는 마력이에요! 창관에서 임프 같은 하급 중의 하급 악마에게 꿈을 꾸게 해주거나. 고블린들에게 단순한 음몽을 보여주거나 하면서. 오크면 더 좋겠지만 오크같이 똑똑한 손님들은 다 선배, 아니면 중급 서큐버스들이 가져가거든요."
허, 오크가 똑똑한 축이라고? 마계란 곳은 참 이상한 곳이군. 샤를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나는 좀 더 물어봤다.
"오크가 똑똑해?"
"네. 오크 정도면 그나마 똑똑하죠. 꿈의 내용이 좀 더 욕망을 가지니까. 더 많은 욕망은 더 큰 마력을 생산해요. 물론 가장 좋은 건 직접 섹스하는 거지만... 임프나 오크랑 직접 섹스하는 건 좀... 그래요."
갈수록 흥미로워졌다. 그리고 나는 하루만에 4달치 마력을 벌게 해 준 건가. 하긴, 지구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한 달에 8만원을 버는 동남아 노동자가 한국으로 와서 야근, 특근을 거듭해 400만원. 4년을 벌어야 할 금액을 한 달에 벌게 해주는 것처럼.
샤를의 언니가 게이트만 보면 뛰어들라고 말한 게 괜한 말이 아니었구나! 근데 마력으론 뭘 하는 거지?
"음.. 새로운 마법을 배우거나. 더 상위 존재로 변하거나. 어제 오빠의 성기를 크게 만든 것처럼 마법을 사용할 때 쓰죠. 근데 보통은 가게에 팔아서 집세 내고. 밥 사먹고. 그러다 보면 0.1 에테만 겨우 남겨놓고 그래요."
정말 눈물 없이는 못 들을 이야기였다. 근데 아까 인간 몸이라 마력 효율이 떨어진다고 했지. 인간의 몸을 얻느라 20년간 얻은 마력을 거의 다 써버렸다고도 했고. 예림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몸은 단점밖에 없는 듯 했다.
"왜 서큐버스의 몸을 유지하진 않았어?"
"그러면 성당기사단에게 사냥당할지도 모른다구요. 뿔이라던가, 날개라던가 들켜서! 괜히 인간의 몸으로 내려온 게 아니예요."
아니 성당 기사단이라니! 그런 게 어디있어!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악마가 있으면 신도 있겠지? 기본적으로 무신론자지만 예림의 존재는 나의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음, 신, 혹은 신 비슷한 존재가 있을지도.
"게다가 저랑 같이 다니는 걸 들키면, 오빠도 악마 추종자로 찍혀서 같이 타죽을 걸요."
묘하게 현실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음, 하긴. 지금 예림이의 머리에 뿔이 있으면 좀 이상할지도. 아니 귀여울지도. 꼬리라던가 날개라던가... 근데 뭔가 좀 아쉬운데.
예림의 몸을 살피며 뭔가 좀 부족함을 느꼈다. 내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예림의 몸매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어제 예림이 벗어놓은 속옷은 세탁기에 돌렸다. 그럼 지금 예림이는 속옷을 안 입었단 건가? 티셔츠를 주의깊게 살피자 흰 티셔츠 아래로 톡 튀어나온 유두가 보였다.
"음, 예림아. 그러고 보니 속옷도 사야겠지?"
예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입었던 거랑 비슷한 걸로 살까?"
그러자 머뭇거린다.
"음, 저런 야한 속옷도 꼭 필요하긴 하지만. 평상시에 입고 다니기엔 좀 불편해서..."
제기랄, 여자들은 그런 건가? 평소엔 저런 속옷을 잘 안 입는구나! 내가 허둥거리자 예림이 킥킥 웃었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리고 제가 갑자기 오빠랑 살게 되가지고 그런 거지. 원래는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그런 건가? 안도감에 마음이 풀렸다. 섹스를 하지 않을 때의 예림이는 뭐랄까, 음. 정말로 동거를 하는 여자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럼 일단 옷을 사러 같이 외출을 해 볼까!
하지만 외출하기 전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청바지를 그대로 입고 나간다고 쳐도 속옷은 입어야지.
"속옷 사올게."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내려가 팬티, 브라 세트를 찾았다. AA, B, C, D... 어라? 이 다음으론 없어? 매대를 뒤지다 카운터의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브래지어 사이즈 65H는 없나요?"
알바생이 어이없어하며 나를 쳐다봤다.
"65H컵이요? 그런 건 여기서 안 팔죠."
"어, 저, 그럼 어디서 사야 할까요?"
그러자 여자 알바생이 위아래로 날 훑어봤다. 지금 내가 성희롱을 하려고 하는지 의심하는 눈초리다. 아니, 그래도 우리 한 3달은 봤는데 절 뭘로 보시고!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게 아니고, 음, 여자친구가 놀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세탁을 해 버려서..."
"아, 그렇다면. 글쎄요...에메필이나 빅시? 그런 매장에 가야 할 텐데. 근처에 없을 걸요."
"감사합니다."
팬티만 계산하고 문을 열고 나가는 데 유리창문에 여자 알바생이 비쳤다. 자신의 유니폼 앞섶을 쳐다보고 있는 걸로 보아 65H면 얼마나 될 지 생각하는 중인가보다. 음. 괜한 고민을 안겨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집에 다시 올라가 예림에게 브래지어가 없다고 말하자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어쩌지. 노브라로 민소매 터틀넥만 입고 매장에 가? 그것도 정말 이상한데...
"음, 그럼 오빠. 한번 아카식 스트림에 같이 접속해 볼래요? 여기서 잘 열리는지 확인도 해 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이 있는지도 찾아보고. 대신 접속하는 데 쓴 마력은 오늘 채워주기!"
아카식 스트림? 어제 게이트를 열 때 쓰는, 마법 도서관 같은 곳이라고 했지? 궁금증이 도졌다. 한 번 섹스했으면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할 만큼의 마력은 된다는 거니까, 한 번만 섹스하면 되겠지.
"좋아,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좋아요. 손 잡아요."
희고 가느다란 손이 부드럽게 깍지를 꼈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섹스도 했는데, 이런 손 잡는 것만으로 가슴이 뛸 줄이야...
"접속할게요."
순간, 눈 앞이 깜깜해졌다. 수없이 많은 행성들을 지나고, 불타는 오로라를 넘어 껌껌한 어둠 속을 난다.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에서 에인션트 원이 베네딕트 컴버비치를 의자에 앉혀 놓고 정신을 분리해버렸을 때처럼. 수없이 비치는 거울 속을 지나고 빙글빙글 도는 블랙홀을 지나며 내 몸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길게, 길게 늘어나다가. 차가웠다 뜨거웠다. 별들의 심장 속을 유영하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별들의 은하수를 지나
끝없이 펼쳐진 도서관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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