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금속딜도 암살자 (7)
* * *
사절단에 추가인원이 이그드라실에 도착했다.
호위하던 병사들을 제외하면 전부 사용인에 불과한 이들이었지만 요정들이 끈질길 정도로 검사를 했다며 불평을 늘여뜨렸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별다른 재주암살이나 전투술 같은 재주가 없다는 확신을 얻을 정도로 꼼꼼하게 검사를 받은 후에야 보내줬다던가. 티타니아와 동행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며 요정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을 때는 절로 다 아찔했다.
나도 티타니아 없었으면 검사를 엄청 꼼꼼히 하면서 귀찮게 했을 테니까.
'티타니아가 프리패스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어쨌든, 하사나는 무사히 사절단에 합류해 정식으로 당당하게 왕성에 입성했다.
다들 처음 보는 로리거유 메이드에 당황했지만 의외로 하사나는 정식으로 그들에게 인사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라 시종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집사 교육, 시녀 교육을 하는 아카데미가 따로 있는데 이미 거기를 이수해서 자격증까지 있다던가. 대신 머리를 빨갛게 염색해서 인상이 완전 달랐지만 말이다.
그렇게 빨간머리 메이드가 된 하사나가 상당히 늦은 시간, 내가 머무는 객실에 찾아왔다.
"입성하자마자 만나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
"어머니가 귀엽다면서 잡아서 놓아주질 않으셔서요."
"그럼 어쩔 수 없지."
"……."
하사나가 날 지긋이 노려본다. 무슨 의도로 그리 말했냐는 뜻을 눈빛에 담아 쏘아본다.
아니, 왜.
로리거유면서도 몸의 곡선이 자연스럽고 얼굴 또한 음마답게 예쁘장해서 미소녀라고 하면 부정할 수 없다. 거기다 메이드복을 입고는 머리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심지어 적(赤)보다는 좀 더 연한 홍(?)에 가까운 색이어서 예쁜 인형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니 모성애 강한 마리가 그렇게 쪽쪽 물고 빨고 한 거겠지.
최대한 흔적을 지운 듯 하다만 볼에 마리의 립스틱 자국이 연하게 남아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뭐, 나 정도의 눈썰미라 간파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럼 앞으로는 절 대동해서 여왕이나 국서에게 접근하실 계획이신 건가요?"
"그렇지. 침실까지는 무리겠지만 요정여왕이 국정을 보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 티타니아와 함께 여왕을 알현하고 티타임을 나누듯 대화를 갖다가 몰래 중간에 빠져서 잠깐 그곳으로 들어가는 건 식은 죽 먹기지."
하사나의 표정이 아리송해진다.
"왜 그렇게 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자신은 있으세요? 생각보다 왕성의 경비는 삼엄하다고요? 특히 인간 사절단이 방문한 요정국의 왕성은요."
확실히 이그드라실 왕성은 나이트킹덤 제국의 황성보다도 경계가 삼엄했다. 타 종족이자 국가의 사절단이 찾아와서 그런지 짧은 주기를 두고 순찰을 돌며 정령 또한 종종 소환해서 한 번씩 점검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마치 감시는 똑바로 하고 있으니 허튼 짓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뛰어난 기량의 암살자인 하사나는 자신이라면 몰라도 나로서는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확실히 그리 생각할 법은 하다.
내가 단순한 검사였다면 말이다.
"미안하지만 정령을 속이는 정도는 편법으로 나 또한 가능해. 요정의 기감을 속이는 것 또한 물론이고."
"확신하고 계시네요. 그건 보증된 방법인가요?"
"하사나. 원래 세상이란 고달픈 법이야."
세상은 본디 험난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자신보다 확연히 위에 존재하는 자가 까라면 까야 하고 불합리한 일조차 받아들여야 하는것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공식이긴 하지만 나는 요정여왕이 직접 순찰이라도 돌지 않는 한 이그드라실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사나. 혹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상사가 닥치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
하사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에 나는 싱긋 웃었줬다.
"보면 알아."
***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치?"
어벙벙한 얼굴을 한 건 아니었지만 예상 외의 전개였던 건 확실한 건지 하사나가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암살자로서 고용됐을 때는 무표정이나 혐오만을 내비쳤는데 지금은 그래도 가족이라고 감정을 내비치는 걸까.
잠시 이프리트를 소환해 한 번 안아주는 걸로 도움을 받았다.
나도 성장이란 걸 하는 건지 이제는 그녀가 절정할 때 내뿜는 불꽃세례를 제어해서 주변에 옮겨붙지 않도록 억누를 수 있게 돼서 재빠르게 했다.
간만에 직접 주입하는 마력맛에 뿅 간 이프리트가 만족할 때까지 흐물흐물해진 자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기분 좋게 내 부탁을 들어주며 내 목덜미에 키스 마크를 남겼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내가 부탁한 건 키스 마크가 아니다.
