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금속딜도 암살자 (14)
* * *
소음의 근원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폭음이 커지는 걸 들으면 알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화르륵 뭔가 타는 소리나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걸 보면 이미 왕성을 지키는 엘븐 가드들이 여럿 등장한 듯했다. 상급 정령과 계약한 녀석들이 제법 많은 게 결코 가벼운 전력이 아니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게 맞다면 적은 최상급 정령을 뛰어넘은 괴물이다.
안 그래도 흑마법사 녀석들이 정령을 억지로 마개조하여 더 강해졌을 텐데 타락요정이 적극 개입했다면 정령왕급은 아니어도 최상급 정령은 가뿐히 이기리라.
그리고 적은 바보가 아닐 거다. 세계수를 그 오랜 시간 오염시키고 해결해도 또 같은 수작을 걸어 성공하는 걸 보면 머리 또한 나쁘지 않을 테니 적어도 요정왕성에 있는 병력들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저 제어불가의 정령을 풀어버린 거겠지.
하지마 내가 비교하기에 요정왕성의 병력을 거뜬히 상대할 수느 있어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적이 성동격서를 노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가만히 있던 놈이 이리 대놓고 날뛰기 시작했다는 건… 원래 예정을 행할 때가 됐거나, 제국의 사절단에 의한 변화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그런 거겠지. 그리고 나는 후자라고 본다. 일단 증거는없으나 정황이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국서의 신경을 살살 긁었으며 세계수를 오염시킨다는 암약마저 파훼했으니 가만히 있기에는 불안했겠지.
"하사나. 아비 누나랑 마리랑 합류해."
"네? 파파, 는 어쩌시게요?"
"난 소리의 근원지로 가서 이 난동의 근원이 되는 걸 해결할 거야. 하지만 나는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아."
"성동격서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하사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적이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혹시 내 여자들일 수도 있으니 그쪽의 대비를 하고 싶어. 아비 누나, 마리, 그리고 티타니아까지 전부 연약한 이들은 아니지만 세상 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법이니까."
"……네. 어머님들하고 합류할게요."
그리 말하며 그림자로 쑤욱 사라지는 하사나. [화안금정]으로 보니 타 그림자와 연결된 통로를 만들어 신속한 이동을 펼치며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기동력이라면 빠르게 내 여자들과 합류하겠지. 내 여자들에 대한 걱정을 거두며 소란의 근원지로 이동하자 그곳에는 요정여왕을 꼭 닮은 여인이 있었다. 아니, 여인은 맞았지만 요정은 아니었다.
이프리트와도 같은 격이 느껴지는 존재. 그러나 깨질 것만 같은 도자기처럼 불완전하고도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는 정령. 녀석은 새까맿다. 머리부터 눈섭, 동공까지 색소가 있을 법한 부분은 다 시꺼맿다. 색만 봐도 굳이 화안금정을 통해 볼 것도 없이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어둠의 정령이네."
그것도 심지어 마개조를 당한 요정. 타락요정은 자신의 계약정령을 마개조해서 키메라 연금술까지 써 가며 새롭게 재창조한 걸까.
준정령왕이 되면 어느 정도 실체를 가지게 되니 저렇게 마개조를 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쏘아라! 저 타락한 존재에게 동정을 갖지 말고 천벌을 주는 거다!"
제법 수준 높은 엘븐 가드의 지시에 따라 요정들이 정령술을 펼치며 어둠의 정령을 협공한다. 얼핏 보기에는 미녀를 집단으로 리치하는 무뢰배로 보일 법도 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수욱.
하사나처럼 그림자 이동을 통해 사방팔장에서 날아오는 정령술의 합공에서 벗어난 어둠의 정령이 허공에 손을 휘적이자 각 요정의 그림자에서 가시가 솟구쳤다. 발이 빠른 요정들답게 무시무시한 그림자 송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몇몇 요정은 감당하지 못하고 복부를 관통당하며 순식간에 초주검이 됐다.
