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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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입장한 건 화려한 치장을 한 청년이었다.
"폐하의 아들이시자 첫째 황자이신 모드레드 나이트킹덤 황자님 입장하십니다!"
아니, 쉬벌. 반역을 저지를 것만 같은 이름을 가진 앨리스의 이복형제 왜 첫째 날에 들어온단 말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황족의 입장에 너나 할 거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허리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황자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음에도 막힘없는 발걸음으로 내 앞까지 걸어 와서는 호통을 치는 건 아니지만 나무라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전하?"
"프리아포스 자작가의 부자를 저렇게 만든 걸 말하는 거다. 합법적인 결투를 제안했건만 어찌 저리 무법적인 행위로 팰 수가 있지?"
"전하. 제가 팼다니요?"
"응?"
내가 언제 그랬지? 라는 심정을 담아 고개를 기울이며 그리 대답하자 황자는 당황했다. 그야 난 사람을 팬 적이 없으니 당당할 수밖에 없다.
"저는 프리아포스 부자가 궁중예법을 모르기에 가르쳐 드렸을 뿐입니다."
"…저렇게 패 놓고?"
"그렇습니다. 아니, 어느 귀족이 결투를 신청하면서 손장갑을 가슴에 던지지 않고 밥 먹는 사람 얼굴에 던집니까? 그리고 결투를 신청하면서 이기면 가문의 기사를 내달라니요. 귀족 간의 전통이 중요하다지만 궁중예법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러니 제가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보시면 상처 하나 없는 데 어떻게 그걸 팬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
황자는 내 말에 합죽이가 되었다.
그래. 내가 먼지 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팼지만 물리적인 증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괜히 홀리 오러에 치료 효과를 담아 신성술을 전력으로 발휘했을까.
게다가 내 말대로 타 가문의 기사를 강탈하겠다는 조건으로 결투를 신청하며 손장갑을 밥 먹는 이의 얼굴에 던지는 미친놈은 없다. 결투란 귀족 간의 폭력적인 대화 수단 중 하나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기사의 명예를 안다는 의미에서 심장이 있을 가슴팍에 던지는 게 전통이니까.
얼굴에 던지면 결투 신청이고 뭐고 그냥 궁중예법을 개무시한 거니 실질적으로 죄가 맞다.
그걸 내가 후유증 하나 안 남기고 (물리)교육을 했다니까 황자도 이 즈음에서 어쩔 수 없다며 물러나리라.
단, 한 가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자작을 팬 건 왜 그렇지? 그는 죄가 없네!"
"……."
───그건 제1 황자가 이 우습지도 않은 사건의 흑막일 때.
'이 새끼였구나.'
휘하의 프리아포스 자작을 시켜 버림패로 써도 상관없는 망나니를 부추켜 날 자극한 흑막이. 설사 그걸 알았다 하더라도 증거도 없고 녀석은 후계 1순위인 첫째 황자라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프리아포스 자작 따위랑은 신분의 차이가 너무 극심했으니까.
이걸 어떻게 대처하면 좋은 걸까. 아비 누나가 성녀 후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상급 수녀에 불과하기에 황자를 막을 권력은 없고, 아르잔느와 앨리스는 위장신분이라 평민이기에 이 대화에 끼어들 체급 자체가 안 됐다. 즉, 공작가의 자제인 내가 가장 높은 신분인 셈이라는 건데 황자가 직접 명분을 갖고 날 쪼아대면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왜 첫째 황자가 뜬금없이 날 저격하며 이렇게 함정에 빠뜨렸냐는 거다.
저 망나니를 패 주려… 교육하려고 일부러 넘어가 준 내 잘못도 있지만 흑막이 나와도 공작가 자제라는 신분과 성흔 보유자라는 신분이면 어지간해서 씹어먹을 수 있다 판단하여 저지른 것인데 생각 외의 거물이 튀어나온 셈이다. 그야 난 귀족 사회도 나가질 않았고 안면 한 번 터 본 적이 없는 고위 귀족이나 황족에게 밉보일 짓을 하지 않았기에 예상할 수 있었을 리가.
여태까지 내가 당했다고 때려준 녀석들은 대부분 양아치에 신분도 변변치 못한 놈들이다.