엄연히 이프리트가 으로서 일시적인 축복을 걸어준 것인데 그게 키스였을 뿐이고 마크로서 눈에 띄게 남긴 건 다른 정령들에게 내 남자니 건들지도, 상관하지도 말라는 경고의 의미였다. 정령이 너무 많아서 거동에 방해가 된다니까 이프리트가 상관하지 말라는 의미만 남기려다가 내가 다른 사대 속성의 정령에게 호기심을 품은 걸 느낀 건지 질투심에 건들지도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남겼더라.
'하여튼 귀여운 정령이라니까. 어려서 그런가.'
그로 인해 내 그림자 속에서 은신한 하사나와 정령왕의 축복 겸 키스(경고) 마크를 단 우리는 정령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채 여유롭게 왕성을 거닐었다.
지금 쯤 티타니아는 내가 부탁한 대로 요정여왕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겠지. 뿐만 아니라 마리와 아비 누나까지 데려갔으니 수다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터. 이틈에 여왕의 침실에 어서 작업을 끝내야 했다. 그렇게 여왕의 침실 앞에 도착하자 나는 기감으로 이 근방에는 정령 말고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잠겨 있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나와 함께 하는 여성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하사나, 부탁할게."
네. 금방 처리할게요.
그림자에서 불쑥 손이 올라오더니 나무 줄기처럼 자라난다. 손가락 끝자락의 형태를 핀셋처럼 바꿔 뾰족하게 만들더니 그대로 침실의 문을 따기 시작했다.
굉장히 익숙한 듯한 그 모습에 감탄이 절로 일었다.
여왕의 침실이라는 게 단순하게 잠근 게 아니라 마법적인 처리도 당연히 했을 텐데 그걸 능수능란한 손가락질(?)로 해제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당신의 그림자의 수장이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달칵.
후우. 다 했어요.
"수고했어."
짧은 시간 내로 문을 딴 그녀의 수고에 간략하게 감사를 표하고 문을 열어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처형의 침실로 들어가는 상황이라 그런지 내가 굉장히 쓰레기 같은데. 티타니아만으로 모잘라서 처형까지 따먹으려는 금태양이 된 기분이다.
의외로 요정여왕의 침실은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화려한 치장은 없었으며 그리 꾸며지지 않은 목재 가구에 실크로 만든 듯한 수수하면서도 고급 재질의 천으로 짜인 침대. 화장품 같은 건 딱히 없었으며 마법을 연구하기 위한 서적이라든가 정령사로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던가 하는 게 있었을 뿐이다.
딱히 특별한 점을 손꼽자면 창가에 이그드라실의 중심이 되는 세계수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다는 정도일까.
여왕의 침실이라기보다는 사용인이 머무는 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소하면서도 단dk한 방이었다.
"신기하네. 여왕의 방 치고는 너무 조촐한데."
"세계수가 가깝잖아요."
그림자에서 나온 하사나가 말했다.
"요정들이 가장 신성시하며 자연의 신이라 믿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왕성의 방이니 이곳으로 침실로 해도 이상하지 않죠. 저것만 있어도 요정들은 알아서 만족할 테니까요."
"그래? 그나저나 상당히 잘 아네."
"예전에 대풍이 직격해서 세계수의 잎사귀가 많이 떨어졌거든요. 말단에게 시켜서 줍게 하고 미망인 요정을 새로 첩으로 들인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았는 데 그때 짭잘하게 돈 좀 만졌죠. 그리고 요정들이 얼마나 세계수에 환장하는지도 잘 알았고."
"티타니아는 그런 티를 안 내던데…."
"주인님이 곤란해 할까 봐 참았던 거겠죠."
"쩝."
할 말이 없다. 나중에 요정여왕에게 부탁해서 티타니아에게 줄 기념품 메이드 인 세계수를 하나 구해보든지 해야겠다.
이왕이면 세계수의 가지로 활 하나 새끈하게 잘 빠진 거 하나 만들어서 선물하면 티타니아가 뽀뽀해주지 않을까. 하사나가 부작용은 일절 없고 효과는 미약하지만 서로에게 애정이 있다면 두근거리는 효과를 증폭시키는 미혼향을 뿌린다.
약제에 대해 더 잘 아는 건 하사나니 여기서도 그녀가 하는 걸 볼 수밖에 없던 나는 슬쩍 세계수에게 시선이 갔다. 그나저나 반신급 생명체면 뭔가 굉장한 녀석일 텐데 그냥 보면 커다란 나무에 불과한 세계수는 과연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그 호기심에 [화안금정]을 키고 보는 순간,
'………이런 미친 놈을 봤나.'
