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금속딜도 암살자 (10)
* * *
뒷처리를 깔끔하게 한 뒤, 배정된 객실로 복귀한 우리 둘은 한동안 침묵을 고수했다. 나도 그렇고 하사나 또한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었지만 최후의 일선인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행이 아니라 더 어색하달까. 그냥 마지노선마저 넘었다면 달게 받아들이고 내 여자들에게 하사나와 그런 관계가 된 다음에 경멸의 시선을 좀 받으며 책임을 지면 된다.
하지만 이건 마지노선성기의 결합 및 질싸을 넘은 것도 아니고, 일선을 안 넘은 것도 아니니 되려 어중간해진 나머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건 하사나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치맛폭을 내리고 다시 단정하게 복장을 갖춘 뒤에 무표정을 고수하며 여전히 메이드로서 할 일만 한다. 청소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 나는 뭔가에 집중해서 신경을 돌릴 만한 일거리도 없으니까.
'하아. 좋기는 했지만…… 진범 새끼는 절대 가만 안 둔다.'
태어나서 죄송하다고 울고불고 할 때까지 조져버릴 테다. 그렇게 복수심을 다잡고 있는데 갑자기 뿌득 소리와 함께 이를 간 하사나가 몸을 홱 돌려 이쪽을 향한다.
엄연히 이번 사고는 내 잘못이었기에 양심이 찔린 나는 자연스럽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터벅터벅 성 난 발걸음과 함께 내게 다가온 그녀가 같은 눈높이에서 빤히 응시한다.
"하아. 제게 할 말은 없으세요?"
"죄,죄송합니다."
"존댓말까지는 필요 없고요."
그리 말한 하사나가 그림자를 일으키더니 그대로 의자로 형성해내 꺼 하나, 자기 꺼 하나씩 만들어 털썩 앉고는 고개를 까딱인다. 어서 앉으라는 제스쳐에 나는 순순히 그림자 의자에 앉았다.
그에 나도 앉았더니 의외로 편안한 감촉에 살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마리도 폭주해서 그림자 촉수로 날 포박하려 했을 때 그 감촉은 부드러웠지. 아무래도 이 그림자는 내가 생각하는 단순한 물리력을 형성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은밀하게 기막을 쳐 혹시라도 우리들의 대화를 엿들을 도청의 가능성을 차단한 뒤에야 대화의 장이 만들어졌다.
일부러 하사나는 쉽게 느낄 수 있도록 마력을 운용했으니 누가 엿들을 일은 없다는 걸 그녀 또한 인지했을 것이다.
"일단……저희들에게 있었던 일은 어머님들한테는 말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비밀로 하자는 거야?"
"그럼 사실대로 말할까요?"
눈꼬리가 올라가 첨예로운 인상이 되는 하사나. 그녀의 눈초리에 나는 곧장 항복했다.
죄인에게 할 말은 없었다.
"아니. 엄연히 이번 건은 내 잘못이니까. 네 말대로 할게."
"그건 감사하네요."
하사나는 고민거리가 하나 사라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어머니랑 새아버지께서 잉꼬 부부 같은 모습으로 있는데 그렇게 어색하게 끼어들게 되는 건 사양이거든요. 어쨌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 마. 세계수가 오염되어 있다는 특이성 때문이지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당당하게 그리 말했다.
세계수가 어디 평범한 나무인가. 반신의 격에 다다른 존재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의 격에 오른 이들조차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다. 오래 살아온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것이다. 그러니 방심해서 배신자에게 당해 오염된 것이니 그게 해결된 이상 바보 같이 또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흡성대법으로 사특한 마력을 흡수하려고 할 때 전해졌던 의념은 확실한 자아를 가진 존재라는 증명이기도 했고.요정여왕 침실에 가서 미혼향을 놓는 게 목적인 우리들은 다시 세계수와의 만남에서 오염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 괘찮을 거다.
그런데 확답을 주니 하사나의 표정이 묘하게 찡그려진 듯했다. 혹시 항문자위를 너무 세게 해서 엉덩이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양심이 푹푹 찔린다.
"……그럼 다행이고요."
"목소리가 안 좋은데. 혹시, 몸이라도 안 좋아?"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저는 이제 '백작님'이 마실 차를 준비할게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하사나. 대화의 끝을 고하며 그녀는 다시 평범한 시녀인 척 차를 타기 시작했다. 그에 주변을 기감으로 둘러보니 객실 근처를 지나던 요정 사용인이 있었다.
하여간 공사는 확실하게 나눠서 처리하는 그녀였다.
***
사르륵. 사륵.
산들바람이 부는 산뜻한 날씨. 계절에 맞지 않는 이 날씨는 이그드라실이 세계수의 영역이라 항상 봄과 가을만이 반복되길 때문이다.
항상 신선한 날씨를 유지하며 자연적으로 풍족하게 만드는 자연의 권능. 천연의 요새를 구성할 수 있는 이 권능이야말로 세계수의 능력이요, 이그드라실의 요정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세계수도 가끔은 권능을 이용해 겨울을 불러올 때가 있긴 했다.
