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스위치 이단심판관 (5)
* * *
"…선조님이시라고요?"
"응. 마조히즘에 의미불명의 말투를 사용하지만 지금 성검에 담겨 있는 건 건국제, 그러니까 앨리스의 선조가 맞는 것 같아."
"……."
앨리스가 침묵한다. 나도 이해한다. 제국을 세운 위업을 아직도 칭송하며 축제를 연간 행사로 벌이는 이들마저 있는 제국에서 사실 그 선조가 맞는 걸 좋아하는 십변태고 중2병이라는 말을 들으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 수밖에.
나 같으면 쪽팔려서 얼굴을 들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내 후손들은 얼마나 다행인가. 조상이 황도의 영웅이라 불리고 성자이기까지 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낄 거라 확신한다.
'자랑스럽겠지.'
본의치 않게 선조의 성취향을 알게 된 앨리스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다시 보니까 역시 그 시체박이 새끼가 건국제의 시체로 부활시킨 언데드의 얼굴이 건국제랑 상당히 닮았구나 싶기는 했다.
머리색깔만 빼면 거의 붕어빵인데.
"그런데 언데드가 된 건국제의 육신은 어떻게 됐어?"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그대로 다시 묻으셨다고 합니다. 복장은 누에의 실로 명인이 짠 드레스로 환복시킨 다음에 말입니다."
"하긴. 그 복장 그대로 묻을 수는 없으셨겠지."
어지간한 복장이면 그냥 묻었겠지만 시녀복, 그것도 매니악한 짧은 치맛단과 가슴골이 보이는 야릇한 메이드복을 건국제에게 입힌 채로 묻을 수는 없었을 거다. 지금이야 네크로 새끼가 일으킨 사건이 소문 나지 않도록 무마시켰지만 나중에 다시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 무덤이 파헤쳐졌는데 메이드복을 입은 건국제가 나와봐라. 황도에 어떤 소문이 나고 황실이 얼마나 망신을 당하겠는가.
나였어도 절대로 그 복장 그대로 땅에 묻는 일은 없었을 터다.
매니악하다지만 앨리스처럼 고성능의 비키니 아머 계열의 방어구라면 또 몰라.
훗. 본녀의 계승자도 태양빛처럼 뿜어지는 본녀의 휘광에 감격해 정신을 눈이 멀려고 하는 듯하구나. 당연한 결과로다.
아니, 폐하. 저건 당신이 부끄러워서 망신살이 뻗친 거라고?!
혼자만의 착각에 빠진 엘레오노라(ver.성검)와 훌륭하게 태클을 거는 선배(ver.마도서)의 콩트는 완벽했다. 과연 생전에 건국까지 같이 해낸 걸로 모자라 속궁합까지 맞춰본 이들다웠다.
'그나저나 역시 앨리스만 따로 불러서 대화를 알려 주기를 잘 했네.'
이곳에 그나마 아비 누나와 아르잔느가 없어서 앨리스의 망신살이 덜 뻗친 걸 테다. 그래도 선조의 비밀스러운 이상성욕에 대해 전해 주는 것이었으니 후손인 앨리스만 듣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둘은 부르지 않았길 잘 했다.
게다가 선배에 의하면 건국제는 제국을 세워 여황제가 된 이후에는 방탕한 삶을 살았던 듯 하니 그걸 쉽게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성검의 정체를 밝히기는 하겠지만.
"그보다 앨리스. 그 복장은 뭐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입어봤습니다. 안 어울립니까?"
"아니. 어울리냐, 안 어울리냐를 물으면 어울려. 복장 이전에 앨리스가 워낙 출중한 미녀잖아."
핑크머리 포니테일 황녀기사로서 순수하게 미적감각만 따지고 보자면 앨리스는 인간임에도 고위요정인 티타니아와 맞먹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자기단련에도 소훌하지 않기에 몸매마저 뛰어난 그녀가 발키리 아머를 입는다면 안 어울릴 수가 없겠지.
나랑 단 둘이 침실을 사용하는, 일단 황녀의 약혼자라 폐하의 허가 하에 침실을 같이 쓰게 됐고 앨리스는 곧장 익숙한 복장이 좋다면 드레스를 훌훌 벗어 버리고 비키니 아머 버전의 여기사 모드로 들어가더라.
다만, 평소랑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청은빛이 감돌며 뛰어난 재질로 제작한 듯한 망토가 급소와 관절만 지키기 위해 있는 부위 중 견갑과 이어져 있었다.
"레온. 잊으신 겁니까? 첫째 공자를 협박해서 미스릴 실로 제작한 망토를 받아내시지 않았습니까."
"아, 맞다. 그런 얘기도 있었지."
"…진짜로 잊으신 겁니까."
앨리스가 이쪽을 향해 어처구니 없다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레콘 형님에 대해 좋은 기억이라곤 아내인 아이 형수님을 내 좆집으로 선물해 준 것 말고는 없기에 별로 잘 기억하지도 않는다.
어깨를 으쓱이자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런 날 흐뭇하게 내려다본다. 마치 철부지 남동생을 돌보는 누나의 모습 같았다.
'눈나!'라고 불러볼까 싶은 유혹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 검술 스승이니 그렇게 부르기에는 뭔가 좀 어색했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앨리스와 만남을 가진 건 이걸 건네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아니, 그냥 아들한테 주면 알아서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던 걸까.
"그나저나 레온. 내일 아버지가 면담을 가지자고 하셨습니다."
"…그건 명령이야?"
"예, 어명입니다."