그러니 고위 귀족과 원한을 맺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내게 황자가 빤히 내려다 보더니 다시 추궁하기 시작했다.
"왜 말이 없지? 자네의 잘못을 시인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아니면,"
반달처럼 휜 눈길로 앨리스를 응시하며 이어 말했다.
"프리아포스 부자의 말에 숨겨야 할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던가."
"…그건 아닙니다."
이 황자란 새끼, 앨리스의 진짜 정체가 엘리자베스 나이트킹덤이라는 황제의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지금 둘째 황자와 황태자 자리를 놓고 팽팽하게, 치열하게 경쟁하는 그의 입장에서 사생아가 툭 튀어나오면 골치가 아프니까 날 엮어서 이렇게 스스로 까발리게 하고 처벌을 내려 아예 경쟁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건가.
지극히, 귀족스러운 사고방식이었다. 정작 나나 앨리스는 황제의 자리 같은 건 귀찮아서 손도 대기 싫다만 그건 내가 현대에 살았던 속물적인 인간이라 그런 거고 앨리스는 그런 내게 물든 거지만.
그나저나 앨리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건 나중에 황위 쟁탈전에 기습적으로 참여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제3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오해할 법한 상황이긴 했다.
'공주기사가 괜히 인기가 많은 게 아니지.'
앨리스는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여기사다. 게다가 공작가 출신이자 성흔 보유자인 나 레온 하르트를 정인으로 두고 있으니 내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녀가 황위 쟁탈전에 참여해서 승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가능성이 낮긴 하겠지만.
그런데 그 낮은 가능성을 걱정해 첫째 황자란 새끼가 이렇게 직접 찾아와 함정을 파고는 날 엿먹이며 함께 싸잡아 앨리스를 처리하려는 거다.
귀족 자제이자 성흔 보유자이며 황도의 영웅이기까지 한 나는 어느 정도의 처벌로 넘어가겠지만 평민 신분인 앨리스는 자기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싸잡아 처벌하면 피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신분을 밝히기에는 황제의 사생아라는 게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니끼.
이렇게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참석하는 연회에서 황제의 사생아라는 걸 까발린다? 저잣거리 음유시인의 풍문에 시달리며 온갖 음해공작을 당하게 될 거다.
반역을 저지를 것만 같은 이름의 황자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에 이런 삼류 자작극을 계획한 거겠지.
"그래. 그 말뜻은 자네의 잘못을 시인하겠다는 건가?"
"아뇨. 그 뜻이 아닙니다."
인정해봤자 앨리스가 처벌을 받는다는 결론으로 밖에 더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머리속의 짱돌을 열심히 굴려 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사고가속]을 사용하자 주변이 느려지고 인지의 시간이 늘어난다.
황자의 계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뭘 하는 게 좋을까. 신분의 격차는 극심. 프리아포스 자작가처럼 체급만 믿고 두들겨 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실력은 차이가 심하나 그렇다고 명분도 딸리는 데다가 첫째 황자가 망나니도 아니고 나름 제대로 정책을 만들고 운영했기에 두들겨 패면 백성의 민심이 돌아갈 거다. 명분도 체급도 딸리는 상황이지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앨리스에게 있어 상당히 귀찮아지는 상황이다.
답이 안 나온다. ……그냥 어영부영 이번만 넘기고 야밤에 황자를 암살할까? 오죽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 떠오른다.
아무리 이복형제에 앨리스를 정치적으로 죽이려고 해도 장인어른의 장자다. 함부로 대할 수 없으니 얌전히 있느라 손이 근질거린다.
'젠장. 이런 귀찮은 상황에 처할까 봐 귀족사회에 나서지 않으려던 건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침묵하는 내게 황자는 대답을 재촉했다.
"그럼 무슨 뜻이지?"
"그건……."
"그러고 보니 최근에 내가 재밌는 정보를 접했는 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황자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게 목적이라 아주 작게 말하고 있음에도 내게는 또렷하게 잘 들렸다.
"프리아포스 공자가 탐 낸 저 여기사가 고위출신 귀족의 사생아라는 소문 말이야."
"……."
