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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8화 (8/358)

〈 8화 〉 7. 잠깐, 샤를을 만난게 전부 꿈이라고?

* * *

...빠, ...요! ....려요!

멀리서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오빠, 뭐해요! ...차려요!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있다가 잠든 듯 했다. 주방의 메뉴판에는 20개가 넘는 주문이 밀려있었다. 곧 홀에서 울상이 된 예림이가 들어왔다.

"강민오빠! 아까부터 주문이 안나왔는데 자고 있던 거였어요?"

"아냐!"

입가를 훔치며 일어섰다. 뭐지? 언제 잠이 든 거지? 방금 전까지 엄청 야하고 기분좋은 꿈을 꾸고 있던 것 같은데.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닦으며 쌓여있는 주문을 봤다. 딸기라떼, 오곡크런치, 미숫가루, 오레오프라프치노. 더럽게 손 많이 가는 것들이네!

쌓여 있는 주문에 허둥거리자 예림이 주방으로 들어와 거들었다. 딸기 시럽을 컵에 짜주고 빻아놓은 오레오를 믹서기에 넣고 돌리며, 주문이 완료된 건 바로바로 들고 나간다.

"오빠 무슨 피곤한 일 있어요?"

주문이 얼추 마무리되자 예림이 내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저었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같이 알바하던 사람은 예림이가 아니라 영선 누나였던 것 같은데.

잠깐, 같이 알바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하지만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내가 같이 알바하는 사람은 예림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정신을 못차리는 나에게 예림이 다가왔다.

"오빠, 그냥 오늘 조퇴할래요? 오늘 좀 이상해 보여요."

눈을 마주치며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을 잰다. 아오, 예림이 얘는 진짜 아무 사심없이 이렇게 훅훅 스킨십을 해서 문제야! 좀 고쳐보라고 말을 해도 버릇이라 잘 안 되네요. 이러며 쑥쓰럽게 머리를 긁는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 이런 행동을 하니까 착각을 하지!

"그래,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그러자 갑자기 예림이 삐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지?

"오빠는 제 대답이 별로 안 궁금한가보네요."

대답? 무슨 대답?

"오빠가 저번에 저한테 고백했잖아요...오늘 저녁에 대답해 준다고 했는데. 기억 안나요?"

"뭐? 아냐아냐! 기억하지! 아 나 완전 멀쩡하다. 열 없다. 피곤하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옆의 컵에 담긴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아주 건강하단 어필을 했다. 맞다. 내 고백에 대답해 준다고 했지! 깜빡할 뻔 했네!

예림이가 다시 카운터로 나갔다. 주방에서 몰래 내 볼을 꼬집어 봤다.

아프잖아! 젠장! 뭐지? 분명히... 뭔가 엄청난 꿈을 꾼 것 같은데. 예림이의 알몸이 나오는. 예림이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엄청 야한 꿈을 꿨는데."

알쏭달쏭한 기억을 밀어놓고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카운터의 예림이를 볼 때마다 뭔가 야한 기분이 든다. 이상하게 자꾸 가느다란 허리, 청바지에 감싸진 풍만한 엉덩이 라인, 민소매 터틀넥 옷 아래 가려진 G컵 가슴까지 자꾸 쳐다보게 된다.

청바지 아래에는 웬지 손바닥보다 작은, 엄청나게 야한 검은색 슬립 레이스 속옷을 입고 있을 것 같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머리를 흔들어대며 알바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오빠! 이제 가죠!"

알바가 끝나자 예림이가 포니테일로 묶었던 머리끈을 풀어내며 발랄하게 인사했다.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촤악 내려왔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저으며 예림을 따라갔다.

어둑어둑한 골목길.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로변으로 나가려면 이 골목길을 한참 지나가야 했다. 예림이는 너무 무섭다고 항상 나한테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 너무 길고 어둡다고.

하지만 예림이를 좋아할 때는 이 골목길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그냥 이 길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지금도 벌써 절반이나 와버렸다. 예림의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길의 중간에는 유일한 가로등이 있다. 알바는 다 좋은데 손님이 너무 많아요­ 오빠는 왜 오늘 잠든 거예요? 진짜 피곤해요? 같은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다가 가로등을 지나치자 말이 뚝 끊겼다. 가로등의 불빛과 어둠 사이에 선 예림의 얼굴이 새빨겠다.

모든 게 멈춘듯한 시간이 지나고, 예림이 손을 뻗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순간 심장이 터질 정도로 강렬하게 뛰었다. 귀끝까지 빨개진 게 느껴졌다.

"저... 오빠가 고백했던 이후로 계속 생각해 봤거든요. 근데 오빠 진짜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서 한번 믿어보고 싶었어요."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그럼.

"남자친구는 처음 사귀어 보는 거거든요. 잘 부탁드려요 오빠."

예림이가! 내 여친이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펄쩍펄쩍 뛰며 오도방정을 떨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얼굴 표정까지 참을 수는 없었나보다. 내 표정을 본 예림이가 부끄러운듯 팔짱을 껴왔다.

"그렇게 좋아요?"

