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금속딜도 암살자 (15)
* * *
마법의 보조를 부탁한다.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는 요정여왕이 굉장히 자존심 상했던 것인지 눈썹이 움찔하고 눈초리가 첨예롭게 다듬어졌지만 이내 마도서(그리모어)의 힘을 빌리는 대마법이라 하니까 도리어 호기심을 내비치더라. 과연 요정여왕이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라는 족속답게 그녀는 궁금해진 것이다.
고작 일개 마도서가 과연 대마법을 펼치는 게 가능할지 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제국 보물고에서 공로를 치하받으며 얻은 물품이라고 하자 과연 제국의 저력이 대단하긴 하다며 감탄을 늘여뜨렸다.
"좋아요. 제부의 말대로 한 번 해보죠. 저는 뭘 하면 되죠?"
"제가 반대편에 가서 마도서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면 자동으로 마법진이 그려질 겁니다. 지금 해가 지기 전에 술식을 완성해야 하는데 마도서의 계산력으로는 속도가 부족하니 마법진을 보고 보태어 주시면 돼요."
"흐응. 알겠어요. 일대를 정령계로 만드는 대마법이라. 호기심이 아주…… 아니, 꼭 지금 필요한 기능이군요."
그리 말한 요정여왕이 스태프를 움켜쥔다.
……그런데 왜 끄트머리에 핏빛이 감도는 것 같냐.
생김새만 보면 어떤 스태프보다도 멋들어지고 효율적일 것만 같은 외형과 구조인데 끝자락이 살짝 뻘건 빛이 감도는 듯한 게 저걸로 누구 머리를 내려 찍기라도 했나 싶었다. 물론, 요정여왕이 볼품없이 누군가를 스태프로 때렸다는 게 말이 안 됐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슬슬 준비하도록 하죠. 저는 반대편에 가 있을게요. 그리고 제 여자들 잘 부탁합니다."
"호호. 알겠어요, 제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마세요."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엘븐 가드 정령사들이 어떻게든 확장을 억누른 어둠의 정령을 중심으로 빙 돌아서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언제든 검을 출수할 수 있도록 뽑은 채 허리에 매고 성자의 로브를 단단히 맨 채 마도서를 펼친다.
"잘 부탁한다고, 선배. 실패하면 왕성 반파 정도로는 안 끝나는 거 알지?"
걱정 말라고, 후배. 이래 보여도 나도 요정 나부랭이. 내 고국이 이런 별 그지 같은 정령의 폭주로 엉망이 되는 걸 원치 않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내 실력을 보여주도록 하겠어.
"믿는다고."
후우우웅.
폴리모프를 해제하고 용인(드래고니안)으로 종족 체인지를 한다. 섹스 경험치를 마력 대신 연료로 사용하는 이상 선배가 이 정령계 소환 마법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일부러 해제한다. 그동안 축적된 걸로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어 폭주하는 어둠의 정령을 중심으로 감싼다.
한 겹, 두 겹, 세 겹… 몇 겹이나 될지 갈피가 안 잡히는 수많은 마법진들이 복잡한 술식으로 짜여 어둠의 정령을 중심으로 수놓여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 제국의 궁정마법사였던 간 할배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걸 잘 알겠다. 나와 요정여왕을 양쪽 끄트머리에 두고 온전히 생성된 마법진.
후배는 가만히 마법진 유지에 마력을 들이붓고 있어! 발동은 그동안 축적한 걸로 내가 하면 되니까 유지만 후배의 마력을 좀 빌려줘.
"얼마든지 가져 가. 마력은 용인이 됐을 때부터 남아돌고 있다고…!"
용인이 되면서 보유 마력량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늘어난 덕분에 얼마든지 낭비할 수 있을 정도다. 뭐, 사실 주신이란 양반이 준 운명이라는 이름의 시련이 대형괴수를 상대하기 위해 부여한 힘이라면 좀 껄끄럽기도 하지만 이럴 때도 도움이 되면 좋은 게 좋은 법이다.
이 대규모 마법진의 유지만으로도 내 마력이 쭉쭉 빠져 나간다.
복잡한 계산이 이뤄질수록 마법진들이 현란하게 박자를 맞춰 이동하며 뭔가를 짜맞춘다.
오랜 세월을 건너뛰고 이 마법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구나.
'아르미사엘, 본 적 있는 마법이야?'
당연한 말이로다. 본녀의 머릿속에는 심연 이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으니.
이 놈의 중2만 고치면 진짜 좋은 성검인데. 왠지 성검(??)으로 타락할 것만 같은 녀석이라 불안했다.