나무가 너무 많아지면 서로 엉키며 우거지게 되고, 그러면 무성한 나뭇잎이 양산이 되어 파릇파릇한 신록들이 받아야 할 햇빛마저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지 않게 되고 도리어 숲은 죽어가게 된다. 그렇기에 세계수는 필요하다 판단하면 겨울을 불러오기도 했고 그건 거의 주기적이었다. 다만, 아주 긴 시간을 주기로 두기에 늙은 요정이나 수명이 긴 고위요정이 아닌 이상 그 주기를 모르는 게 대다수다.
그리고 곧 그 주기가 찾아온다는 걸 아는 고위요정인 이그드라실의 국서 디케이 이그드라실은 그때를 기회로 점쳤다.
'아무리 불완전한 정령왕이라도 권능을 끄고 겨울을 불러온 세계수를 상대로 선전하며 큰 파멸을 몰고 오겠지.'
원래는 완전한 정령왕을 만든 뒤에 싸운다면 그깟 권능이 있는 세계수 또한 크게 걱정은 아니었다. 자신의 정액에 미약을 섞어 뿌리에 먹이는 걸로 아주 조금씩, 세계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오염시켜 반신으로서의 격을 더렵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멍청한 조직원들의 트롤링으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찾아온 사절단과 성자 레온 때문에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크크. 이제 곧 완성이니까."
여섯 간부의 정수가 들어가 마개조가 된 자신의 계약정령. 한낱 중급 정령에 불과했으나 오랜 시간의 진화를 거듭해 준정령왕급이 된 괴물. 그의 취향이 잔뜩 들어간 어둠의 정령은 이제 옛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 케이스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어둠의 정령의 모습은 디케이의 부인이자 요정여왕인 테일레나를 닮아 있었다.
디케이는 그런 자신의 계약 정령에게 다중적인 의미가 담긴 시선을 열렬히 보냈다.
사랑, 증오, 구애, 애욕, 원망 등등 연인과 원수에게 보낼 법한 시선들이 하나로 뒤섞여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만들어 낸다. 광기로 눈을 부릅 뜨느라 충혈된 눈은 정령의 고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령에게 없어야 할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수술을 드러내는 게 부끄러워 꽃잎으로 가린 봉오리처럼 꽉 닫혀 있는, 아직은 형태만 잡힌 균열이었다. 그러나 명백히 형태가 여성의 음부를 취하고 있었으며 좀만 더 형태를 갖춘다면 성교 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역시 선조의 지식은 대단하군. 나도 정령왕과는 섹스가 가능할 줄은 몰랐지만……."
디케이가 품에서 꺼낸 낡은 수기를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레온이 봤다면 팔뚝에 소름이 났을 정도로 기겁하며 징그럽다고 외쳤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단순히 복수할 생각으로만 자신의 계약 정령을 개조했다. 하지만 선조가 남긴 수기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정령왕과 계약을 맺는데 성공하고 정령과 떡을 치려던 선조는 과 떡을 치려다 질압에 자지가 터져나가는 바람에 실패하고 고자가 되었다고 한다.그것은 엄연히 정령계에서 온전한 힘을 보유한, 그것도 힘으로는 제일이라고 평가를 받는 과 떡을 치려고 했기 때문.
그러니 디케이는 자신의 물건에 딱 맞는 좆집으로 정령을 개조한다면 정령왕이든 뭐든 상관없지 않겠는가. 자신의 선조는 현명하면서도 어리석었다. 자신의 정령을 개조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식을 후대에 전해줬으니 잘 써먹으면 되는 법이지.'
그는 자신의 계약 정령에게 여왕의 업무를 맡길 생각이었다.이미 자식은 있는 덕분에 더 이상 임신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대외적인 활동만 그녀에게 맡기면 의심하는 이들은 나오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동안 진짜 테일레나는 이 지하에 갇혀서 자신에게 충성할 때까지 아주 길게, 느긋히 조교를 가할 생각이었다. 고위요정에 있어 시간은 남아도는 것이었으니까.
"크크큭. 그래. 그대로만 잘 커라. 그러면 내가, 남자가 요정왕국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경이 쓰이는군."
광기를 터뜨리려다가도 돌연 연륜이 깊은 눈빛을 하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디케이. 그는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났다는 걸 인지했다.
'처제는 과연 테일레나의 여동생답게 닮았었어.'
설녀체질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추방되듯이 이그드라실을 나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인. 그러다 돌연 인간 남자를 물고 온 고위요정 티타니아 이그드라실.
테일레나의 자매답게 매우 닮은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는 그녀는 디케이에게 있어 또다른 욕망을 불피웠다. 테일레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의 광적인 집착이 티타니아에게까지 닿아 소유욕을 불러 일으킨다.
"큭큭큭. 처제가 성자의 둘째 아내라고? 그거 아주 잘 됐어."
긴 금발을 찰랑이며 하물이 빳빳해지는 디케이가 음탕하게 웃으며 피부를 검게 물들였다. 머리색은 그대로라 단숨에 금태양으로 변모해버린 디케이는 선언했다.
"성자, 네 놈의 여자도 겸사겸사 빼앗아 주마. 크크크."
바로 네토리(NTL)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