"좋지! 그리고... 어제 엄청 무서운 악몽을 꿨거든. 예림이가 나를 거절하고, 음... 주변 사람이 예림이가 처녀가 아니라는 등...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너무 진짜같은 꿈이라서 착각하고 있나봐."

그러자 예림이가 발을 멈췄다.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진다. 뭐지.

"오빠, 그거 꿈 아닌데."

예림이가 정말 악마같이 사악하고,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패닉에 빠져 주변을 둘러봤다. 볼을 꼬집어 봤다. 아팠다. 바닥은 아스팔트로, 발로 비벼보니 까슬까슬하다. 예림의 팔을 붙잡자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게 다 꿈이라고?

"어떻게 이런 진짜 같은­"

"꿈은 서큐버스의 영역이니까요."

예림이 싱긋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갑자기 가로등 불빛이 꺼지고 발 아래 땅이 갈라진다. 그대로 저 아래로 추락했다. 땅이 갈라지고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지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샤를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는지 이불이 꿈틀거린다. 이미 아랫도리를 벗겨내고 이곳저곳에 키스하며 나한테 말을 건다.

"왜 자꾸 예림이 생각을 해요. 꿈에 예림이밖에 없네. 게다가 바라는 게 진짜로 손 잡고, 포옹하고, 정류장 데려다 주고? 요새 초딩들도 그것보단 더 나가겠다."

"그럼...예림이가 내 고백을 받아준 부분부터 전부 꿈이야? 어쩜 이렇게 잔혹한 현실이 있단 말이냐? 이러면 안돼! 이러면 사람이 미쳐버린다고!"

샤를은 투덜거리면서도 내 허벅지에 열심히 키스했다. 그러면서도 예림이를 열심히 폄하한다.

"예림이가 청순하게 구는 거야말로 악몽이라니까요? 완전 걸레같은 여자애인데 속아서 헤벌레하긴."

예림이 고백을 받아주는 꿈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샤를은 끊임없이 내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그러니까 호구 소리를 듣지. 그러다 남이 먹다 남긴 잔반을 설거지하는 꼴이 된다니까요? 예림이 이미 임신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강민오빠한테 안전한 날이라고 질싸해도 된다고 해놓고는, 나중에 오빠한테 엉엉 울면서 오빠 아이를 밴 것 같다고 거짓말하면 오빠같은 마음 약한 호구는..."

"그마아아안­­­­­­!"

마음이 아파서 죽을 수도 있겠다! 샤를은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니까 그런 여자는 잊어버리고 저랑 놀자니까요. 예림이랑 사귀면 세상 얌전한 여자인 척 하면서 손도 못 대게 할 걸요. 거짓말쟁이 걸레보다는 제가 좋지 않아요? 저 꿈속에서만 잤지, 진짜 남자랑은 처음 자 보는 처년데. 오빠가 제 첫 남자란 말이예요."

지금은 별로 안 하고 싶거든! 극도의 정신공격을 당한 내 머릿속은 피폐해졌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꿈 속에선 내가 원하는 예림이를 만들어 낸 거야?

"거미가 집을 짓는 법을 배워야 집을 짓나요? 태어날 때부터 그럴 수 있었는데. 어떻게 하냐는 건 묻지 마요. 꿈 속은 서큐버스의 영역이라서, 뭐든 읽어내고 뭐든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니, 그럴 거면 뭐하러 나랑 현실에서 섹스해! 꿈 속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안 돼?"

하지만 샤를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요. 꿈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마력은 10%도 안 돼요. 하루에 꿀 수 있는 야한 꿈도 한계가 있고. 직접 섹스하면 열 배는 많은 마력을 얻을 수 있는데 뭐하러 그래요?"

나는 축 쳐졌다. 아무래도 샤를은 내가 원하는 꿈 속의 섹스는 영 귀찮은가보다. 아니, 원하는 걸 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꿈은 왜 꾸게 한 건데?"

"오빠 취향을 알아보려고요. 근데 하나도 도움 안되네. 성적인 서비스엔 자신이 있는데, 순진한 척 하는 연기는 통 못하겠어요."

샤를은 한숨을 푹 쉬고 내 옆으로 몸을 던졌다. 침대 스프링이 잠깐 샤를을 밀어내다가 멈췄다. 예림이 옆에 누워 날 빤히 바라본다.

"그래서 오빠는 제가 싫어졌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눈에 슬픈 기색을 담고 말하는 건 완전히 예림이와 똑같다. 말을 우물거리며 예림이의 나신을 살폈다.

"오빠가 저 안 싫어한다는 거 알아요. 계약서가 뜨거워지지 않았으니까. 순애적인 것도 변태적인 것도 즐기고 싶죠?"

순애적인 건 앞으로 노력해 볼 테니까, 일단은 변태적인 것 먼저 할래요? 예림이 딱 붙어 내 목덜미에 키스하며 물었다.

제기랄, 이걸 어떻게 참냐! 결국 아침부터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릴 정도로 섹스하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예림의 몸 위로 올라탔다.

"사랑해요, 강민 오빠..."

예림이의 얼굴로 서큐버스가 말한다.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예림이는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여자니까. 지금은 예림이가 하고싶어하는 대로, 천천히 아침 발기된 자지를 예림에게 밀어넣는 수밖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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