분명 세계수의 목체(??)는 대단했다.
나무라고 생각되지 않는 유연함과 내구성을 지녔으며 수액에 담긴 농밀하고 진한 마력은 과연 반신에 이른 존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나랑 싸운다고 하면 스태미나 소비를 신경 쓰지 않고 싸워도 상성으로 10분을 버티는 게 한계이리라. 다만, 그랬다간 세계수의 주변 일대가 멸망이 내려앉은 것처럼 풍비박산이 나서 하지 않겠지만.
그런데 그런 세계수가 타락해 가고 있다.
아니, '오염'되어지고 있었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수가 식물이라는 점을 이요해서 뿌리에 오염된 액체를 뿌리고 그걸 세계수가 흡수하면 자연스럽게 오염되는 식이었다.
그래봤자 타락하려면 몇백 년은 족히 걸리겠지만 수백 년을 우습게 보는 고위요정에게 있어 이 긴 시간은 그리 개의치 않은 거리라.
'애당초 몇십 년이나 지속적으로 주입했던 흔적이 있어. 확실해. 오염된 기운이 국서가 풍기던 기운이랑 똑같다.'
사특한 마력과 천적인 자신의 성화라면 저걸 해결할 수 있을까. 잠깐 주판을 튕겨 보았으나 이내 완전하게 해결하는 건 불가능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그래도 해결할 수는 있다. 무의식적으로 창가 너머에 손을 뻗어 세계수의 나무기둥을 매만진다.
방중술과 색공을 섞은 무공의 기반이 되던 무공. 한때 마인 컨셉을 잡고 플렝했을 당시 습득했던 [흡성대법]을 펼친다. 무분별하게 세계수의 기운을 빨아들인다면 큰 성장을 이루겠지만 그게 아니기에 집중해 세심하게 흡성대법을 운용한다. 순수한 기운은 거르고 뿌리에서부터 오염된 기운을 빨아들인다. 그럼 내가 타락할 수도 있으나 늦기 전에 성화로 처리해 버리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테니 이게 세계수를 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
그러나 기운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 예상 외의 상황에 의아해 하고 있자니 좁쌀만한 세계수의 정수가 내게 흘러들어온다. 흠칫했으나 둘 다 위험해질 수 있기에 손을 뗄 수는 없어서 가만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세계수의 의지가 전해졌다.
자신의 아이가 잘못한 거니 부모인 자신이 책임지겠다. 외부인인 내게 빚을 지우고 싶지 않다, 라는 의지가 확고했다.
걱정 마.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걸 느끼며 전음으로 세계수에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내 아내 중 한 명이 요정이라서 도와주는 거야. 사돈이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사라락.
수풀을 쓰다듬어줄 것 같은 가벼운 미풍이 일더니 세계수의 잎사귀가 사뿐히 내 어깨에 얹혀진다. 고맙다는 걸까.
감사는 나중에 받겠다. 지금은 세계수를 돕는 것에 집중할 뿐.
콰과과과.
누가 사트한 마력이 아니랄까 봐. 세계수에서 내게로 억지로 끌려온 사특한 마력은 마치 빨간색을 본 투우처럼 광분하며 날뛰었다. 이걸 냅뒀다간 세계수처럼 오염을 당하게 되겠지. 내상을 입을 수 있지만 과감하게 성화로 태워버리려던 찰나,
'어? 어? 머, 멈춰, 이 새끼야!'
생존본능이 경직을 울리기라도 한 것인지 성화가 일어나려 하자마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녀석들은 내가 '절대' 해할 수 없는 위치로 가 깃들었다.
심지어 남자라면 결코 무슨 짓을 해도 포기할 수 없는 곳.
고환.
불알 주머니에 담긴 두 개의 구슬에 각각 반으로 나뉘어 정착한다. 이곳을 내가 해칠 자신이 있겠냐며 녀석들이 맘 편히 깃든다. 태우고자 하면 성화를 일으켜 얼마든지 태울 수 있겠지만.
'이걸 어떻게 때려……. 좆 됐다.'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설마 자아도 없는 녀석들이 생존본능만으로 고환으로 갈 줄은 몰랐다.
심지어 사념이 가득한 마력의 소유자가 상당히 음탕한 것인지 그 마력이 고환으로 들어가자 자지가 절로 풀발기를 하며 핏줄을 울끈불끈 박동한다. 그리고 이 난감한 상황에 심란해 하고 있느라 까먹었는데, 이 방에는 동행인이 있었다.
"새아버지? 거기서 뭐 하고 계시는……."
하사나의 시선이 내 고간에 꽂힌다.
순식간에 눈빛이 저 심해에 빛도 비추지 않을 것만 같은 심연처럼 어두워진다. 그에 내가 다급히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오, 오해야!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