예전에 대형괴수를 상대로 싸울 때도 요정들과 공동전선을 짰도다. 거기서 궁정마법사가 완성한 게 바로 이 정령계 소환 마법이니라. 덕분에 정령들의 한계가 일시적으로 풀렸고 큰 전력이 되어 대형괴수를 상대로 발목을 붙잡을 수 있었지.
'발목을 붙잡았다고? 전력을 다하는 정령들이?'
그대는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대형괴수는 크기만 한 살덩어리가 아니니라. 그 덩치에 세포가 전부 근육으로 이뤄지기라도 한 것처럼 엄청난 괴력을 지니고 있지. 본녀가 상대했던 녀석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산을 깎아내릴 위력을 갖고 있었도다.
'…잘도 살아남았네.'
부정하지는 않겠다.
기술이 발달한 지구에서도 산을 평지로 만들려면 엄청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데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산을 깎아 버리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핵폭탄이라도 맞아야 뒤진다는 걸까.
그런 망상을 하는 와중에 선배가 외쳤다.
완성이다! 그럼 이제 시작한다!
우우웅.
그때, 대마법의 발동 전조를 느낀 것인지 어둠의 정령이 폭풍을 만들던 촉수를 휘두르기를 그만두고 촉수들을 하나로 엮어 길다란 가시를 만들더니 그대로 이쪽을 향해 뻗는다. 그에 내가 대응하기도 전에 아르미사엘이 내 신성력을 먹고 출수하더니 아름답게 검선을 수놓으며 가시의 돌진을 튕겨냈다.
어서 발동하거라!
다 됐다고요. ─────────, 스피릿 월드 리버스!
그 순간 일어난 현상을 난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세상이, 섞인다.
그래. 이게 가장 알맞은 표현이지 않을까.
뙤약볕에 노출돼 가열된 아스팔트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이 일대가 일렁이더니 점차 색깔이 다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프리트랑 계약을 나눌 때 봤던 정령계인 빨강부터 초록, 파랑, 그리고 노랑까지 사색이 비눗방울 불듯 뿅뿅하고 생기더니 이내 알록달록한 세상을 그린다.
꺄르륵. 꺄륵.
히히히.
솔직하게 기뻐하는 정령들의 웃음이 울려퍼진다.
자신들의 세상에 가까운 환경이 조성되자 기뻐하며 힘을 더 키운다.
"세상에."
"…아름답군요."
요정들마저 그 현상에 무언가 느끼는 게 있는 건지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이네. 나중에 시도해서 이프리트랑 같이 해봐야지."
그랬다간 그 일대가 활화산 지역이 될 텐데?
……나중에 사람이 없는 평지에서 해봐야겠다. 아니면 바다 위라든가.
"지금입니다! 모두 저 타락한 정령을 공격하세요!"
""""네!!"""
그때 요정여왕이 큰 목소리로 아군에게 지시를 명하자 엘븐 가드들이 각장 정령술을 펼친다. 정령의 한계가 풀려서 여유가 생긴 그들은 절반만으로 어둠의 정령을 사방에서 압박하고, 나머지 절반이 공격을 가했다.
이제는 양손을 촉수다발로 바꿔서 사방에 휘두르는 어둠의 정령이었으나 아직 황혼이 내려오지 않은 노을빛이라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어둠의 정령은 그대로 정령들의 공격에 두들겨 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이 유사 정령계에서 그림자가 없다는 걸 인지한 건지 전력으로 자신의 신체를 변형해 무기로 만들어 무작정 휘둘렀지만 이쪽에 피해가 오는 일은 없었다.
그야 내가 아르미사엘로 전부 쳐내고 있었으니까.
정령들에게 걸려 있던 리미터가 풀려서 어둠의 정령에게 데미지를 먹이고 있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기량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튼튼한 건…… 아니고 재생력이 뛰어난 건지 부상을 입으면서도 어둠의 정령은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고 주변의 요정들에게 달려들었다.
대부분이 궁술과 정령술로 싸우는 요정의 특성상 내가 그들에게 접근하는 어둠의 정령이 펼치는 공격을 가드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배는?'
지금 기운을 다 해서 수면 모드에 들어갔느니라. 다시 기운을 채워 넣으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럼 이 마법의 유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콰앙!
바람의 구체가 폭발하며 어둠의 정령을 두들기자 자세가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발로 뻥 걷어차 버렸다.
궁정마법사가 악마의 유혹을 견딜 때까지 유지시켜 놓았겠지.
'그러니까 그게 언젠데? 똑바로 말 안 하면 저 정령의 똥구멍에 검신을 박아 넣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짓을?!………근데 생각해보니 좋을 것 같기도.
……이런 미친 마조성검 같으니라고. 그냥 땅에 파묻어 버릴까.
흠칫.