'그림자를 통해 어둠을 조종하는 건가?'
불의 정령이 아닌 이상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대인 노을빛은 곧 있으면 그 빛마저 거두어 가기에 상황을 더 끌어봤자 악화만 될 뿐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요정이 있는지 지휘관급으로 보이는 이가 소리쳤다.
"불의 정령과 계약한 요정들은 앞으로 나서라! 저 정령은 그림자를 무기로 쓴다! 불의 정령이 사용하는 불꽃으로 그림자를 없애고 싸우는 거다!"
그 지시에 몇 요정들이 앞으로 나서서 불의 정령을 소환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그야 숲에서 살아가며 자연을 사랑하는 요정들에게 있어 불의 정령과는 별로 친화력이 좋지 않으니까.
대부분이 바람과 땅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걸 고려하면 그나마 요정여왕이 기거하는 왕성이었기에 이만한 불의 정령사들이 존재하는 거였다.
'그래도 저걸로는 부족해. 끽 해봤자 중급 정령들뿐이잖아.'
최상급은 고사하고 상급 불의 정령도 없었다. 저걸로는 그림자의 활동수를 줄일 뿐이지 어둠의 정령을 상대할 여력이 못 된다.
촤악!
"끄아아악!"
"아아악!"
내 예상대로 어둠의 정령은 그림자가 불꽃의 빛에 많이 사라지자 갑자기 자신의 손을 크라켄의 문어다리처럼 커다란 촉수로 변형시키더니 그대로 채찍처럼 휘두른 것이다. 그런데 그 속도가 안력이 좋은 요정들마저 쫓아가기 힘든 속도였기에 손수무책으로 촉수에 얻어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둠의 정령의 촉수가 휘둘러지는 도중에 분열하는 히드라의 머리처럼 숫자를 불리더니 단숨에 여덟 개로 늘어나 채찍이 아닌 소태풍을 일으켰다.
강철 장식마저 두부 뭉개듯 압도적으로 휘둘러지는 위력을 내포한 촉수질에 일대가 쓸려 나간다. 태풍처럼 거칠고 빠르게 몰아치는 촉수의 향연에 요정들이 멀리서 공격을 가해보지만 통하질 않는다. 오히려 어둠의 정령은 그 길이를 더 늘려 범위를 확장하는 걸로 가드를 하던 정령들마저 후려쳐 강제로 역소환을 시켰다.
"쿨럭!"
몇몇 요정들이 강제 역소환에 내상을 입은 건지 피를 토하며 물러난다.
그 태풍은 점점 커지더니 소태풍에서 폭풍이 되어 왕성을 집어삼킬 기세로 범위를 확장하려 들었다. 어둠의 정령은 그냥 이대로 왕성을 쓸어 버릴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요정들이 민첩하게 가장 강한 정령을 소환해 그 태풍을 향해 각자 전력을 다한 기술을 쏘거나 방어를 해 확장을 멈추기 시작했다. 공격해봤자 끊어진 촉수가 다시 재생되어 휘둘러지는 걸 본 요정들은 공격을 멈추고 그냥 방어에 집중하며 여럿이서 어둠의 정령을 둥글게 감쌌다. 땅의 기둥이 치솟고, 얼음벽이 세워지고, 바람이 역바람을 일으키며 태풍을 압박한다.
각자의 방어 정령술이 둥글게 압박하니 어둠의 정령이 휘두르는 위협적인 촉수마저 확장을 멈추고는 대치 상태가 이어진다.
일단 왕성이 풍비박산이 나는 건 막았지만 상황은 결코 호전된 게 아니었다. 이쪽의 공격력은 부족했고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노을이 완전히 지기 전에 어둠의 정령을 쳐야 하는데 그 이전에 어둠의 정령에게 치명타를 먹일 일격을 가진 정령사가 요정 사이에 없었다.