뭐지. 나 할 거 다 해서 이제 별장으로 돌아가 내 여자들이랑 떡이나 치고 아이도 수풍수풍 만들어서 결혼이나 하고 싶은데. 제아무리 유능해도 일 안 하고 돈 많은 한량의 꿈은 이룰 수가 없는 것인가.
딸인 앨리스를 시켜서 만남을 가지자는 폐하의 어명을 보아하니 명백히 뭔가를 시킬 것 같았다.
부디 나랑 관련이 좆도 없는 일이길 바란다. 안 하고 싶다고 생떼를 부려서라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거든.
***
"사위. 이그드라실로 가서 요정들과 동맹을 구축해라."
"……."
아. 왠지 이럴 줄 알았어.
아마 실시간으로 내 안색이 꺼무죽죽해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영지간의 이동도 귀찮은 내게 노예사냥꾼으로 서로 분위기가 흉흉한 옆나라에 가서 요정들과 협력관계를 만들라고 하다니. 폐하께서는 내 목덜미에 화살이 날아오는 걸 기대하시는 걸까.
아니, 그보다 나 같은 것보다 유능한 협상가들이 한둘이 아닌데 왜 내가 가야 하는 건지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들다.
"폐하. 이런 말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는 협상의 '협'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옵니다."
"어중간한 예의는 때워 치려라. 닭살 돋으니까."
"……."
"나도 그대에게 협상가로서의 자질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럼 왜 가라는 건데.
"그대의 연인 중에 고위요정이 있지 않은가. 그녀와 함께 가서 동맹을 구축함과 동시에 그들의 협력을 받아 흑마법사 조직인 육ㅂ…망성의 최고간부인 타락요정(다크엘프)를 잡으라는 거다."
확실히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리는 아닌 게 요정들에게 있어 왕족이나 다름없는 고위요정(하이엘프)이 함께 사절단으로 본국에 방문해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들도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애당초 요정왕국의 여왕이 티타니아와 자매 관계인 데다가 사이가 좋다고 하니 그녀의 연인인 내가 부탁하면 아예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폐하. 그녀는 일단 제 성노예라는 입장이라서 오히려 그쪽에서 화를 내지 않을까요?"
"황제로서 명한다. 티타니아에게 이그드라실이라는 성을 복구시켜 노예 신분을 해방하며 동시에 하르트 백작의 둘째 정실로 인정한다. 이러면 되나?"
"……네."
화끈하시게 문제를 해결해 버리는 제국의 태양이시었다. 제국의 주인이 노예 한 명의 신분을 벗겨 주겠다는 데 거기에 딴지를 걸 놈이 누가 있을까.
사실 티타니아 정도의 신분을 가졌던 여인이 성노예로 계속 있는 것도 모호했고 국제적으로 상당히 문제가 있었고 말이다. 티타니아가 자처해서 노예로 전락한 거라 그쪽에서 딴지를 걸지 않은 거지 만약 강제로 잡혀온 거라면 전쟁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었을 거다.
"그런데 폐하.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질문을 허한다."
"이그드라실 왕가와 협력해서 타락요정을 잡는다 치더라도 국경지에 있는 이들이 먼저 눈치채고 그쪽과 연락을 취하면 숨어버리는 게 아닙니까?"
간부 둘이 국경지에서 요정을 납치해 사건을 벌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이미 쥬필리아에게서 들었던 우리였기에 내 우려는 합당했다. 아무리 은밀하게 접근한다 하더라도 사절단이니 소수여도 숫자는 좀 될 테고 절차를 밟으며 입국해야 하는 데 국경지에서 꼴에 흑마법사답게 마도구를 쓰든 마법을 쓰든 연락을 취해 일봉이 먼저 잠적하여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잡기가 요원하지 않겠는가.
그런 우려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나왔다.
"걱정 마라. 이미 요정여왕과 협의를 봤고 우리 쪽에서 기사단장과 궁정마법사가 기사단을 이끌고 가서 흑마법사 간부를 조지기로 했으니. 참고로 녀석들을 잡기 위해 일시적으로 요정 노예 제도를 폐지했지. 그를 어기면 최악의 경우 사형에 처하겠다 어명을 내렸고 그 전보가 이미 전국에 퍼졌으니 이 상황에서도 계속 요정을 사냥하려는 연놈들이 있다면 그놈들을 추적하면 된다. 그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대에게는 휴가철이 되겠구나."
"그렇군요."
"그러니 사위는 돌아가 잠시 연인들과 즐기다가 어명이 떨어지면 사절단과 함께 이그드라실로 가면 된다."
"네, 알겠습니다!"
휴가에 가지각색의 매력을 지닌 연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나누라니. 은혜가 하해와도 같아서 감읍한 나머지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연인들과 함께 하는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며 헤벌레 미소를 그리자 피식 웃은 폐하께서 뜬금없이 폭탄을 던졌다.
"아, 참. 마르가리타 이단심판관도 당분간 그대와 함께 하게 되었으니 함께 동행하도록."
"어째서죠?!"
어깨를 으쓱이며 퉁명스럽게 그 이유를 대답해 주신다.
"국경지에서 흑마법사 토벌이 끝나면 바로 같이 이그드라실로 사절단이 되어 가라는 의미다. 그대의 무력은 본 드래곤을 토벌할 정도고, 이단심판관은 피를 빨아 이단인지 아닌 지를 구별할 수 있으니 탐색에 큰 도움이 될 게다."
"…그렇겠네요."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주장에 의하면 피만 맛보면 이단인지 아닌지 바로 간파한다니 안 데려갈 수는 없겠지.
"아니, 잠깐만요. 그런데 굳이 제 집에서 머물 필요는 없지 않나요?"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군."
대답을 회피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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