커흠. 아마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는 유지되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간 본능은 대단한 모양이다. 땅에 파묻을지 고민하자마자 직감하고는 바로 사실대로 고하는 걸 보니 아르미사엘이 생전에 어떻게 오래 살아남았던 건지 잘 알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직감이 좋으니 건국까지 하고 여황제까지 해 먹었겟지.
그나저나 해가 지기 전까지라. 하긴, 해가 지면 어둠의 정령도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쓰러뜨릴 방도가 거의 없어진다고 봐도 좋으니 그때까지만 유지하는 게 정답이겠지.
데미지가 누적되고 있기는 하지만 최상급 정령의 전력으로도 어둠의 정령이 쓰러질 것 같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키메라 연금술까지 융합시킨 것인지 부서져도 곧바로 재생하는 게 황혼이 내려앉을 때까지 버틸 것만 같았다.
'재생력이 그린스킨의 트롤 이상인데? 키메라 연금술에…… 연료로 각종 흑마법이 가미된 건가.'
여기서 유의미한 부상을 입히려면 치명상 이상의 공격력이 필요한 듯 싶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고삐가 풀린 이 유사 정령계에서 이프리트를 소환했다간 반파 정도로 안 끝날 것 같고. 내 성화가 효과적일 듯 싶기는 한데 몇 분 후면 해가 진다. 그 이전에 끝낼 자신이 없으니… 역시 왕성이 파괴되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일격을 먹이는 게 좋을까.
그리 생각할 때였다.
"하앗!"
"성자님, 도울게요!"
불쑥 나타난 하사나와 마리가 양옆에서 어둠의 정령을 혈검과 단검으로 기습한다. 당연하게도 그녀들 또한 그림자가 없어서 저 멀리서부터 달려왔던 거라 그런지 어둠의 정령이 침착하게 양손의 촉수를 배배 꼬아 방패로 엮어 막는다. 그리고 남은 촉수 가락으로 두 여인을 때리려 했지만,
움찔.
잠깐 렉이라도 걸린 게이머처럼 멈춘 걸 보고 돌진해 성화를 두른 아르미사엘과 엑스칼리버로 어둠의 정령을 엑스로 그었다. 가슴에 있을 핵을 베려고 했지만 몸을 비틀어서 피한 나머지 팔다리가 단숨에 후드득 잘려 나갔지만 피 한 방울 뿜어지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정령이라는 게 명료한 존재였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건지 곧장 거리를 벌리고는 다른 정령들의 합공에 찰나도 안 되는 시간에 팔다리가 피콜로처럼 불쑥 자라나 막는다. 미친 재생력이다.
나는 둘을 뒤로 감싸듯 앞에 서서 말했다.
"여긴 왜 왔어? 떨어져 있으라니까."
그리 말하자 두 사람이 내 어깨와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아파.
"파파. 저, 화내도 돼요?"
"성자님, 화낼 거예요?"
모녀 맞네.
"저희들은 성자님하고 나란히 서고 싶은 거지 일반 영애처럼 집보기만 하고 싶은 게 아니랍니다."
"파파가 싸우는 데 가족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다른 둘도 그렇데?"
둘에게서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우리들 위로 새하얀 빛살이 쏘아진다.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냉기의 화살이 자신에게 쇄도하는 걸 본 어둠의 정령이 촉수 랜스로 쳐내지만 때리자마자 터짐과 동시에 부딪혔던 팔이 얼어붙더니 그대로 산화한다.
성녀체질과 설녀체질의 합작인가.
저 화살만으로 대답이 됐다. 확실히 내 여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몇 분 이내에 저 타락한 정령을 쳐 죽이는 게 가능할 듯 싶다.
나도 모르게 내 여자들을 무조건 지켜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던 걸까.
나중에 사과해야겠는 걸.
그보다 지금은 내 여자들이 다치지 않게 내가 더 잘해서 저 녀석을 안정적으로 족치자.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에 집중하며 부탁했다.
"그럼 어시스트, 부탁할게."
"네."
"네!"
우리 셋은 곧장 어둠의 정령에게 달려갔다.
***
쿠우우웅. 구우우웅.
이그드라실 왕성 지하에 여왕 말고는 아는 이가 없던 공간. 그곳에 디케이가 홀로 걸으며 광기 서린 미소를 그렸다.
저 위에서 계속해서 전해져 오는 미세한 진동이 타락한 정령이 제 일을 잘 하는 것 같아 흡족했다. 자신이 준비한 시녀들의 영혼을 뽑아 바쳤으니 충분한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그러면 본래 목적을 이룬 자신이 다시 회수해서 여왕 대리로 내세워 요정왕국을 지배하면 된다.
"크히히히히. 이제 곧 얻는다."
그는 지하복도를 걸으며 이 끝에 있을 걸 상상하며 히죽였다.
"세계수를 죽일 신살병기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