최상급 정령사는 저 여덟 촉수의 태풍을 뚫고 어둠의 정령에게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고 있기는 했지만 해가 지기 전에는 처리하는 게 불가능할 듯했다. 흑마법사 녀석도 이걸 노리고 일부러 이 시간대에 어둠의 정령을 마음껏 날뛰도록 한 게 아닐까.
'어쩔 수가 없네.이프리트를 소환하자.'
이프리트가 내 마력을 왕창 잡아먹으면 소태양을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불의 구체를 일으킬 수 있다. 산 하나의 반을 홀라당 태워먹었던 그 기술을 생각하면 아무리 온갖 마법이 떡칠된 요정국의 왕성이라도 반파되겠지만 밤이 찾아올 때까지 저놈을 묶어두기만 했다간 늦으리라. 그때가 되면 자신도 질 가능성이 우후죽순 올라갈 터. 처리할 거면 지금 처리하는 게 답이었다.
요정들의 허락도 없이 반파시키면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내 여자의 고향이 엉망이 되도록 냅둬서 피해자를 늘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리 생각하며 이프리트를 소환하기 직전이었다.
후배. 멈춰!
'……선배?'
후배의 생각대로라면 요정왕궁이 반파되잖아. 그럼 세계수님은 어쩔 건데!
'그렇다고 저 녀석이 감당 못할 괴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간 정말로 게임 끝이야. 알잖아? 그러니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나서지 마.'
아무리 선배가 궁정마법사를 겸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저 어둠의 정령을 족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냥 정령왕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게 최고다.
하지만 선배는 내 예상보다 좀 더 유능한 마법사였다.
있어! 방법이 있다고!
'진짜? 그걸 왜 지금 말해! 이대로 해가 지기 전에 어서 시도해 봐.'
내가 여자들과 쌓은 섹스, 한 마디로 섹스 경험치를 엔진 삼아 마법을 발동하는 마도서가 선배의 능력이었기에 나는 당장 뽑으려던 쌍검을 다시 검집에 수납하고 마도서를 들었다.
내가 말하려는 방법은 정령계를 소환해서 일시적으로 중간계와 중첩시키는 대마법이야. 그걸 사용해서 이곳을 정령계로 만들면 사대정령의 힘에 고삐가 풀려서 전력이 30% 늘어나지. 그러면 어둠의 정령도 치명타가 될 데미지를 줄 수 있어.
그럼 당장 쓰지 않고 뭐하는 건가. 평소에 폴리모프 말고는 쓰는 마법도 없어서 섹스 경험치는 충분하건만.
하지만 이 마법의 난이도를 고려하면 내가 완성하기도 전에 연료가 떨어질 거야. 대마법인 만큼 연비가 장난이 아니거든.
'아니, 장난 쳐? 그럼 어쩌자고.'
날 보조할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를 한 명이라도 구해 봐. 내가 지식 전달 마법을 통해 술식을 전하면 보조를 받아서 펼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선배는 자신이 술식을 계산하고 펼치는 동안 보조해서 완성 속도를 가속시킬 뛰어난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영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섹스 경험치의 소비가 장난 아니니 그걸 감당할 수 있도록 보조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곳이 요정왕국이라는 거다.
마법사를 할 바에는 간편한 정령사가 훨씬 낫다. 그리고 요정들은 선천적으로 자연친화력이 높아 정령사가 대부분이고 마법사가 있어도 그건 실력이 낮은 이들뿐이지 선배의 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거다.
사실 요정여왕이 뛰어난 정령사이자 동시에 마법사라고 알고 있지만 이런 소동이면 여왕인 그녀는 지금 쯤 대피를 하고 있을 테니 이곳으로 불러오기에는 늦은
"이게 다 무슨 일이죠!"
하사나가 합류한 내 여성진과 함께 이쪽을 향해 전투복을 입은 채 달려오는 요정여왕.
단언컨대 지금만큼 그녀가 반가웠던 적이 없었던 나는 후다닥 발이 안 보일 속도로 달려가 요정여왕의 손을 붙잡았다.
"찾았다, 보조 계산기!"
"……………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