당장 저 능글맞게 웃는 면상에 주먹을 때려넣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국을 나가야 하겠지.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법적인 죄도 없는 황자를 때린 날 냅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 황자가 내 머리속에 직접 속뜻을 전했다.
황위 쟁탈전에 날 지지한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네. 오히려 내가 자네와 자네 여인들의 안전을 책임져 줄 수도 있지.
'하. 목적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나.'
앨리스를 황위 쟁탈전에 배제시킬 뿐만이 아니라 성흔 보유자인 내 지지를 얻어 내는 것. 교단에서 중요 인물로 취급될 내가 첫째 황자를 지지한다면 애인인 성녀 후보 아비 누나 또한 첫째 황자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그럼 교단의 고위층의 지지를 얻기 쉬워지며 그 지지는 상당히 큰 세력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교단의 지지를 얻은 첫째 황자는 무서우리만치 세력을 빠르게 확장하게 될 거다.
둘째 황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도 쫓아올 수 없도록 말이다.
게다가 황자라면 내 여자들 중 티타니아가 고위요정 출신으로 이그드라실 요정왕국과 인맥이 있다는 걸 알고 저러는 거겠지. 권력은 탐 내지 않으면서 인맥은 두둑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지금의 내 꼴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또한 선택지로서는 최악이었다. 내 여자를 인질로 저런 협박질을 하는 지금도 손을 못 대는 데 이 녀석이 황제가 되어 손이 아예 안 닿는 곳으로 가 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거절하란 말인가. 아마 황제가 되는 순간 내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는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겠지.
그런 내 기색을 읽은 건지 황자가 다시 마법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
…그냥 팰까. 장인어른께서 남은 신성력을 사용하면 흔적도 안 남기고 팰 자신이 있는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제국의 영원한 태양! 꺼지지 않는 빛이신 카젠 나이트킹덤 폐하 입장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참여해야 할 장인어른께서 연회장에 난입하셨다.
***
이번에도 연회장의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심장이 있을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외친다. 초식동물 무리에 끼어들어 여우 노릇을 하던 황자도 호랑이나 다름없는 황제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의 영원한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손을 들어 연회장을 침묵시켰다. 여전히 카리스마가 압도적인 분이셨다.
"모두 일어나라. 그렇게 숙이고 있으니 고개를 낮추느라 목에 디스크가 올 것 같군."
다들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예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외치는 놈은 황제가 디스크 좀 걸려 보라고 외치는 꼴이나 진배 없으니까. 찍히기 싫으면 알아서 사려야지.
장인어른께서는 렉스 경과 간.D.프 씨……그냥 간디 씨라고 하자. 오른쪽에는 렉스 경을, 왼쪽에는 간디 씨를 대동하고 연회장을 걷자니 귀족들이 눈치껏 좌우로 벌어지며 모세의 기적을 재현한다. 와 씨. 포스 쩌시네.
그렇게 나와 황자의 앞에 도착하신 장인어른은 우리들을 보며 입을 여셨다.
"밖에서도 들려오는 얘기에 연회장에 참여할 수밖에 없겠더군. 앨리스 경이 고위귀족의 사생아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폐하."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내 지지와 앨리스의 배제를 다 잃을 바에는 아예 앨리스를 저격하겠다 이건가.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는 황자의 대답.
연회장의 귀족들은 두 부자의 문답에 수근대며 앨리스를 불쾌하다는 듯이 응시했다. 나 같은 경우도 이복형제지만 정식으로 여인을 부인으로 들이고 안 들이고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를 존중하고 공작가와 완전히 혈연을 끊은 게 아니고.
하지만 앨리스의 친모는 여기사고 장인어른께서는 그분을 아내로 받아들이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시려고 이곳에 난입하신 거지?
혹시 나 같은 범인은 생각도 못한 정치질로 황자를 까시려는 걸까. 기대감을 듬뿍 담은 눈길로 장인어른을 쳐다보자 징그럽다는 듯이 몸서리치신다. 좀 너무하시네.
"그래. 맞다. 앨리스 경의 진짜 이름은 엘리자베스 나이트킹덤이며 내 딸이지. 그래, 아들아. 네 이복동생을 그렇게 까야 속이 시원하더냐?"
……자, 장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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